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044. 약점이 있습니까? (2)
재벌이나 정치인이 날로 먹는 자리가 아니란 것만은 분명하게 배운 하루였다.
허세직과 함께 국회의사당에 들어선 천중명은 한 마디로 진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가식적인 웃음을 철조망처럼 두른 상태에서 속을 어디까지 보일지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천중명은 공부하는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할까?
늘 상대를 의심해야 하고, 누군가 성장하는 기미가 보이면 일단 짓눌러놓은 뒤에야 이게 아군인지 적군이었는지를 판단하는 세상에 사는 것이?
서로의 약점이나 빈틈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번들거리면서도, 말은 또 한 식구를 챙기지 않으면 누굴 챙기겠느니, 우리끼리 뭉쳐야 한다느니, 낯짝 두껍게 떠들어대는 모습은 존경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이곳에 곽대출이 있었다면 아마 둘 중 하나였지 싶었다.
단박에 주먹을 휘두른 뒤에, “이제 좀 조용하네.”라고 했거나, 물밖에 꺼낸 피라미처럼 펄떡거리다가 혈압이 터져서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잘 알았으니까 내가 알아보고 연락하마.”
국회의장인 허하수의 답이 대화의 종료를 알렸다.
금감원 부원장보 송우근이 독사라면, 허세직은 능구렁이 느낌이었는데, 허하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무기 수준이었다.
“우리 젊은 친구도 경영 열심히 해서 나라의 발전과 국민의 행복에 일조하길 바라네.”
몸을 일으킨 허하수가 손가락만 잡을 수 있도록 손을 내밀면서 재수 없는 악수의 끝판왕을 경험하게 되었다.
염병들 떨며 산다, 진짜.
손가락을 확 그냥.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정을 감추는 천중명의 옆에서 허세직이 씁쓸함을 감춘 악수를 나누고는 의장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었고,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설 때까지 허세직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지하주차장에서 허선영이 운전하는 검은색 대형승용차를 타고나서야 허세직은 입을 열었다.
“우선 천 대표를 내려주고 집으로 가자.”
“네.”
그게 전부였다.
승용차가 여의도를 빠져나왔다.
일찍 움직인 덕분에 아직 오후 5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올림픽대로에 들어설 때 무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허세직이 시선을 돌렸다.
“결과가 나오면 알려줄 테니 기다려 보게.”
“예.”
순순히 답을 한 천중명은 여의도의 빌딩숲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배운 것이 많은 하루였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직접 담판을 짓지 않는 일은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멍청하게 허세직의 옆에 앉아서 그가 상대하는 인물을 바라보는 짓은 여기까지다.
앞으로 이렇게 따라다니지 않으려면 허세직의 인맥과 그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했다.
묵직한 분위기를 싣고 달린 자동차가 천중명의 빌라에 도착했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감정을 숨긴 허세직과 인사를 나누었고,
“고생했어. 집에 들어가면 전화 부탁해.”
“네, 그럴게요.”
허선영과 짧은 인사도 마쳤다.
차가 출발했고, 천중명은 자동으로 열리는 정문과 빌라의 현관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섰다.
곽대출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황성규의 연락도 없었다.
“후!”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진 천중명은 물을 꺼내 홈바에 앉았다.
도대체 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두 개의 영상이 동시에 보였을까?
혹시 놓친 건 없나?
천중명은 물병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
천중명의 빌라에서 허세직의 집은 멀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함께 올라간 두 사람이 701호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딜 다녀오는 거야!”
또다시 눈이 붉게 달궈진 허광렬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허선영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들어가.”
“네.”
허세직이 조용하게 명령했고, 허선영은 그 길로 방을 향해 움직였다.
“아버지…?”
“내가 말했던 것으로 안다. 더는 저 아이를 귀찮게 하지 마라.”
놀라고 당황한 눈을 한 허광렬을 버려두고 허세직은 서재로 몸을 돌렸다.
“저년 편을 드는 겁니까?”
그러나 허광렬의 고함이 그의 뒤통수를 잡아끌었다.
걸음을 멈춘 허세직이 고개를 돌린 다음이었다.
“예! 그래서 내가 오늘 화끈한 걸 하나 해냈습니다! 저년이 더러운 출생이라는 걸 알렸다고요! 이제 저년은…!”
꽈악!
허세직이 허광렬의 멱살을 양손으로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우히히히! 저년이 몸을 팔고 다니면서 나는 한 번도 안 줬잖아요? 그건 공평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너…!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이히히! 저년의 출생을 말해줬다니까요! 대교건설 오지은 아시죠? 그년이 저 더러운 년 대신 나랑 놀아줬거든요! 그리고 친구도 불러줬어요!”
“야, 이 미친놈아!”
휘익! 철퍼덕!
허세직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허광렬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아프잖아요! 우히히히! 아픈데 짜릿하네요, 아버지? 대교건설 오지은이 나하고 해줬다니까요!”
“하아.”
허세직은 비틀대며 뒤로 물러나다가 소파의 등받이를 붙잡고 겨우 몸을 세웠다.
그가 멍하니 돌린 시선 앞에서 허선영이 서 있었다.
“저년은 이제 끝났어요! 끝났다고-오! 더러운 년! 나는 한 번도 안 주고! 이히히히히히! 우히히히히!”
허광렬은 뭐가 좋은지 바닥을 구르며 미친놈처럼 웃어댔다.
**
탄천의 주차장에 다녀온 뒤로 천호득은 부쩍 활기가 넘쳤다.
“후아! 바깥 공기가 이렇게 좋구만.”
그는 심지어 어지간해서는 열지 않는 2층 거실의 창을 열고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기까지 했다.
“큰 아드님을 끝내 저대로 지켜보실 겁니까?‘
“그 이야기를 뭐 하러 또 꺼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흐흐흐.”
거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보이는 사람처럼 천호득은 시선을 위로 든 채 웃었다.
“하늘을 좀 봐. 이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올 모양이야. 저 해가 넘어가는 것은 안타까운데 큰놈은….”
말끝을 흘린 천호득이 고개를 저었다.
“자꾸 말하지만, 이번에 손을 잡아주면 내가 죽을 때까지 놈의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지 않겠나. 그뿐인가? 뒤도 닦아주어야지.”
“막내 아드님이 막아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이 크게 번지면 총수님께 불꽃이 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둔 천호득이 이번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자네도 알지? 경험?”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흐허허허.”
윤만석이 자리를 비우고 있어서 창을 열어놓은 2층 거실에는 천호득과 유진교만 있었다.
“젊은 아이들의 특권이 뭔가? 하고 싶은 짓을 해볼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는 것 아니겠나. 이번 일을 통해 막내도 배우는 게 있겠지. 그 녀석이 얼마나 성장하는지 그걸 얼른 보고 싶어.”
이제야 천호득의 말뜻을 알아들은 유진교가 덤덤하게 웃었다.
“오늘은 하늘과 햇살이 유독 좋구만. 홍차의 향도 기가 막히고. 뭐해? 홍차는 너무 식으면 떫은맛이 강해져서 못써.”
유진교에게 홍차를 권한 천호득이 잔을 들었다.
달각.
만족한 얼굴로 잔을 내려놓은 천호득은 잔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유진교가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 직후였다.
“잘못되었군.”
“예?”
“뭔가 잘못되었어.”
“무슨 말씀이신지…?”
고개를 기울인 유진교가 테이블을 향해 숙어진 천호득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이었다.
콰당! 와장창!
상체가 앞으로 쏠린 천호득이 테이블과 함께 2층 거실에 널브러졌다.
“총수님!”
화들짝 달려든 유진교가 상체를 안아 들었을 때, 천호득은 이미 의식이 없었다.
“집사! 집사!”
유진교가 지른 고함이 계단을 타고 아래로 달려간 뒤에 후다닥 메이드 두 명이 뛰어 올라왔다.
“밖에 직원들을 불러! 얼른!”
놀란 표정의 메이드 한 명이 계단 아래로 바삐 움직였고, 다른 한 명은 천호득에게 달려들었다.
“물러나!”
타악!
그러나 그녀의 손을 유진교가 거칠게 뿌리쳤다.
“저는 그저….”
“물러나라고!”
이렇게 무서운 표정의 유진교는 처음이었다.
메이드가 쭈뼛대며 뒤로 물러날 때 유진교는 전화를 꺼내 들고 있었다.
**
섬뜩한 느낌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홈바에서 울린 휴대 전화기의 진동과 함께 액정에 유진교의 이름이 떠올랐는데, 천중명은 저주가 온몸을 뒤덮는 것처럼 불길한 감정에 휩싸였다.
생각할 것도 없이 천중명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대표님! 총수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지금 지경병원으로 출발할 테니 그쪽으로 와주십시오!
유진교는 정말이지 다급한 음성이었다.
- 혹시 곽 부장이 있으면 함께 오십시오! 끊습니다!
한 마디를 더 전하고는 통화가 끊겼다.
천호득이 쓰러졌다는 내용에 곽대출과 함께 오라는 당부가 전부였다. 무언가에 당했는데 믿을 만한 사람이 곁을 지켜주었으면 한다는 의미였다.
벌떡 일어난 천중명은 재킷을 집으며 오른손 엄지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대표님. 나 지금 바로 빌라 앞인데….
“대출아! 천호득 회장이 당했다! 지금 지경 병원으로 갈 거니까 주차장에서 봐! 차 준비해!”
멈칫했다.
- 오케이!
그리고는 곧바로 답이 있었다.
통화가 끝날 때 천중명은 이미 엘리베이터 앞을 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도깨비 출신이라 곽대출이 상황을 받아들인 것이 다행이었다.
계단을 통하는 비상구를 연 천중명은 날다시피 휙휙 몸을 던졌다.
훌쩍훌쩍 뛰어넘는 계단 사이로 천호득이 처음 보여주었던 따듯한 시선과 탄천에서 건넸던 넉넉한 음성이 떠올랐다.
휘이익!
몸을 날린 천중명이 난간을 붙들어서 방향을 바꾼 뒤에 다시 아래를 향해 뛰었다.
거친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계단의 위와 아래로 달려가고 있었다.
1층에 도착했다.
콰아앙!
비상계단의 문을 들이받다시피 연 천중명은 그대로 계단을 뛰쳐나가 주차장으로 달렸다.
손에 잡힌 재킷을 펄럭이며 건물의 현관을 나섰을 때,
끼이익!
곽대출이 입구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천중명이 조수석에 타기 무섭게 천천히 열리는 정문 틈을 아슬아슬 파고들었다.
끼이익! 빵! 빠아앙!
도로에 처박히듯 뛰어든 바람에 욕 꽤 먹었다.
“어떻게 된 거야?”
“유 전무가 전화했다. 왕회장이 쓰러졌다는 말하고, 너랑 함께 와달라는 부탁을 하고 바로 끊었어. 지경 병원!”
곽대출이 혹시 하는 시선으로 천중명을 빠르게 살폈다.
“유 전무를 만나보면 알겠지. 너 하고 함께 와주었으면 하는 걸 보면 우리가 짐작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윤 실장은?”
“못 들었어.”
곽대출이 급하게 모는 차 안에서 천중명은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흔들리는 감정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내일 세무조사가 있는데 굳이 오늘 이럴 필요가 있나?
윤 실장은 어디에 있는 거지?
유진교 전무는 왜 윤 실장이 있는데도 곽대출을 찾았을까?
달리는 차 안에서 하나둘 의문이 피어났는데 당장 천중명과 곽대출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병원의 입구에서 주차장까지 차가 제법 밀렸다.
“대출아. 먼저 올라갈 테니까 차 세우고 와.”
“알았어.”
차에서 내린 천중명은 그 길로 병원을 향해 뛰었다.
현관을 들어선 직후였다.
“대표님!”
정장 차림의 남자 둘이 빠르게 다가왔다.
“비서실에서 나왔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 뒤로 곽대출 부장이라고 들어올 거야. 바로 올려 보내 줘.”
“알겠습니다.”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말투에 신경 쓸 틈도 없었고, 상황이 급해서 성격이 툭 튀어나온 것도 있었다.
두 명 중 한 명이 복도 안쪽의 엘리베이터 앞으로 천중명을 안내했다.
“15층입니다.”
비서실 직원의 임무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15’라는 숫자를 누른 천중명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천상기, 강승애, 이 개만도 못한 것들이…!
아직 확실치는 않았다.
그러나 돌아가는 꼴이 돈을 위해 천호득을 노린 상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띠잉.
[15층입니다.]
반쯤 열린 문을 헤쳐 나가듯이 천중명은 복도로 나섰다.
“이쪽입니다.”
또다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천중명을 맞았다.
복도를 빠르게 걸었고,
드르륵.
왼편에 있는 병실의 문을 열었다.
거대한 침대에 천호득이 누워 있었다.
“오셨습니까?”
천중명에게 인사한 유진교가 곧바로 천호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