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042. 왜요? 왜 나예요? (2)
허선영의 커다란 눈을 보며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야비한 싸움에서 묻은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간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가야 돼. 할 일이 좀 있거든.”
무언가를 말하려던 허선영이 “네.”하고 답을 꺼냈다.
둘이서 계단을 향해 걷는 길이었다.
“아까 들었지?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고 있어. 자리 정해지면 출근할 거지?”
뭐가 우스웠는지 허선영이 픽 웃었다.
계단을 내려왔고, 홀 앞에 섰다.
누군지 모를 남자가 허세직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스피커를 통해 떠들고 있었다.
“갈게.”
“네.”
눈을 보면 안다.
좀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허선영의 심정과 떠나기 싫은 천중명의 바람을 말이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러나 휴대 전화기가 몸을 떨며 출발을 재촉했다.
황성규의 전화였다.
“이번엔 진짜 가야 돼.”
허선영을 향해 손을 들어준 천중명은 계단을 내려가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천중명입니다.”
-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삼성동 호텔에 강승애가 드나든 CCTV 화면을 확보했습니다. 천상기와 12층의 특실에서 두 시간가량을 함께 보내다가 5분 간격으로 호텔을 빠져나갔습니다.
계단을 내려선 천중명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우선 두 사람이 특실로 들어가는 장면만 내 휴대 전화기로 보내주세요. 그리고 조세원 국세청장의 약점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봐 주시고요.”
-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호텔의 CCTV 영상을 손에 넣었을까?
진심으로 황성규란 사람의 경력이 궁금했는데 멋지게 믿는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그걸 물어보기는 곤란한 일이었다.
천중명은 도로에 서 있는 택시를 타고서 빌라로 향했다.
천상기와 강승애의 약점을 손에 넣었지만, 이것만으로 세무조사를 멈추게 하기는 어려웠다.
함정에 빠진 천봉서에게 가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해본다고 한들, 그를 설득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릴뿐더러 그가 국세청장 조세원을 감당할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은 정보를 최대한 얻은 뒤에 허세직의 능력에 기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아뇨. 제가 깜박한 게 있어서요.”
천중명은 창밖을 보며 웃었다.
황성규에게 아직 송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서였다.
**
천중명과 헤어진 유진교는 곧장 평창동으로 향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천호득, 윤만석과 함께 있었다.
“우선 지켜보고 특별한 일이 생기면 다시 보고해.”
통화를 마친 유진교가 종료버튼을 누르고는 바로 시선을 들었다.
“막내 아드님이 허세직 의원의 모임에 나가 인사했답니다. 예비 사위라고 발표했고,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허 의원의 뜻에 따라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직원으로 전환한 것이라는 기사가 나온다는 보고입니다.”
천호득은 노인네 특유의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너구리같은 인간을 설득하다니. 흐햐햐햐햐.”
“허 의원의 능력으로 국세청장을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커흐음!”
큰기침을 한 천호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너구리가 확실히 승부를 걸었다고 봐야지. 공식 석상에서 막내를 사윗감으로 발표한 것으로 명분을 얻었어. 사돈 될 집안의 세무조사를 막아야 한다는 명분.”
“그것을 공식적으로 말하지는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대신 그의 모든 인맥이 나서겠지. 너구리가 총리가 되면 다들 후광을 기대할 수 있고, 만약 이번에 외면했는데 그가 총리가 되면 뒤가 찜찜해지지. 그러니 어쩌겠나? 그의 모든 인맥이 미친 듯이 달려들 수밖에.”
천호득의 설명을 들은 유진교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자네만큼이나 나도 기가 막힌 심정일세. 도대체 뭐로 너구리를 꼬드겼을까? 어지간한 미끼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인간인데?”
“저는 짐작조차 못 하겠습니다.”
“그렇지? 단순히 몇 푼 집어준다고 움직일 인간도 아니고. 딸을 위해 그런 일에 나설 인간은 더더욱 아닌데? 이거야 원. 내가 막내에게 보자고 할 수도 없고.”
혼잣말을 뱉어내던 천호득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유진교를 보았다.
“뭐가 또 궁금해서 그런 얼굴로 날 보나?”
“막내 아드님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셔서 그렇습니다.”
“아, 그거! 이제 제 몫을 하는 아이에게 자꾸 놈놈해서야 되겠나?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막내라고 부를 참이지.”
답을 한 천호득이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탐나지. 탐나는 아이야. 특히 그 눈빛이 마음에 들어.”
그러면서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혼잣말을 쏟아냈다.
**
빌라에 들어선 천중명은 가장 먼저 황성규가 알려준 계좌로 10억 원을 송금했다.
디지털 세상이다.
키보드 몇 번만 누르면 누가 어디로 얼마나 보냈는지 바로 확인되는 세상에서 황성규와 허세직은 모두 송금을 요구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봉지커피를 타서 홈바에 앉은 천중명은 거실의 창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가진 자들이 덜 가진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세상에서 천봉서를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달달한 봉지 커피는 해답 대신 위로를 전해주었다.
일단 가져온다.
뺏길 건설과 전자 회사를 찾아와서 그곳의 직원들에게 좀 더 정당한 보상과 편안한 삶을 제공한다.
그게 행복으로 느껴지는지 힘겨움일지는 가져오고 나면 분명하게 알게 될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천중명은 빙그레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허선영의 눈빛이 떠올라서였다.
분명 호의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
지이잉.
그때 천중명의 생각을 뚝 자르며 문자가 들어왔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 이후로 세 개의 문자가 더 들어왔는데 모두 천중명이 부탁했던 사진들이었다.
똑같았다. 어둠 속에서 보았던 모습과.
커다란 선글라스에 스카프를 쓴 강승애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사진, 다시 객실로 들어서는 천상기와 역시나 객실로 들어서는 강승애의 사진이 있었다.
마지막은 강승애가 객실에서 나오는 사진이었다.
사진마다 오른쪽 위에 시간이 찍혀 있어서 황성규의 보고대로 두 시간가량을 함께 있었던 것도 확인했다.
‘가만?’
사진을 보던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전에 어둠 속에서 보았던 장면 중 하나는 국세청장 조세원과 그 사위의 대화, 다른 하나는 천상기와 강승애의 추잡한 만남이었다.
어둠은 왜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장면을 보여주었을까?
그 두 가지 장면에 공통점이나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황성규는 조세원의 사위가 미국으로 갔는지에 대해 아직 보고하지 않았다.
호텔의 CCTV 기록을 빼내는 것보다는 출국을 확인하는 일이 훨씬 쉬울 텐데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한 천중명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
그리고는 길게 연기를 뿜었다.
지금은 황성규의 보고든, 허세직의 전화든, 기다려야 할 때였다.
빨리 배운다.
그래서 이런 일쯤 여유 있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오후로 넘어가면서 거실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좀 더 밝아진 느낌이었다.
천중명이 담배를 눌러 끌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휴대 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 나야. 지금 금융감독원으로 올 수 있겠나?
허세직이었다.
“삼성동에 있어서 도착하는 데까지 30분에서 40분쯤 걸립니다.”
- 자네 빌라에 있나?
“그렇습니다.”
- 내가 전화하면 바로 나오게. 15분쯤 예상하면 돼.
할 말을 마친 허세직이 전화를 바로 끊었다.
어쩌면 이리도 정나미 뚝뚝 떨어지는 말투를 쓰는 건지, 천호득과 마주 앉혀 놓으면 누가 더 정나미 떨어지는지 짐작도 안 가는 수준이었다.
이를 닦기 위해 일어선 천중명이 픽 웃었다.
그 둘을 앉혀 놓으면 가식적인 미소를 시작으로 다정함을 덕지덕지 이겨놓은 음성의 대결장이 될 것 같아서였다.
**
호텔을 나선 강승애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 종로로 향했다.
“무슨 일 있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학원이고, 학교고 예전 같지 않다.”
“그러게 이젠 좀 쉬시라니까요.”
그녀의 부친인 강종환이 씁쓸한 웃음을 그려냈다.
“그래? 준비한 일은?”
“망나니 아들이 설치기는 하는데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어쩌면 백화점까지 넘어올지도 몰라요.”
강종환은 어쩐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가까이서 보았으니 알겠다만, 천호득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을 것 같으면 계획을 뒤로 미뤄.”
“그건 맡겨두세요.”
강승애의 다부진 눈을 본 강종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뒤를 닦아준 아이들이 한창 힘을 쓸 때라 무리하긴 했다만, 지금 있는 재단의 이사장 자리만 쥐고 있어도 사는 데 지장 없다.”
“언제까지 설치는 학부모들 앞에서 고개 숙이며 살 수는 없잖아요? 거기에 없는 것들까지 평등이니 권리니 주장하며 달려드는데요. 정부에서 지원금을 핑계로 감사에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흥! 그게 어디 쉽게 된다던? 막말로 교육부에 내 돈 안 처먹은 인간이 어디 있고, 국회의원 친인척 중 사학재단 하나 안 가진 인간들이 어디 있다고.”
“세상이 바뀌고 있어요.”
강승애의 말이 못마땅한 것처럼 강종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 건설사와 전자, 백화점이 넘어오면 학원들은 정리하고 학교 이사장 하시면서 편안하게 지내세요. 해외여행도 다니시고요.”
“안 가본 데가 있어야지.”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강종환은 기분이 풀린 모양이었다.
“네가 아들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을 꺼내 드는 모양새가 그랬다.
“요즘 세상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요?”
“그렇지! 너에 비하면 어설픈 남자들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냐?”
강종환이 대견한 듯 강승애를 바라보았다.
대화가 꽤 됐는데도 아버지고 딸이고, 아직 사위이자 남편인 천봉서의 안부 따위 꺼내지도 않았다.
“하기로 했다면 네 스타일대로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네. 그래서 백화점이 넘어오는 거예요.”
강종환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전화를 받은 천중명이 아래로 내려갔을 때 놀랍게도 운전석에 허선영이 있었다.
두껍게 선팅이 된 차의 운전석 뒷자리에 천중명이 오르자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우선 금감원의 부원장보를 만날 예정이다.”
인사 따위 주고받을 틈도 없었다.
“다 우리 사람이야. 그를 만나고 난 뒤에 바로 국회의장을 만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사위로 소개할 테니까 나중에 따로 한 번씩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예.”
왜 허선영이 직접 운전하는지 짐작이 가고 남는 대화였다.
“국회의장이 나서면 조세원이 뜨끔할 거야. 그다음은 방송국에 들어가 사장을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국회, 금감원, 방송국을 통해 압박이 들어가면….”
창밖을 향해 눈을 부라렸던 허세직이 시선을 가져왔다.
“어떻게든 내일 예정이라는 특별 감사를 미룰 수밖에 없어. 그들 전체를 무시했다가는 조세원도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까.”
“감사합니다.”
“아직 일러. 이런 싸움은 시작하는 순간 둘 중 하나밖에 없거든. 막아내서 내가 지닌 세력을 과시하느냐, 아니면 겨우 하루 이틀 뒤로 미룬 뒤에 결국 당하느냐.”
허세직은 뒷좌석의 중간에 놓인 팔걸이를 검지로 매만지고 있었다.
“강승애의 부친이 사학재단을 운영해서 그쪽에서 키운 아이들이 제법 있다. 특히 판검사들과 외교부, 교육부에 몰려 있으니까 그들을 단숨에 제압할 무기가 필요해.”
전쟁에 나서기 전에 작전을 짜는 지휘관처럼 허세직은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뭐가 있을까? 사학재단을 오래 운영한 교육자가 함부로 나서지 못할 일이? 그의 인생에 오물을 뒤집어씌울 만한 일이면 최고인데? 매춘이라든가, 간통, 이런 게 가장 좋은데 말이야.”
허세직의 혼잣말을 들으며 천중명은 퍼뜩 강승애와 천상기의 사진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직 내놓을 마음은 없었다.
상대가 천상기이기 때문이었다.
천상기와 추악한 관계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이건 세무조사를 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자초하는 꼴이어서 올바른 해결책도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살고 있었나?
더럽고 추악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