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43화 (43/315)

# 43

043. 약점이 있습니까? (1)

금융감독원의 입구에 차를 세운 것과 동시에 경비가 다가와 뒷문을 열어주었다.

이미 경험이 있는 모양인지 천중명이 내리기를 기다렸던 허선영은 차를 현관 앞쪽의 빈자리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허세직은 곧장 복도 왼쪽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원장보라고 들었다.

분명 그랬는데 문 위쪽에 달린 명판에는 ‘부원장실’로 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테이블처럼 기다란 형태의 책상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의 여직원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세직을 익히 아는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임자로 보이는 여직원이 아는 체를 덧붙인 인사를 먼저 건네 왔다.

“안에 계신가?”

“네, 의원님. 함께 오신 분 명함을 부탁드립니다.”

“음. 오늘은 그냥 내 동반자로 처리해서 기재해주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멈칫했던 여직원이 고개를 숙인 뒤에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지경화장품이나 냉동창고, 지경디자인보다 월등히 권위적인 분위기였고, 평창동의 자택보다는 좀 더 편안한 느낌이었다.

네 명의 여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손을 모으고 지켜보는 앞이었다.

“의원님?”

부원장 방을 나선 여직원이 허세직을 불렀다.

고작 들어가는 것을 보려고 저렇게 쭉 서 있게 하다니.

“들어가세.”

생각을 감춘 천중명은 허세직을 따라 부원장보의 방으로 들어섰다.

꽤 넓은 방이었다.

책상과 책장, 이런저런 장식품과 기념패들이 죽 늘어선 방에서 하회탈처럼 눈이 처진 남자가 다가왔다.

“먼 걸음 하셨습니다.”

“우리 부원장보만큼이야 하겠나. 인사하지? 여기는 내 사위 될 천중명 대표.”

시선을 힐끔 던졌던 부원장보가 몸을 돌려 책상에서 명함을 들고 다가왔다.

“송우근이오.”

“천중명입니다. 명함이 아직 없어서 다음에 다시 찾아뵙고 그때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송우근이 손을 펴서 내밀고는 전혀 맞잡지 않는 바람에 마치 죽은 사람의 손을 잡은 것처럼 불쾌했으며, 악수를 구걸한 것처럼 자존심이 상했다.

“앉으시죠.”

더 힘을 가졌다고 느껴지면 악수조차 은혜를 베풀 듯 손을 내미는 세상도 있었나 보다.

같잖다는 생각을 삼킨 천중명이 허세직의 옆에 앉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여직원이 오미자차를 가져다주고 나갔다.

“드셔 보십시오. 제법 맛이 있습니다.”

송우근의 권유에 셋이서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다 바쁜 사람들이니 본론만 말하기로 하지. 내일 오후 3시에 지경그룹의 회사 두 곳이 특별 세무조사를 받는 모양이야. 공교롭게 두 곳 모두 장자가 운영하는 곳이고.”

파리 삼킨 개구리처럼 송우근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런 사람은 금감원보다 포커판에서 훨씬 더 성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천중명이 떠올릴 때였다.

“자넬 만나고 나서 국회의장을 만나볼 생각인데 혹여 방법이 좀 없을까?”

번득.

송우근이 날카롭게 천중명을 살폈다.

이 자리에서 속을 꺼내도 되겠냐는 질문처럼 보였다.

“괜찮아. 우리 식구가 될 사람이잖나. 막말로 결혼이 깨지더라도 이 친구가 지경그룹을 물려받으면 어차피 서로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거지.”

확실히 개구리는 구렁이 앞에서 눌리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모양이었다. 허세직의 말 한마디에 송우근의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강종환 이사장이 뒤에 있을 겁니다.”

“그렇지. 나도 그 양반을 묶는 게 가장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하필이면 국회 교문위까지 저쪽에서 쥐고 있어서 당장 힘을 쓰기가 곤란해. 그렇다고 교육부에 우리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허세직의 대꾸가 끝난 직후였다.

“의원님. 강승애 이사장이 확실히 등을 돌린 겁니까?”

송우근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뒤에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봐야지 않겠나?”

답은 허세직이 꺼냈다.

“강승애의 동생이 조세원 청장의 사위 아닌가? 이참에 탄탄한 회사 두 개를 가져가고 헤어지겠다는 뜻이겠지.”

“그렇군요.”

세상사를 보는 시선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뉴스에서 이런 보도를 보았다면 대개는 세무조사가 있었고, 추징된 세액을 남편 대신 처가에서 냈다는 소식 정도로 이해했을 거였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겠습니까? 의원님이 나서신 걸 알면 저쪽도 뒤를 노릴 텐데요.”

“최근에 정안규가 대놓고 세를 불리고 있잖은가. 초선 의원들과의 모임도 잦고. 이럴 때 나를 만만하게 보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 보여줘야지. 그래야 쳐들던 고개를 다시 숙이지.”

허세직의 답이 무엇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된 양, 송우근의 눈가에 사명감이 피어올랐다.

‘정안규?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허세직과 송우근의 대화를 지켜보며 동안, 천중명은 알지 못했던 세상을 견학하는 학생이 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안규란 인물이 세력을 넓히는 만큼 입지가 좁아진 허세직이 이번 기회에 힘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야 송우근처럼 줄을 선 이들이 다시 허세직의 손아귀로 들어올 테니 말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고 있으면 골목에 모인 아이들이 편을 가른 뒤에 누가 많이 더 센가, 그래서 누가 더 가질 수 있나를 겨루는 것처럼도 보였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만 빼면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딱 그 모습이었다.

“우선 의장님을 만나보십시오. 제 쪽에서 방법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고생 부탁해.”

“예.”

만남은 터무니없이 짧게 끝났다.

몸을 일으킨 허세직이 손을 내밀자 송우근이 조심스럽게 오른손으로 맞잡았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번엔 허세직이 전혀 힘을 주지 않은 채 손바닥을 길게 펴고 있어서 그랬다.

이게 4선 의원에 차기 총리 유력자인 인간과 금감원의 부원장보가 할 짓인지 천중명은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몸을 돌린 송우근이 천중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더럽다. 이런 인사는.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아서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의 손처럼 느껴지는 악수였다.

이상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천중명의 집안에 대해 알고 있었고, 앞으로 허세직의 사위가 된다고까지 했는데 어째서 이따위 악수를 계속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었다.

천중명이 시선을 들었을 때, 송우근은 하회탈 같은 눈을 한 채 배웅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여간 지랄들은.

천중명은 허세직과 함께 송우근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강승애의 부친인 강종환은 그 시간에 강남의 조용한 일식집으로 들어섰다.

단순하게 그려진 물고기 그림을 간판으로 사용하는 이 집은 법조계와 사업가들에게 꽤 유명했고, 정치인들도 흔히 드나들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별실로 통하는 통로가 따로 있어서 일반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와 밥 한 끼 먹고 싶어 그렇지.”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강종환의 맞은편에 앉은 정안규가 공손하게 답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똑똑똑.

나직한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여직원이 무릎걸음으로 들어왔다.

“도미가 좋아서 준비했습니다.”

살아있는 도미가 뱃살을 예쁘게 옆으로 늘어트린 채 접시에 담겨 들어왔다. 접시를 올려놓은 여직원은 바닥에 양손을 짚어 인사한 뒤에 무릎으로 물러나 방을 나갔다.

“이사장님. 제가 먼저 올리겠습니다.”

자기로 된 술병을 든 정안규가 강종환의 잔을 채워주었다.

“자네도 받아.”

“감사합니다.”

강종환이 정안규의 잔에도 술을 채워준 다음이었다.

“사실은 내가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술병을 내려놓은 강종환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 사위는 자네도 알지?”

“천봉서 회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부끄러워서 어디에 대고 말하기조차 곤란한데 그 사람이 워낙 밖으로 도는 데다 내실이 없어요.”

정안규는 웃음기를 쏙 뺀 얼굴로 강종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번에 사위가 대표를 맡고 있는 회사 두 곳이 특별 감사를 받는 모양이야. 조세원 청장이 또 사돈 아닌가. 그래서 손을 좀 써보려고 했는데 그쪽은 워낙 청렴한 편이라 당최 방법이 없어요.”

말을 쏟아놓은 강종환이 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흠. 이거 참.”

“괜찮습니다. 편안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세무조사를 막으라는 말씀이신가요?”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내가 그럼 속을 보이지. 이번에 추징될 세액이 대략 2천억 정도인데 천호득 회장은 나서기가 어려운 모양일세.”

“천호득 회장에게 2천억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다만, 상속과 관련해서 조사를 받을 처지라 함부로 돈을 내서 아들을 돕기 어려운 게지.”

고개를 끄덕이려던 정안규가 퍼뜩 떠오른 의문을 담은 눈으로 강종환을 바라보았다.

“뭔가?”

“지경그룹은 지주회사 체제를 갖춘 거로 알고 있습니다. 2천억에 대한 양도세만 물면 천호득 회장이 납부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추징 세금은 법인에 부과되는 거라 양도세를 부과하는 것도 무리한 일이구요.”

“지주회사에 주식을 모으는 과정에서 편법이 동원됐다고 보는 모양일세.”

“네에.”

내막이 있음을 눈치챈 정안규는 짧게 대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번에 추징되는 세금을 납부해 줄 생각이네. 대신 사위가 관리하던 두 개 회사를 인수해 올 생각이지.”

“이제야 말씀하시는 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에 제가 도울 부분이 있습니까?”

“허세직 의원 때문일세.”

한 발 빠지려던 정안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망나니로 소문난 천호득 회장의 막내가 이 일을 알아낸 모양이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망나니가 허 의원의 딸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여서 지금 허 의원과 그 망나니, 두 사람이 세무조사를 막겠답시고 돌아다니고 있나 보네.”

“흠.”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문 정안규를 강종환은 넉넉한 시선으로 기다려주었다.

“국세청장이 심지를 가지고 일을 진행하면 그걸 막을 사람은 VIP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허 의원은 염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아. 허세직 의원의 사촌이 누군지 알잖나.”

“국회의장이라도 국세청장이 지시한 세무조사를 막기는 어렵습니다.”

정안규는 확실히 단호한 태도였다.

“그렇지 않아요. 금감원의 송우근 부원장보와 국회의장이 나서면 내일 오전에 조세원 청장이 먼저 곤경에 빠질 수 있어.”

고개를 갸웃하는 정안규를 향해 강종환은 바로 입을 열었다.

“송우근의 사위가 특수부 부장 검사 아닌가? 내일 아침에라도 조세원 청장을 몰아세우면 오히려 이쪽이 곤경에 빠지지. 그러니 어쩌겠나. 검찰 출신인 자네에게 매달려야지.”

“조세원 청장에게 약점이 있습니까?”

“그게 우리 아들놈이 주식으로 돈을 만진 일이 있잖은가. 그때 엮인 게 좀 있지.”

어쩐지 정안규는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번에 자네도 세력을 일궈야지. 그러려면 초선 의원들 손도 좀 잡아줘야 할 거고. 좋아! 이런 거 저런 거 구차하게 떠들 것 없이 날 좀 도와줘.”

그런 정안규를 향해 강종환은 승부수를 던지듯 비장했다.

“나는 그동안 난봉꾼 사위 때문에 눈물로 산 내 딸의 보상을 받고, 자네는 이 기회에 허세직 의원을 누르고 당내 입지를 단단하게 다지는 걸세.”

접시 위에 처참하게 누운 도미가 입을 두어 번 뻐끔거린 다음이었다.

“어떡해서든 허세직 의원이 찌른 곳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겠군요.”

도미의 절규를 누르는 것처럼 정안규가 의견을 꺼내놓았다.

“그래 줄 수 있겠나?”

강종환이 다급하게 질문했고,

“허세직 의원이 믿고 있다는 금감원의 송우근 부원장과 만나보겠습니다.”

정안규가 뭔가 자신에 찬 답을 꺼냈다.

“이 사람이? 그 사람과 인연이 있었어? 어떻게? 전에 검찰에 있을 때 그 사위 되는 이와 안면이 있었나?”

“이쪽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다 알게 됩니다. 게다가 허세직 의원의 독선에 거리를 두려는 인물이 꽤 있습니다.”

“허허허! 내가 자네를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니까. 자네는 어쩐지 이렇게 의원으로만 머물 그릇이 아니었던 게야!”

“모두 이사장님의 도움과 가르침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깟 장학금이 무슨 도움이 되었다고 그래?”

환하게 표정이 밝아진 강종환이 잔을 내밀었고, 정안규가 잔을 들어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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