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045. 약점이 있습니까? (3)
코와 입을 감싼 호흡기, 주렁주렁 몸에 연결된 선들, 링거를 배경으로 천호득은 잠과 죽음 사이에 누워 있었다.
천중명은 천천히 천호득의 머리맡으로 움직였다.
“홍차를 드시다 쓰러지셨습니다. 급성심근경색에 따른 뇌졸중과 뇌경색이라고 들었습니다.”
천호득의 얼굴을 바라본 채 유진교가 전한 설명이었다.
“윤 실장님은요?”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일을 위해 나갔습니다.”
거기까지 대화가 이어졌을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곽대출이 안으로 들어섰다.
녀석이 유진교를 향해 꾸벅 인사할 때였다.
좋아하는 조카를 맞이하는 삼촌처럼 유진교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곽 부장. 당분간 전무님 지시에 따르고 필요하면 장만섭 수준의 동료들을 불러서라도 여기 병실을 지켜. 누가 뭐래도 병실을 절대 비우지 마.”
“예, 대표님.”
곽대출이 독한 눈빛으로 답을 했다.
“혹시 그룹 기획실, 비서실에서 지시하더라도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병실을 지켜. 정 안 되겠으면 무력을 써도 상관없다. 그 즉시 내게 연락만 해.”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천중명이 유진교를 바라보았다.
“형들에게는 연락하셨나요?”
“예.”
“얼마나 됐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누구 한 사람은 와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지주 회사 체제에서 누가 더 후계자에 유리한지를 따지느라 바쁠 겁니다.”
“그걸 따질 필요가 있어요? 이미….”
유진교가 더는 말하지 말라는 듯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병실에서 대화를 누군가 들을지 모른다고 염려하는 눈치였다.
“후.”
답답해서 한숨이 푹 나왔다.
천상기야 뒷구멍에서 일을 꾸몄으니 못 온다고 쳐도 멍청하니 당하게 생긴 천봉서까지 헛된 계산에 빠져 병원에 안 왔다고 생각하자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천중명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혹시 병원에 있는 것도 안심할 수 없는 건가?
그래서 도청을 조심하란 의미의 고갯짓을 했고, 곽대출을 그토록 반겼던 건가?
“전무님. 병원에 있어도 왕회장님이 위험할 수 있습니까?”
유진교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더는 말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기획실과 비서실 직원이 밖에 저렇게 있는데 이 병실 하나를 제대로 못 지킬 정도였습니까?”
대꾸는 없었다.
픽 웃은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서 천호득을 보았다.
이 정도로 외롭게 살았던 겁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주변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유 전무와 윤 실장, 달랑 두 명뿐인데 그중에 유 전무를 붙여줄 정도로 내가 좋았던 거네요?
툴툴거리더라도 사심 없이 대하는 내 얼굴이 보고 싶어 탄천까지 그렇게 왔던 거구요?
지옥문을 연다는 말에 웃었던 것도 진심이었던 거죠?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니까요. 그렇죠?
천호득을 지켜보던 천중명은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곽 부장, 차 키 좀 줘.”
“예.”
“전무님.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곽 부장이 부른 사람이 있으면 다른 말 말고 병실을 지키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곽대출에게서 차 키를 받은 천중명은 곧바로 병실을 나섰다. 중간에 잠깐 곽대출의 저녁 식사가 걱정되었지만, 설마하니 밥을 굶기기야 하겠나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오자 1층에 있던 비서실 직원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무래도 이 엘리베이터는 천호득이 누워 있는 15층 전용인 모양이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천중명은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는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어디야?”
- 뭐?
“어디냐고?”
- 아니 그런데 이 못 배워먹은 새끼가 정말 위아래 없이….
확실히 천상기는 욕지거리와 함께 대가리를 들이미는 배짱 정도는 있는 놈이었다.
“천상기, 너 잘 들어. 지금 어디 있는지 말 안 하면 너 하고 강승애하고 호텔에서 만나는 영상 바로 언론에 터트린다.”
갑자기 꿀을 처먹는지 천상기는 말이 없었다.
“알았다. 어차피 콩가루 집안, 형수와 시동생의 화끈한 사랑부터 세상에 알리고 시작하자. 그다음에 세무조사도 받고! 한 놈씩! 차례대로! 얼마나 더럽게 살았는지 까 보자고!”
주차장에 도착한 천중명이 버럭 고함을 지른 다음이었다.
- 사무실로 와. 내 사무실에 있다.
축 처진 천상기의 답이 있었다.
“지금 갈 테니까 거기 있어.”
- 영상은 확실히 가진 거지? 언론에 뿌린 거 아니지?
“나는 개새끼야! 너처럼은 안 살아!”
전화를 마친 천중명은 곧장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
허세직은 끈질기게 휴대 전화기에 매달렸다.
“그래. 내가 누군가? 은혜 하나는 절대 안 잊는 허세직 아닌가? 허허허.”
발등에 불이 붙어서 무릎은 이미 새카맣게 탔고, 허벅지와 엉덩이를 태우는 수준인데도 허세직의 음성만큼은 여유롭게 들렸다.
“그렇다니까. 우리 아들놈을 이용해 나를 음해하려는 거지. 게다가 야비하게도 딸아이까지 들먹이는 거 아닌가. 그래! 그렇지!”
말을 마친 허세직이 상대의 말을 듣는 것처럼 서재의 구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래! 자네가 좀 도와줘.”
통화를 마친 허세직이 이마를 쓸며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그의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여보세요? 나야.”
- 의원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낮에 만났던 송우근 금감원 부원장보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내용을 바로 전했다.
- 아드님이 필로폰을 했다고 진술한 모양입니다. 이미 검찰과 경찰에서 첩보를 입수해서 형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뭣이…?”
천하의 허세직이 대꾸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있었다.
- 기자에게 필로폰을 투약했다고 진술한 녹취가 있습니다. 거기에 의원님이 약품을 구해준다는 진술도 있었구요. 이건 따님의 사건을 덮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허세직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핏기 없는 얼굴로 송우근의 말을 듣고 있었다.
- 방송국에도 올라간 모양이라 빼고 자시고 할 수준이 아닙니다. 따님 이야기를 빼달라는 부탁은 아예 관심밖이었구요.
“누구야? 누가 그런 거야?”
- 오늘의 아침, 서수미 기자입니다. 이미 데스크는 특종 분위기라 보도를 막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후우-.”
- 기운 잃지 마십시오.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송우근은 허세직의 대꾸도 듣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야박해진 인심은 이렇게나 빨리 변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허세직이 마지막 구명줄을 잡기 위해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방문객이 현관에 있습니다.]
거실의 인터폰이 상큼한 여자의 음성으로 방문객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런!”
허세직이 급하게 서재를 뛰어나갔을 때, 허선영이 인터폰 앞에 있었다.
“열지 마! 대꾸하지도 말고!”
버럭 고함을 지른 허세직이 부리나케 다가가 모니터를 확인한 직후였다.
[의원님. 안에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서울경찰청 마약수사반입니다. 지금 피하셔도 어차피 머리카락이나 소변검사로 결과는 다 나옵니다. 문을 열어주세요.]
말을 마친 형사 한 명이 신분증을 꺼내 모니터에 들이밀었는데, 그 뒤로도 다섯은 될 법한 형사들이 또 있었다.
[방문객이 현관에 있습니다.]
인터폰 속의 여자는 방문객이 무척이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젠장!”
인터폰에 손을 얹은 허세직이 거실로 무너져 내리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의원님. 시간을 끄시면 주변에서 모두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오시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모니터에서 걸걸한 형사의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왜! 왜 이런 일이 생기냐고! 왜!”
허세직의 절규가 거실을 메운 뒤에 멍하니 서 있는 허선영을 휩쓸었다.
**
통화를 마친 금감원 부원장보 송우근은 맞은편의 정안규를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셨으니 따로 전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쯤 형사들이 도착해 있을 겁니다.”
“정 의원님이 하신 일인데 오죽하겠습니까?”
“아효! 그래도 선배 의원이신데 저렇게 무너지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자식이 원수지요. 못할 말이지만, 차라리 그때 교통사고로 먼저 가버렸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정안규가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저녁 시간인데 식사라도 해야지요?”
“의원님이 시간이 되십니까?”
“부원장께서 짬을 주시는데 시간이 문제 됩니까?”
정안규는 송우근을 부원장이라 불렀다.
낯간지러운 대화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비슷하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융감독원 송우근 부원장보의 사무실 안이었다.
**
길이 제법 막혔는데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평소라면 10분에서 15분가량 걸릴 거리를 30분이 훨씬 넘어서야 도착한 천중명은 곧바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곳에 주차한 천중명은 곧장 엘리베이터가 있는 입구로 걸었다.
여기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었었다.
지금은 천호득의 생명을 보장받으러 달려온 거고.
때앵.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가 열리면서 우르르 사람들을 쏟아져 나왔다.
안으로 들어간 천중명은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눌렀다.
마음이 급한데 엘리베이터는 자주 멈췄다.
올라가는 걸 빤히 알면서 내려가려는 사람들이 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는 건지.
심지어 몇 명은 천중명의 심정을 모른 채 시시덕거리면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서기까지 했다.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렇게라도 편하게 내려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때앵.
마침내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놀랍게도 깡패가 분명한 남자들이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던 사람들이 놀라서 눈치를 살필 때 천중명은 복도로 내려섰다.
“천중명 대표님이십니까?”
천중명은 시선만 주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가선 놈이 불편한 얼굴로 안을 향해 걸었다.
전화로는 큰소리 뻥뻥 치더니 단둘이 만나는 것은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복도를 가로막은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사무실에도 다시 덩치들이 셋이나 더 있었다.
‘천상기, 이 야비한 새끼.’
단둘이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협박해서 영상을 뺏으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천중명은 말없이 안쪽의 방으로 움직였다.
똑똑똑.
덩치가 왼손으로 재킷의 아래를 붙들어가며 공손하게 노크했다.
“도착하셨습니다.”
사무실에 직원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폭력이 있을지 모를 상황을 준비했다는 의미였다.
문을 연 덩치가 한쪽으로 비켜서며 틈을 내주어서 천중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함께 들어온 놈 중 하나가 천상기 앞을 지켰고, 나머지 넷은 소파의 뒤와 문앞에 쭉 섰다.
“왔어? 앉아.”
천상기는 제법 독기를 품은 얼굴로 천중명을 맞았다.
다섯 놈의 깡패들을 제대로 믿는 눈치였다.
밖에 세 놈이 더 있다.
천중명은 천천히 몸을 돌려 뒤에 있던 깡패들을 보았다.
“너희는 나가 있어.”
“흐흐.”
대가리로 보이는 놈이 같잖다는 웃음으로 먼저 대꾸했다.
“보십쇼, 대표님. 우리는 천상기 회장님 말씀만 듣습니다. 회장님께서 버튼을 누르시는 대로 죽으라면 죽고, 죽이라면 또 죽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천중명은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웃기는? 괜히 쓸데없는 객기부리다 망신당하지 마시고 회장님 말씀대로 얼른 앉아서 많이 배우십시오.”
“알았으니까 나가.”
“허! 거 참!”
대가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비트는 순간이었다.
콱!
천중명은 놈의 울대를 뾰족한 중지로 찍었고,
콰작! 쩌걱!
왼손 팔꿈치로 콧등을, 이어서 오른쪽 팔꿈치로 턱을 올려쳤다.
대가리가 짚단처럼 뒤로 넘어갈 때였다.
퍽! 퍼버벅! 퍽퍽!
움찔하는 왼쪽 놈의 겨드랑이와 목덜미를 뾰족하게 세운 중지로 갈겼고, 연달아 울대를 짧게 세운 엄지로 찍었다.
“어?”
천중명은 놀란 오른쪽 놈의 턱을 팔꿈치로 내리 두 번이나 갈겼다.
콰다-당!
얻어맞은 놈이 벽에 붙여놓은 장식 테이블 위로 자빠진 다음이었다.
“뭐여?”
남은 깡패놈의 당황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휘익!
이어서 턱을 노리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홰액!
날아든 팔을 잡아챈 천중명은 놈의 겨드랑이를 뾰족한 엄지로 두 번 찍은 뒤에,
“끄으-!”
와락!
고통을 못 이겨 몸을 비트는 놈의 팔을 당겨 어깨에 걸었다.
시선을 돌린 곳에서 천상기는 완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였다.
이를 악문 천중명은 어깨에 걸어놓은 깡패의 팔꿈치 위로 양손을 맞잡았다.
휘익! 콰자작!
그리고는 힘껏 아래로 당겼다.
“끄아-아!”
처절한 비명이었다.
완전히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팔꿈치를 부여잡은 놈이 미친 것처럼 연속해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책상에 앉은 천상기를 향해 몸을 돌렸을 때, 그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비켜! 뒈지기 싫으면!”
“이, 씨발!”
책상 앞을 지키던 깡패 놈이 달려들었다.
휘익! 쩌거억!
그러나 천중명이 올려 찬 무릎에 사타구니를 맞고는 눈과 입을 쩍 벌린 채 굳었다.
깡패들 따위?
회칼도 없이 덤벼드는 이런 새끼들?
퍽! 퍼벅!
천중명은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주저앉는 놈의 목을 두 번 갈긴 뒤에,
콰자작!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세차게 갈겼다.
콰당! 콰다다당!
소파의 탁자로 쓰러진 놈이 죽은 듯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드르륵.
천상기는 회장님 의자를 뒤로 밀며 물러났고, 그런 놈을 향해 천중명이 천천히 다가갔다.
터억!
“이러지 마! 이건 아냐!”
뒤편 유리에 의자가 걸린 천상기가 공포에 질린 비명을 토해냈다.
“뭐가 아닌데?”
“이건 아냐! 내가 형이야!”
“배워먹지 못해서 위아래가 없다며?”
의자에 달라붙다시피 몸을 뒤로 뺀 천상기를 향해 천중명이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