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47화 (47/315)

# 47

047. 오래 기억될 거다 (2)

빌딩 사이로 병원의 간판이 보이는 사거리에서 천중명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천중명입니다.”

- 너는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이름을 대기 무섭게 어금니로 씹듯이 뱉어낸 천봉서의 질책이 달려들었다.

“어디십니까?”

- 병원에 있다. 도대체 이 허접한 아이는 뭐고, 누구 마음대로 병실을 지키느니 마느니 요란을 떠느냔 말이다!

천중명은 입술에 힘을 꾹 주고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이상하게 화가 나기보다는 아무것도 모른 채 큰소리치는 천봉서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올라왔다.

“10분 안에 도착합니다. 도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 전에 이곳에 이 쓸모없는 사람을 치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 허어!

기가 찬 천봉서의 반응 직후에 천중명은 전화를 바로 끊었다. 어차피 10분 뒤면 만날 텐데 굳이 전화기 들고 말싸움을 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싶었다.

파란색 물감에 검은색을 왕창 부어놓은 것처럼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빨갛고 파란 신호등이 유독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천중명의 오늘은 어떤 색이라고 판단해야 할지 궁금했다.

멈추라는 빨간색? 달리라는 파란색? 그도 저도 아니면 달리던 것을 멈춰야 할 때가 되었다고 경고하는 노란색일까?

염병할.

재벌의 아들이 되었으면 좀 해외여행도 하고, 김순례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편안한 삶을 즐겨줘야 하는 게 아닐까?

병원의 입구에 들어서며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독일제 고급승용차, 비싼 정장, 한도가 엄청난 신용카드, 70억짜리 빌라까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천중명의 삶이 부러울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였다.

승용차가 병원의 현관 앞을 지날 때였다.

비서실 소속으로 보이는 직원 두 명이 앞에 나타났다.

차량 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희가 보관하겠습니다. 필요하실 때는 비서실 직원 누구에게라도 말씀하시면 됩니다.”

“고마워.”

운전석에서 내린 천중명은 바로 병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복도를 돌아 안쪽에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주차장 헤맬 필요 없지요, 쭉 서서 엘리베이터 기다리지 않아도 되지, 사람이 거만해지는데 이만한 환경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올라간 천중명은 바로 천호득의 병실로 향했다.

병실 앞까지 비서실 직원의 숫자가 좀 더 늘어 있었다.

드르륵.

문을 열자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천봉서가 두꺼비 같은 고개를 돌렸다.

천중명은 우선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였다.

침대 건너편에 유진교가 있었고, 오른쪽 안쪽에는 곽대출이 독사 같은 눈과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긴, 두꺼비가 독사와 한 방에 있었으니 불편하기도 했겠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

“작은형을 만나고 왔습니다.”

천봉서의 고개가 갸웃하며 비틀렸다.

“상기가 전화를 안 받던데? 너를 만나고 있었다고?”

“예.”

“무슨 일로?”

후계자 상속을 두고 너희 둘이 음모를 꾸민 것이냐, 하는 표정이었다.

내일이면 세무조사를 받을 거고, 이후에 검찰 조사를 통해 구속될 인간이 당장 눈 앞에 펼쳐진 욕심을 감추지 못한 채 서 있는 꼴이라니.

“전무님. 곽 부장. 자리 좀 잠깐 비켜줘. 거기 직원들도.”

유진교와 곽대출이 고개를 짧게 숙이고는 병실을 나섰다.

“거기 직원들도 나가 있으라니까!”

천중명이 다시 지시하자 직원 둘이 천봉서의 눈치를 살폈다.

“나가 있어.”

“예.”

그리고는 천봉서의 지시를 받은 뒤에야 병실을 나섰다.

의식을 잃은 천호득, 살짝 겁이 난 천봉서, 결심을 굳힌 천중명, 이렇게 셋이 남았다. 커다란 병실에 말이다.

“잠깐 앉으시죠.”

병실 안쪽의 소파를 두고 천중명은 8인용 탁자로 움직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다음이었다.

“우선 이 문자를 보십시오.”

가장 먼저 천중명은 천상기와 주고받은 문자를 보여주었다.

[200억은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마. 정직원 교체는 회의와 결정 과정이 필요해서 당장 답을 줄 수 없다.]

[협박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공연한 오해가 외부로 퍼져 그룹 이미지를 추락시킬까 봐 우선 협조한다.]

“둘째를 협박했었다는 내용을 이렇게 당당하게 보여줘? 네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도대체….”

“일단 들으십시오.”

천중명은 다시 차 안에서 녹음했던 통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지경갤러리에서의 의논이라니….”

“이것까지 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천중명은 천상기와 강승애가 호텔에 들어서는 사진까지를 보여주었다.

솔직히 지경그룹을 이어받겠다는 천봉서 정도라면 좀 냉정하고, 담대하며, 잔인한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천봉서가 보인 반응은 한 마디로 처참했다.

“후-. 어떻게 이런 일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천호득이 왜 그토록 천봉서를 낮게 평가했는지 평가표를 들여다보는 심정이었다.

“내일 형님이 가진 두 개 회사에 세무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멍한 상태에서 화들짝 천봉서의 고개가 올라왔다.

표정 좀 감춰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호텔에 다른 일로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쯤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러니 천상기가 얼마나 쉽게 가지고 놀았을까?

“이사장과 둘째 형님이 손을 잡았습니다. 형님이 구속되고 나면 건설과 전자, 백화점을 이사장이 넘겨받고, 그 대가로 지경그룹은 둘째 형님이 차지하기로 했었나 봅니다.”

최소한 천중명이 모함한다는 의심 정도는 해줘야 할 대목인데도 천봉서는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총수님이 저렇게 되셨구나.”

이건 또 뭔 소리야?

천호득을 바라보았던 천봉서가 시선을 돌렸다.

“만약 내가 잘못되면 부탁 하나만 하자.”

그리고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최근에 돌봐주는 아이가 하나 있는데 비서실에 말해서 그 아이가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살펴다오.”

워낙 비장하게 부탁하는 일이라 얼핏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거나, 혹은 다른 여자에게서 얻은 자식이 있는 줄 알았다.

“드라마 출연 확정되었으니까 그것도 끝까지 지켜주고.”

그러나 이어진 천봉서의 말에 하마터면 따귀를 갈겨버릴 뻔했다.

속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구나 싶었고,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 이런 인간이 지경그룹을 맡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총수님이 저렇게 되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생각을 좀 더 해보고 말하마.”

뭔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천봉서는 뱉었던 말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뤘다.

“세무조사를 막기 위해서 알아본 곳이 있습니다.”

천중명은 올라오는 분노를 삼킨 채, 허세직과 만나본 사람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 그가 처한 상황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어려울 거다. 총수님이 나서지 않으시면 국세청장을 막는 건 어려워.”

“그렇다고 이대로 당하실 겁니까? 세무조사에서 걸릴 일이 있기는 합니까?”

“비자금을…, 만든 게 있다.”

“예? 얼마나요?”

말을 하기 어려운지 천봉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구속시킨다는 말을 했던 거군요.”

천봉서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고개가 끄덕여져?

다른 사람 일이 아니라 당신이 구속될 거라고!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천중명이 억지로 삼킨 다음이었다.

“둘째를 조심하라고 하더니 이래서였구나. 내가 의심하지 않도록. 새로 들인 아이를 알고도 조용하게 받아들이더라니.”

“일단 피하세요.”

“하나만 묻자. 너는 왜 허 의원에게까지 매달렸던 게냐? 차라리 둘째에게 붙었다면 훨씬 얻는 것이 많았을 텐데? 혹시 그래서 둘째를 만나고 온 게냐? 둘째가 조건을 받아주지 않아서?”

느닷없는 질문이었는데 천봉서의 입장에서야 궁금할 만도 하겠지 싶었다.

“애초에 그쪽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형을 만난 건 더 이상 아버지를 건드리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서 였구요.”

“아버지? 총수님 말이냐?”

“예.”

천봉서는 누워 있는 천호득을 보며 잠시 시간을 끌었다.

“알았다. 내가 사무실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펴본 뒤에 할 말이 있으면 다시 연락하마.”

시선을 돌렸던 천봉서가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옮긴 그는 천호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검지에 집게를 물려놓은 천호득의 손을 잡았다.

지경병원에 하나밖에 없는 화려하고 커다란 병실이었다.

병실 출입문만 두 개다.

하나는 의료진과 관계자가 직접 들어오는 곳, 다른 하나는 옆에 따로 있는 응접실로 들어오는 문이었다.

방문객은 응접실로 들어와 비서진들을 먼저 만나야 할 정도로 넓은 병실이었다.

이런 병실에서 마누라와 동생에게 인생의 가장 큰 배신을 맞이한 큰아들이 자식에게 당해서 의식을 잃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얼핏 보면 천봉서가 애처롭게 느껴질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배다른 여동생의 살해와 부친인 천호득에게 독극물을 먹였을 정도로 개망나니 짓을 했던 아들이었다.

가루가 얼마나 고운지 모를 만큼 갈리고 갈린 콩가루 집안에서 참으로 보기 힘든 인간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가 보마. 잘 지켜드려.”

천봉서가 정말이지 복잡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쓰러지기 전에 천호득은 이번 일로 저 두꺼비가 필시 죽게 될 거라고 했었다.

그의 이마와 눈가를 덮은 그늘을 보며 천중명은 그가 나쁜 생각을 하나 싶었다.

붙잡고 다독여줄까?

천중명이 망설이는 순간이었다.

“아!”

문을 나서던 그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것처럼 몸을 돌렸다.

“내가 말한 아이, 잊지 말고 살펴다오.”

기가 막힌 당부였다.

생각이라는 게 있는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당부이기도 했다.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침묵을 대답처럼 받아들인 표정으로 천봉서는 병실을 나섰다.

“후.”

홀로 남은 천중명이 짧은 숨을 내쉴 때였다.

유진교와 곽대출이 들어섰다.

“세무조사와 구속이 될지 모른다는 일을 모두 이야기했습니다.”

“표정을 보고 짐작했었습니다.”

유진교가 무거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윤 실장은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천중명이 힐끔 돌아본 시선을 곽대출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받았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말씀하시면 비서실 직원들이 응접실에 준비합니다.”

“그럼 저녁 먹지요. 어차피 긴 싸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예. 그리고 괜찮으면 병실에 비서실 직원 한 명을 두겠습니다. 곽 부장이 자리를 못 비우니 자질구레한 일을 도와줄 직원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유진교가 병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대표님도 윤 실장을 의심하는 거지?”

“지금은 그러네.”

곽대출의 질문에 천중명이 짧게 대답했다.

**

깡패 대가리가 조직원을 더 불러서 사무실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동안 천상기는 급하게 온 의사를 통해 응급치료를 받았고, 무릎에는 압박붕대를 감았다.

치료가 끝난 천상기는 회의실에 홀로 들어섰다.

책상이 있는 방에서는 아무래도 도청이 있을까 염려돼서 그랬다.

휴대전화기를 든 그는 강승애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무슨 일이에요?

“막내 놈이 다녀갔습니다. 저와 이사장님이 호텔에 출입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더는 총수님에게 손쓰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떠났습니다.”

- 그랬군요.

너무 덤덤한 반응이어서 천상기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이었다.

- 회장님이 전화를 했었어요.

“예? 회장님이요? 형님이 말씀입니까?”

- 네. 막내가 말했던 게 사실이냐고 묻더군요. 호텔에서 만난 게 맞느냐고도 물었고요.

천상기는 두근대는 심장을 누르느라 입도 떼지 못했다.

- 답을 하지 않았더니 1분쯤 전화기를 들고 있다가 알겠다면서 끊었어요.

“형님이…. 다른 말씀이 없었다구요? 그러다가 혹시 막내 놈과 손을 잡으면 어떡합니까?”

- 그 사람은 그럴 배포가 없어요.

이번에는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 천상기는 입을 다문 채 설명을 기다렸다.

- 세무조사를 막을 방법이 없느냐고 물어서 절대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답했거든요. 마지막에 우는 것 같은데 그렇게 통화가 끝난 거예요. 알겠다면서요.

“하아.”

천상기는 짧고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천봉서는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궁지에 몰리면 악착같이 달려드는 게 아니라 툭 던져 버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먹고 떨어지라는 의미인데 이번 일은 회사를 던져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구치소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연 천봉서가 그 과정을 견딜 수 있을까?

- 기다려 보자구요.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강승애의 말을 들은 천상기가 이를 꽉 깨물었다.

- 어쩌면 오늘이 지경그룹의 진정한 후계자가 탄생하는 날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축하는 나중에 할게요.

“네, 이사장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천중명에게 밟혔던 다리를 의자에 걸쳐놓은 자세인데도, 천상기는 고통보다는 기대와 설렘을 억지로 누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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