# 49
049. 우리가 사는 세상의 룰이 그런 거지 (2)
방배동에 위치한 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비서실 직원이 빠르게 다가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한 방향을 가리켰다.
비서진들이 기다리는 곳에 차를 세운 다음이었다.
“기자들과 방송국 카메라가 몰려 있습니다. 질문이 있더라도 그룹 차원의 대응이 나올 때까지는 답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마흔 중반의 직원이 다가와 건넨 조언이었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도 되겠죠?”
“저쪽 공간으로 가시면 카메라를 피해 쉬실 수 있습니다.”
직원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간 천중명은 빌딩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로 언질을 줬었다.
강승애에게 매달리든, 도움 줄 다른 누군가를 찾아보든, 방법을 찾으라는 의미였었다.
그런데 결과는 괜히 말해준 꼴이었다.
아무리 배포가 부족해도 그렇지, 이따위로 인생을 던져 버릴 줄은 정말이지 짐작하지 못했다.
살면서 이런 어려움이 한 번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래놓고 ‘병아리 탤런트’는 또 지켜달라고?
천중명은 시선을 돌려 줄줄이 들어서는 문상객들을 바라보았다. 저 중에 천봉서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씁쓸하게 웃은 천중명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커다란 독일제 승용차가 통제구역으로 들어오더니 뒷좌석에서 강승애가 내렸다.
비서진 사이에서 고개를 돌리던 그녀와 천중명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둘 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잠시 바라본 다음이었다.
비서에게 뭔가 말을 건넨 강승애가 천중명을 향해 똑바로 다가왔다.
웨이브를 살린 머리, 옅은 화장, 검은색 투피스, 염병할 브로치, 다 좋다. 이해한다.
그러나 슬픔이라고는 사이비 종교인의 신앙심만큼도 담기지 않은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천중명은 알지 못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돈 좋지.
잘 굴러가는 건설과 전자회사, 백화점의 주인이 되는 것도 누구나 욕심낼 만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최소한의 도덕성은 지니며 욕심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
“왜 여기 있어요?”
“들어갈 참인데 마주쳤네요.”
“형님이 돌아가셨어도 내가 형수인데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을 뚝 자르고 나타난 강승애의 당당함에 천중명은 픽 웃는 것으로 먼저 답했다.
“막내라고 불러대면서 인사는 받고 싶었습니까? 아, 참! 큰형님이 저렇게 되셨어도 둘째 형과의 관계가 있으니 아직 형수는 형수겠네요.”
강승애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는가 싶더니 삽시간에 표독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에요.”
“몸을 함부로 놀리는 것보다야 낫겠죠.”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였다.
강승애의 눈이 얼마나 독하게 번들거리는지 천중명의 볼과 눈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물론, 그런다고 주눅 들 천중명도 아니지만 말이다.
“둘째 형에게 들었을 것 같은데 마주친 김에 다시 알려드립니다. 아버지 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계획대로 되었다고 너무 방심하지 마시고요. 언젠가 내가 되찾아 올 거니까.”
“그래요?”
천중명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랑 손잡을 생각 없어요?”
“나이 많은 여자는 내 취향이 아닙니다. 더러운 여자는 딱 질색이구요.”
태연한 척 애쓰고는 있지만, 강승애의 눈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괜히 본전도 안 나올 대화 나눠 뭐합니까? 얼른 들어가서 슬픈 척하세요. 앞으로 경영 잘하시고.”
“나도 경고 하나 해도 돼요?”
“말린다고 안 할 것도 아니잖습니까?”
언제부터 이렇게 유들거렸지?
감정을 감추지 못한 상태에서 강승애가 입을 열었다.
“조용히 물러나요. 더 나서지 말고 얌전히. 나는 둘째 형과 또 달라요.”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눈으로 던지는 경고였다.
“아버지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노인네를 챙겨가는 것까지는 인정하지요.”
냉정함을 되찾은 강승애가 칼날 같은 시선을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강승애는 당당함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
윤만석은 답답한 얼굴이었다.
“자네의 선택이 틀렸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저는 제가 본 그분의 눈을 믿습니다.”
“나도 그랬어. 반짝이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듯한 총수님의 눈을 믿었지. 그래서? 지금 내 꼴이 어떤 것 같나? 우리는 그저 충직한 한 마리의 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거야.”
양평에 있는 한적한 레스토랑의 테라스였다.
“자네가 데리고 있는 여섯 명도 생각해야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내가 전에 오랄 때는 거절하더니 왜 이제 와서 느닷없이 막내분과 손을 잡았나?”
윤만석의 감정이 가득 담긴 질문에도 황성규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이었다.
“주인이 바뀌었다니까. 조금 전에 있었던 불행한 일을 자네도 알 게 아닌가. 지금부터 어디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선배님.”
황성규가 나직하게 윤만석을 불렀다.
“선배님께 합류하지 않은 것은 지금 같은 선배님의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박자 느리게 꺼내놓았다.
“욕심에 사로잡히셨더군요. 그게 돈인지, 권력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알던 선배님의 눈빛은 아니었습니다.”
“후우. 또 말하지만, 자네만 바라보는 저 친구들은 생각 안 하나? 자네가 보았다는 눈빛? 그게 변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냐고?”
윤만석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여섯 명의 남자들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군, 경찰, 국정원, 행정부, 입법부, 해킹. 어느 곳에서도 빠지지 않는 저 친구들의 미래를 자네가 썩은 동아줄에 매달고 있는 거라고.”
“선배님이 선택하신 동아줄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이럴 셈인가?”
나직하게 숨을 내쉰 황성규가 저쪽 테이블에 있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 녀석 중 누구라도 개별적으로 접촉해서 데려가신다고 해도 따로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건가?”
“그보다는 지금의 선배님께 저 친구들을 설득할 명분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윤만석이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은 눈으로 황성규를 노려보았다.
아직 이른 봄이다.
어둠과 함께 달려든 이슬이 테라스의 난간과 파라솔, 주변의 잔디에 매달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천호득 회장님을 위해 안 한 짓이 없네.”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내 인생 이십 년을 송두리째 바쳤지.”
“적당한 보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흥! 충직한 개에게 주는 뼈다귀 말인가?”
윤만석이 입술을 삐쭉인 직후였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만남은 입을 다물겠습니다. 다만, 다음번에 일로 부딪힐 땐 저 역시 보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룰이 그런 거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황성규가 윤만석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
장례식장인지 공연장인지 모를 광경이었다.
문상객이 들어올 때마다 어깨에 카메라를 걸친 방송기자가 달려들어 라이트를 밝게 비췄고, 연달아 플래시가 터졌다.
“흐윽! 흐으으!”
가증스럽게도 휠체어에 앉은 천상기는 울먹이며 들어섰다.
물파스라도 처발랐는지 심지어 벌겋게 부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경그룹의 둘째 아들 천상기 회장이 들어왔습니다. 금융과 시행 등을 맡았던 천상기 회장은 특히 고인이 된 천봉서 회장과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이크를 든 기자가 숨 가쁘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형니-임!”
휠체어에서 비통한 음성을 쏟아낸 천상기가 상체를 앞으로 떨궜고, 그걸 지켜보던 강승애가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가렸다.
인간들 참 무섭다.
죽은 사람이 고함을 지를 일은 없겠다만, 빤히 영정이 내려다보는 앞에서 저 지랄들을 떨어대다니.
영정의 한쪽에 서 있던 천중명은 덤덤한 시선으로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아파트 건설을 무리하게 진행했던 천봉서 회장은 자금 회전에 곤란을 겪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룹 총수인 천호득 회장마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카메라에 대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저 카메라 앞에 나서서 휴대전화기에 담긴 증거들을 내밀면서 ‘사실은 이렇다!’라고 밝히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천중명은 같잖아서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시선을 돌렸다.
네모난 사진틀에 담긴 천봉서의 얼굴이 두꺼비 같은 표정으로 천상기와 강승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진짜 천중명이 만났습니까?
당신 앞에서 벌벌 떨던 그 천중명이요.
일단 조용히 넘어갈 겁니다.
내가 손을 떼면 총수님도 바로 이 모습이 될 것 같아서 그것만은 우선 막을 생각이거든요.
높은 곳에서 뛸 용기가 있으면 찾아오지 그랬어요?
바보같이 이게 뭡니까?
천중명이 영정을 향해 답답한 속을 전할 때였다.
검은색 정장의 여자가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진한 화장을 한 오지은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독기가 강승애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당신, 수상해.”
파릇파릇한 독기를 피워내며 오지은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전에 저축은행에서도 그렇고. 내가 당신 지켜볼 거야. 그리고 내 앞에서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할 거야. 두고 봐.”
어쨌든 천중명에게 최선을 다했다가 버림받은 꼴이라서, 솔직히 오지은이 이러는 건 이해할 만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럴 시간이 있을까?”
뭔 놈의 장례식에 가족이나 문상객이나 목적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건지.
천중명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을 날도 며칠 없을 거야.”
“알았으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연락하지 마. 그리고 당신과 허선영, 두 사람 모두 각오해. 이 말 하려고 왔어.”
찬바람을 쌩하니 남긴 채 오지은이 돌아섰다.
제대로 좀 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당최 왜 이렇게 죄들을 많이 지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문상객의 숫자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줄지어 들어선 조문객들이 향을 사른 뒤에 강승애와 천상기, 그리고 천중명의 순으로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우르르.
재벌가의 후계자들이 들어서면 내내 기다리던 문상객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었고, 정치인들이 들어와도 모습은 비슷했다.
자정을 넘어서자 이번엔 운동선수들이 분명한 남자와 여자들이 들어섰다.
천봉서가 핸드볼협회를 맡고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하여간 쉴 틈 없이 문상객이 들어서고 있었는데 천중명이 보기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대표님.”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묵직하게 깔리는 음성의 유진교였다.
“잠시 나가시죠.”
강승애와 천상기의 번득이는 시선 앞에서도 유진교는 태연하게 천중명을 불렀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서지 못하는 휴게공간으로 안내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여기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휴게실의 밖으로 나갔던 유진교가 직접 종이컵을 들고 돌아왔다.
서 있는 것이 지치던 참이었다.
탁자에 앉은 천중명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둘째 아드님 쪽에서 찾아왔었습니다.”
“누가요?”
“박무일 전무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유진교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천상기의 심복인 게 분명했다.
“장례식이 끝나는 대로 대표님이 맡고 계신 세 개 회사에 새로 대표이사를 임명하겠다는 통보였습니다.”
“나를 잘라내겠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다른 말을 할 게 없었다.
지분 한 주 없는 터라 이사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어려울 게 뭐 있어요? 시원하게 말씀하세요.”
“대표님께서 보살피지 않겠다면 총수님의 호흡기를 떼겠답니다.”
유진교의 말을 듣는 순간에 기가 차서 픽하는 웃음이 나왔다.
“제가 보살펴야 한다는 말뜻을 정확하게 모르겠는데요?”
“병원비와 혹여 깨어나신 뒤를 말하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그런 내용이 밖에 알려지면 곤란하지 않나요? 이목이라는 게 있을 텐데요?”
“명분은 저쪽에 있습니다. 지주 회사의 지분 이전이 사망 이전이냐, 사망한 이후냐에 따라 상속세가 크게 달라집니다. 게다가 언론이 둘째 형님께 우호적일 거라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자금난에 시달렸다고 떠드는 꼴을 보면 이사장 집안이 도왔다는 핑계로 회사를 가져갈 생각인가 보군요. 세무조사 없이요.”
“정확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유진교가 망설임이 없이 대꾸를 꺼냈다.
“박 전무였나요? 그 인간에게 말을 전하실 수 있지요?”
“가능합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전해주세요. 내가 눈 돌아가면 다 죽는 수 있다고요. 그리고 저도 원하는 게 있으니까 장례식 끝나고 형과 의논하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거친 지시였는데 유진교는 어쩐지 그 지시가 마음에 든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