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048. 우리가 사는 세상의 룰이 그런 거지 (1)
고급도시락 수준의 저녁을 먹고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받아드는 데까지 10분이 채 안 걸렸다.
천중명과 곽대출은 두 개씩 먹었는데도 그랬다.
한 개의 도시락을 채 다 못 비운 유진교가 분위기에 눌린 것처럼 젓가락을 놓고는 비서실 직원이 준비해 준 커피를 받았다.
“원래 이렇게 빨리 드셨습니까?”
곽대출이야 그렇다 쳐도 천중명의 식사량과 속도에 놀란 눈치였다.
“점심을 못 먹었거든요. 앞에서 곽 부장이 빠르게 먹으니까 이상하게 따라가네요.”
“속도가 빠를수록 많이 먹게 된다는 말이 있기는 있지요.”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자 조금은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만약 총수님이 계속 저렇게 계시면 지경그룹은 어떻게 됩니까?”
“상황이 복잡하긴 한데 몇 가지 경우의 수로 정리됩니다.”
비서실 직원들이 빠르게 탁자 위를 치워주어서 병원이 아니라 회사의 회의실에 앉은 느낌이었다.
비서실 직원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유진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큰형님께서 구속된다면 작은형님이 기회를 잡습니다.”
“기회라뇨?”
“이사회를 장악해서 지주회사의 지분을 확보하려 들 겁니다. 총수님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은 눈치 볼 필요 없고, 상속세 염려도 없으니 최고의 기회이겠지요.”
상황을 설명한 유진교를 천중명이 궁금한 눈으로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둘째 형이 총수님을 더 노릴 필요가 없는 건가요?”
유진교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종류의 말을 병실에서 꺼내지는 말라는 의미처럼 보였다.
“무서울 게 있나요? 어차피 답이 다 나왔는데요?”
“조심하시는 게 좋지요.”
“아무튼, 총수님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잖습니까?”
괜히 뛰어가서 천상기를 두들겼나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천호득이 살아 있는 것이 그에게 더 유리하다면 제대로 헛짓거리를 한 셈이었다.
물론, 속이 후련한 건 있지만 말이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사회를 단숨에 장악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려면 아무래도 총수님이 안 계시는 게 좋지요. 상속세야 나중에 강승애 이사장을 통해서 방법을 찾아도 될 테니까요.”
“어떤 쪽이든 둘째 형이 유리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유진교의 답이 있고 나자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한마디로 천호득이 깨어나더라도 늦게 깨어나거나, 혹은 저대로 사망한다면 그룹 전체가 천상기의 손에 넘어간다는 의미였다.
하기야 뭐, 누워 있는 양반이 걱정이어서 그렇지, 천중명이야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었다.
아직 통장에 20억쯤 있고, 건강한 몸뚱이에 곽대출이라는 동반자까지 있으니 세상 사는데 꿀릴 것이 뭐 있겠나.
커피를 마시고 났을 때였다.
지이잉.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천중명의 전화기가 울었다.
[엄마 도착하셨어요. 고마워요.]
허선영의 문자가 있었고,
지이잉.
[총수님께서 입원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계약서 검토 단계인데 손도운 씨와의 계약을 연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문자드립니다.]
지경 화장품의 이중성 부사장의 문자가 연달아 들어왔다.
[이쪽에 상관없이 원안대로 계약하고 미니멈 개런티 전달하세요. 혹시 부사장님이 결정하지 못할 사안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약을 마친 뒤에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천중명이 지시를 보내자 이중성의 답 문자가 있었다.
그 뒤로 고상득 상무가 보낸 장문의 위로 문자가 도착했는데 혹시 말이 길어질까 봐 딱히 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윤만석, 이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 있길래 여태 연락조차 안 되는 거야?
천중명이 안쪽 문을 통해 천호득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무거운 표정의 비서실 직원이 들어와 유진교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TV를 틀어봐.”
유진교가 지시했고, 직원이 바로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보도 채널을 찾아 번호를 누른 직후였다.
[지경그룹 천봉서 회장 투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면 아래 빨간색 줄에 새겨진 하얀 글씨였다.
직원이 볼륨을 높였다.
[투신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경그룹 천봉서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투신한 것을 건물 관리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천봉서 회장은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도를 보는 순간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서 천중명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천호득의 말 대로였다.
궁지에 몰리면 뚫고 나가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할 거라던 그의 예측대로 천봉서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경찰은 혹시 있을지 모를 유서를 확보하기 위해 천봉서 회장의 집무실을 확인하는 한편, 투신 이유를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TV 꺼.”
거기까지 보도를 확인한 유진교가 나직하게 지시하고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나다. 지금 들었다. 그룹 비서실과 기획실이 나서서 지휘해. 무엇보다 추측성 보도를 막는 데 주력하고, 고인의 업적을 부각하는 기사에 집중해.”
마치 이런 상황을 연습했던 사람처럼 유진교의 지시는 막힘이 없었다.
“부고는 명단대로 처리하고, 취재 기자들을 엄격하게 제한해. 장례는 그룹장으로 진행한다고 발표하고. 그래.”
정말이지 냉정하고 침착한 지시였다.
그러나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기를 내려놓는 유진교의 볼이 씰룩이는 것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일 처리와 별도로 이런 지경까지 온 것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가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죠. 어디로 가지요?”
“댁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으십시오. 그 안에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천중명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문을 통해 천호득이 누워 있는 병실로 들어섰다.
“곽 부장. 큰형이 투신자살한 모양이야. 그리 가 있을 테니까 여길 무조건 지켜.”
“네.”
답을 한 곽대출이 질문을 담은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혼자 가도 되겠어?’
‘장례식장에서 뭔 일 있겠냐? 여차하면 다 두들겨버리지 뭐.’
곽대출이 병실은 염려하지 말란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견디기 어려울 테니까 장만섭을 불러.”
“알아서 하겠습니다.”
유진교를 의식해서 곽대출의 답은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
삼성동 집에 들어온 강승애는 화장대 앞에 있었다.
너무 진하지 않게, 그러나 또 추레해 보이지 않는 화장을 위해 나름 공을 들인 참이었다.
강승애가 화장대의 거울을 향해 얼굴을 좌우로 돌려볼 때였다.
그녀의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말한 대로 내일 세무조사는 우선 막았다. 저쪽도 다른 말 않더라.
그녀의 부친인 강종환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무렴 자살한 사람의 회사를 특별 세무 조사하는 법이 어디 있어요?
- 그래. 준비는?
“조금 있다가 출발할 거예요.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천봉서 회장이 천호득 총수마저 혼수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도움 받을 길이 없어져서 막다른 선택을 한 거예요. 아시죠?”
- 이미 아는 편집장들에게 그렇게 말해 놓았다.
고개를 끄덕인 강승애가 입가에 번진 화장을 찍어냈다.
“지금부터 더 조심하셔야 해요. 하이에나 같은 언론에 노출되는 일 없도록 특히 조심하시구요. 준수는 미국에 있는 거 맞지요?”
- 그건 걱정하지 말고. 그나저나 네가 힘들어서 어쩌냐?
“이번에 좀 힘들고 나면 그만인데요. 또 전화 드릴게요.”
- 몸 챙겨.
“네.”
통화를 마친 강승애는 거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허비한 내 인생에 대한 보상을 받는 거야. 당신은 내게 억울해할 이유 없어.”
마치 거울 속에 천봉서가 있는 것처럼 강승애의 눈매는 매서웠다.
**
결국, 천상기는 휠체어를 구해 앉았다.
천중명에게 밟혔던 무릎이 시간이 흐를수록 통나무처럼 퉁퉁 부어오른 데다, 움찔거릴 때마다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끄응.”
휴대전화기를 꺼내던 천상기가 신음을 뱉어냈다.
뭘 어떻게 때렸기에 얻어맞은 목덜미와 옆구리, 허리, 허벅지가 송곳에 찔린 자리처럼 꿈쩍할 때마다 통증이 울리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야. 장례식이 끝나면 바로 이사회를 열 수 있도록 준비해. 다른 거 필요 없어. 이번에 마침 지경 화장품의 전환사채를 발행한 게 있으니까 그 연장선이라고 하고 지경랜드의 전환사채도 발행해.”
복도의 턱에 휠체어가 걸리는 바람에 천상기가 인상을 버럭 찌푸렸다.
“그래! 그 지경랜드의 전환사채를 내가 인수해야지. 세금 문제나 정부 시선은 염려하지 말고, 언론이나 제대로 단속해.”
말을 마친 천상기가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비틀어서 비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사회에서 전환사채 발행을 반대할 인간들 명단을 추려. 나머지는 장례가 끝나면 단숨에 진행하고. 참! 지경 화장품은 어떻게 됐어?”
건물 현관에 나서자 천상기가 움직이기 편하게 최고급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당장은 명분이 필요하니까 그쪽에 건넨 200억에 해당하는 전환사채 발행을 장례절차 안에 마무리 지어.”
비서진들이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천상기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언론을 틀어막아. 아무리 총수의 장남이라 하더라도 경영 손실을 그룹에서 함부로 메워주지 않는 냉정함이 극단적인 선택을 불렀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 해. 우리의 미래는 밝다, 왜 그러냐 하면….”
말을 하던 천상기가 모처럼 만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앞으로 지경그룹을 이끌 사람이 천상기어서 그런 거지. 국제 감각 뛰어나고, 금융회사를 운영했기 때문에 자금 운용 경험이 풍부하고. 그렇지! 그런 식으로.”
상대의 말을 듣고 있던 천상기가, “끊어.”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모시겠습니다.”
비서진들이 휠체어 네 곳을 붙들고 단숨에 들었다.
“끄응. 야, 이…!”
짜증과 욕설을 뱉어내던 천상기가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승합차의 문이 닫혔다.
**
빌라에 들어선 천중명은 먼저 허선영의 소개로 그녀의 모친과 인사를 나누었다.
“천중명입니다.”
“말씀 들었어요. 초면에 이렇게 폐를 끼쳐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송순주는 허세직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아한 인상이었는데 허선영의 커다란 눈이 모친을 닮았구나 싶을 정도로 눈이 크고 맑았다.
세상이 또 이렇다.
둘이서 폐를 끼치기 뭐해서인지 차 한 잔 마신 흔적이 없었고,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팔려서인지 천봉서의 자살 소식마저 모르는 눈치였다.
“저녁은?”
“간단하게 해결했어요.”
허선영이 미안한 얼굴로 대답한 다음이었다.
“큰형님이 돌아가셨어.”
천중명이 조용하게 건넨 말에 모녀가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주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겠는데 최소 이틀은 밖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네.”
천중명을 염려하는 눈을 하고서도 허선영은 말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내일 일하는 분이 오실 거야. 내가 가는 길에 문자 보내놓을 텐데 이렇게 제대로 식사 안 하고 있으면 계속 신경 쓰게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그래. 선영 씨도 그렇지만 어머님은 더 불편하실 거잖아. 그러니 당신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편안하게 지내야 어머님이 그만큼 편해지시지.”
허선영이 살짝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시간을 끌 틈은 없었다.
천중명은 샤워실로 들어가 빠르게 몸을 씻고는 검은색 정장과 검은색 타이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갑과 차 키를 챙긴 다음, 마지막으로 드레스 룸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볼 때였다.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본 허선영이 드레스 룸으로 걸어왔다.
“왜?”
“힘든데 도움 못돼서 미안해요.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구요.”
허선영의 눈을 보며 천중명은 지겹도록 힘겨운 날에 대한 최고의 보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신뢰하는 감정이 분명하게 올라와 있어서였다.
안아보고 싶었다.
팔을 뻗어 앞에 있는 허선영을 안아주고 싶었고, 그녀의 온기로 위로받고 싶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짐작도 못 하겠어. 지금까지 예상했던 대로 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풀어가 볼 생각이야.”
“내가 도움 될 일은 없어요?”
“지금은 이곳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밥 많이 먹는 거.”
부드럽게 웃는 허선영을 향해 천중명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었다.
허선영의 커다란 눈이 천중명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대로 더 있으면 안으려 들지 모른다.
“다녀올게.”
“조심하세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드레스 룸을 나선 천중명은 송순주에게 인사하고 빌라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