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046. 오래 기억될 거다 (1)
회전의자에 앉은 채 물러났던 천상기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발을 버둥댔다.
의자의 등받이가 벽과 유리에 걸렸다.
그런데도 천상기는 놀이기구를 탄 아이처럼 자꾸만 발로 의자를 밀었다.
“무서워? 형의 부인과 지랄 떤 것으로도 모자라 아버지도 죽이려던 인간이?”
천중명이 의자 앞으로 다가선 순간이었다.
콰당!
거칠게 문이 열리고 밖에 있던 덩치 셋이 뛰어들었다.
“여기야!”
천상기가 덩치들을 향해 고함을 지른 직후였다.
휘익! 콰악!
천중명은 발을 들어 회전의자에 앉은 천상기의 가슴을 구둣발로 밟듯이 유리에 처박았다.
콰다당! 철퍼덕!
로프에 튕긴 프로레슬링 선수처럼 유리에 처박혔던 천상기가 바닥에 널브러졌고,
와락! 와락!
뒤에 있던 두 놈이 천중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휘익!
멍청하게 날린 주먹이었다.
소파 근처에 자빠진 놈들을 보았을 텐데도 천중명이 별거 없을 거라 생각한 게 분명했다.
터억!
놈의 주먹을 잡아챈 천중명은 그걸 오른쪽 어깨에 걸쳤다.
휘익! 콰악!
그리고는 등을 돌려 함께 달려들던 놈을 소파로 밀쳤다.
꽉!
오른팔을 잡힌 놈이 왼손으로 천중명의 뒷덜미를 잡았고,
꽈드등!
밀려난 놈은 소파에 걸린 몸을 세우려 버둥댔다.
휘익! 콰자작!
“끄아! 끄아아아!”
어깨에 걸친 팔을 부러트리자 견디지 못한 비명이 터졌다.
책상 안쪽으로 움직인 천중명은 일어서려는 천상기의 옆구리를 발등으로 걷어찼다.
퍼억! 퍼억!
“끄윽! 끅!”
천상기가 옆구리를 안은 채 데굴데굴 바닥을 구를 때였다.
“이 개새끼가!”
결국, 소파로 밀려났던 놈과 가장 뒤에 들어섰던 놈 둘이서 회칼을 뽑아 들었다.
이런 거 천중명 전문이다.
깡패들이 먼저 뽑지 않아서 그냥 팔만 부러트린 거였지, 이렇게 나와 주면 오히려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다.
휘익!
천중명은 책상 위에 있는 만년필을 거꾸로 집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소파 앞에 있던 놈에게 뛰어들었다.
놀랄 틈이 있어?
푹푹푹푹푹푹푹푹!
놈의 목덜미와 겨드랑이, 어깻죽지에 만년필이 사정없이 박혔다.
“어?”
놀란 놈의 상체에서 피가 쭉 번져 나왔고,
“어? 어?”
콰다다-당!
뒷걸음질로 밀려나던 놈이 소파의 탁자에 주저앉는 것처럼 무너졌다.
천중명은 다시 책상으로 움직였다.
하, 이 얍삽한 새끼!
그새 웅크려 앉은 천상기는 휴대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콰악! 콱! 콱! 콱! 콱!
“악! 아악! 아아악!”
천중명은 그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허벅지를 세차게 밟았다.
와락!
그 틈을 노리고 마지막 남은 놈이 달려들었다.
휘익!
천중명은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푸욱!
그리고는 오른손에 움켜쥐었던 만년필로 놈의 목덜미를 제대로 찍었다.
꿈뻑. 꿈뻑.
목덜미를 만년필로 찔린 놈의 반응이었다.
몸을 돌린 천중명은 놈의 눈과 눈 사이를 있는 힘껏 들이받았다.
휘이익! 콰자자작! 털-써억!
덩치가 큰 만큼 자빠지는 반동 역시 컸다.
그렇게 쓰러진 놈의 오른쪽 목덜미에서 물을 부어놓은 것처럼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 널따랗게 번지고 있었다.
천중명은 다시 천상기에게 움직였다.
그가 입은 하얀 와이셔츠에 구둣발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꽈악!
천중명은 놈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쿠웅!
그리고는 왼손으로 목줄을 움켜쥐고서 사무실의 유리에 세차게 밀었다.
“컥! 커억!”
천상기는 천중명의 손목을 붙잡은 채 버둥거렸다.
버둥대던 그의 눈이 용서를 구하는 듯 천중명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퍽! 퍼억! 퍽! 퍽! 퍽!
천중명은 그의 옆구리와 목덜미에 사정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끄으! 으으! 끄으윽!”
휘익! 철퍼덕!
신음을 토해내는 천상기를 책상 안쪽의 구석으로 던졌다.
이 새끼들은 어떻게 자빠지기만 하면 저토록 비련의 주인공 같은 자세를 만드는 건지, 핏줄이 그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천중명은 천상기의 앞으로 움직여 섰다.
“법이 있으니까 죽이지는 않는데 대신 이건 잘 봐둬.”
말을 마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꺼내 천상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런 뒤에 객실로 들어서는 천상기와 강승애의 사진을 검지로 돌려가며 보여주었다.
“눈물 닦고 똑바로 봐!”
팔뚝으로 눈물을 닦은 천상기가 마지못해 휴대전화기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후계자 싸움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노리지는 말자. 알았어?”
천상기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상태에서 아버지가 더 위태로워지거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이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어?”
이렇게 상황이 끝나는 게 반갑다는 것처럼 천상기가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똑바로 기억해. 아버지가 잘못되면 그날로 너도 뒈져.”
천상기가 힘들게 고개를 다시 끄덕일 때였다.
뒤편에서 몸을 추스른 덩치들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좀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어디가 부러지냐?”
천중명은 쪼그려 앉았던 자세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거든. 상황이 바뀌면 이상하게 약속했던 것과 대답했던 걸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어.”
무슨 소린가 하면서도 천상기는 천중명의 뒤를 힐끔 보았다.
덩치들이 얼른 일어나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그의 눈에 빠르게 스쳤다.
피식.
이렇다니까.
천중명은 오른발을 들었다.
휘익! 콰아악!
그리고는 체중을 완전히 실어서 바닥에 늘어진 천상기의 왼쪽 무릎 안쪽을 세차게 짓밟았다.
드드득!
“끄아아아아-! 아아악! 아아아악!”
“이제 오래 기억될 거다. 아버지를 또 건드리면 두 무릎이 날아가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건데, 그건 아버지의 증세에 따라 달라질 거니까 알아서 해.”
“끄으! 끄으응! 끄으으으-!”
천중명이 몸을 돌리자 소파를 붙들고 버티던 깡패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길을 열었다.
천중명은 가장 먼저 대꾸하던 대가리를 향해 걸었다.
놈이 이를 꽉 깨물고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코와 주둥이가 깨져서 얼굴 아래쪽이 완전히 피범벅이었다.
에효. 이런 놈에게 말을 던져서 뭐하겠냐.
천중명은 느긋하게 천상기의 사무실을 나섰다.
달려들길 바랐다.
그 핑계로 아예 반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분을 더 풀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 일이 어디 바라는 대로만 되던가.
천중명이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도록 따라오는 놈은 없었다.
지하주차장에 내려선 천중명이 차에 시동을 걸었을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저, 선영이에요.
“말해.”
- 엄마와 제 신분에 관한 기사가 나올 거래요. 거기에 조금 전에 형사들이 오빠를 데려갔어요. 필로폰 투약 혐의래요.
덤덤한 척 애쓰고 있지만, 확실히 허선영은 겁먹은 음성이었다.
“집이야? 혼자 있어?”
- 네.
“내가 15분이면 도착할 테니까 간단하게 가방 챙겨서 나와. 며칠 갈아입을 옷 정도. 알았지?”
- 예.
고작 한마디 대답에 그녀의 반가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전화를 마친 천중명은 허선영이 사는 빌라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과거에 기억했던 1년과 똑같이 세상이 돌아가길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이어지고 있어서였다.
“후-.”
천중명은 신호에 걸린 차 안에서 어제, 오늘 벌어진 일들을 차례로 되새겨보았다.
호텔에서 찍힌 영상을 가지고 세무조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할 걸 그랬나?
강승애를 떠올린 천중명은 자연스레 고개를 저었다.
회사 두 개, 아니 백화점까지 세 개를 얻기 위해 시동생과 몸도 섞는 여자가 고작 언론에 뿌려진 추문 따위에 뜻을 꺾기를 바라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막말로 둘이 세무조사를 막을 방법을 의논했다고 변명하면 몸을 섞었다고 주장하는 천중명만 오히려 모자란 놈 소리를 듣기 좋았다.
잠시라도 천호득을 더 노리지 않게 막았으니 이거로 됐다.
이후는 유진교와 의논해가며 풀어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윤만석, 이 인간은 어디에 가 있는 거지?
더는 생각을 잇기가 어려웠다.
빌라를 향해 핸들을 꺾었을 때, 허벅지와 무릎을 가린 것처럼 보스턴백을 앞으로 든 허선영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에 티셔츠, 점퍼 차림이었다.
그녀 앞에 차를 세우자 조수석을 들여다보았던 허선영이 바로 차에 올랐다.
“가방 뒤에 둬. 벨트 매고.”
차가 출발하자 허선영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의원님은?”
“손 써볼 곳이 있다고 나가셨어요.”
“어머니께는 전화 드렸어?”
“예?”
천중명은 허선영이 놀라지 않도록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기사가 나가면 어머니께 기자들이 몰려들기 쉬울 거야. 그러니까 얼른 전화 드려서 내 빌라 주소 알려드리고 그리 오시라고 해. 차를 직접 운전하기 뭐하면 택시를 타셔도 좋고.”
허선영이 당황한 얼굴로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뭐해? 일단 피하시게 해야지.”
허선영이 마침내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택시를 타면 빌라 말고 삼성역쯤에서 내리시라고 말씀드려. 기자들이 파고들다가 우리 집에 있는 거 알면 여러모로 불편하잖아.”
답을 하려던 허선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보세요? 이모?” 하고 통화를 시작했다.
“이모.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얼마나 훈련을 했으면 이런 순간에도 엄마란 말보다 이모란 말이 먼저 나올까?
놀랐을 텐데도 허선영은 나름 침착하게 언론 노출과 천중명이 지시한 바를 차례대로 전했다.
“네. 그러세요. 차를 가지고 오시면 제가 주소를 찍어드릴게요. 지금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에요. 네. 네.”
통화가 대충 마무리되었구나 싶었을 때였다.
“엄마.”
허선영이 부르는 말에 천중명은 힐끔 그녀를 보았다.
“잘된 일인지 몰라요. 이렇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천천히요. 아셨죠?”
통화를 마친 허선영이 전화기를 허벅지 위에 내렸다.
“고마워요, 중명 씨.”
이런 인사에 딱히 할 만한 대꾸가 없어서 천중명은 잠자코 차를 몰았다.
“총수님이 병원에 계셔.”
이번엔 천중명의 차례였다.
천상기와 강승애의 밀애, 깡패 두들긴 이야기 쏙 빼고 천호득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병원에 있다는 말만 전했다.
“아무래도 내가 총수님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아.”
“네.”
이번 대답은 느낌이 이상했다.
후계자가 되기 위해 천호득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눈치였다.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면 많이 놀랄 거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은 이 정도가 좋았다.
“집에 내려주고 병원에 가 볼 테니까, 어머니 모시고 있어. 어쩌면 오늘 못 들어갈 수도 있어.”
천중명은 재킷 안쪽의 지갑에서 카드키를 꺼내 허선영에게 건네주었다.
“거실 안쪽에 방 세 개가 비어 있거든. 그중 아무 곳이나 편하게 쓰면 돼.”
“호텔에 있을까요?”
천중명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서운하다.”
“네?”
“나랑 있는 게 불편해서 그래? 그렇더라도 못 견딜 정도 아니면 그냥 함께 있자. 나도 선영 씨도 힘든 상황이잖아.”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네, 그럴게요. 중명 씨도 힘들면 내 뒤에 숨어요.”
망설이던 허선영이 입을 열었다.
“뒤에 숨으라고? 어디?”
천중명은 장난처럼 고개를 기울여 허선영의 등 뒤를 살폈다.
“이럴 때 장난칠 여유가 있어요?”
“우울한 얼굴 한다고 바뀌는 거 있으면 그렇게 하지 뭐.”
복잡한 감정을 담은 얼굴로 허선영이 미소 지은 뒤였다.
천중명은 빌라의 정문을 통과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서 쉬어. 어머니 오시면 모시고.”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내리기 싫은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허선영이 던진 질문이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힘든 모습을 보는 것이 싫어서라고 하나?
아니면 좋아한다고 고백하나?
천중명의 눈을 바라본 허선영이 예쁘게 웃었다.
“올라가 있을게요.”
천중명의 생각을 읽었을까?
그랬으면 싶었다.
허선영이 빌라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본 뒤에야 천중명은 차를 몰았다.
이제부터 천호득을 지키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지켜보면서 그에 맞는 대응책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역시 천중명의 생각을 방해하겠다는 것처럼 벨이 울렸다.
천봉서였다.
이 인간은 뭘 알고 전화하는 걸까?
천중명은 통화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