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41화 (41/315)

# 41

041. 왜요? 왜 나예요? (1)

욕망으로 연결된 배관의 밸브를 잠근 것처럼 대선이란 말에 불꽃이 튀었던 허세직의 눈이 곧바로 덤덤하게 바뀌었다.

“허허. 우리 천 대표가 젊어서 아직 세상을 모르는 모양이야. 나 같은 사람은 돈을 믿고 선거에 나서지 않아요.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확신이 있어야 고민할 일이지.”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천중명은 먼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런 저를 의원님만큼 잘 끌어주실 분이 더 있을까 싶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막아서 말인가?”

“제가 의원님을 찾아뵌 데에는 큰형님이 세무조사를 받는 것이 의원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이놈 봐라?

허세직이 눈을 갸름하게 뜨고 언짢은 기색을 떠올릴 때였다.

똑똑똑. 드르륵.

노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의원님.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당하게 둘러대. 5분 정도면 되겠어.”

“예.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바깥 상황을 알려준 보좌관이 문을 닫은 다음이었다.

“내게 누가 된다는 게 무슨 말인가?”

허세직이 아까의 말을 물고서 질문을 던졌다.

“알고 계신 대로 따님과 결혼할 생각입니다. 그 상황에서 사돈 되는 큰형님이 세무조사를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흐음.”

“그룹의 총수님이 나서면 해결될 겁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제가 해결하는 것이 더 보기 좋지 않겠습니까? 대선까지는 아직 여유도 제법 있습니다.”

마음을 다잡아서인지 대선이란 말에도 허세직의 눈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대선 전에 제가 기업을 제대로 일궈놓으면 굳이 특혜를 주었다는 오해 따위 없을 겁니다.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이번에 파견직과 계약직 직원들 전부를 정직원으로 돌렸습니다.”

밖에서 의원님이 곧 등장하실 거라는 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직후에 마음 급한 허세직이 고개를 힐끔 돌렸다.

능구렁이를 붙들 결정타가 필요했다.

시선이 돌아오고 있어서 계산할 틈조차 없었다.

“제가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의원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의원님이 지향하는 공정한 세상을 위해 기업인으로 할 수 있는 바를 다하겠다고 하겠습니다.”

허세직의 눈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직 그룹에서는 정직원 전환에 관한 공식 입장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아네만?”

“이번 일을 해결하면 제게 힘이 실립니다.”

허세직의 입술이 꿈틀한 다음이었다.

“오늘 기자들 앞에서 인사하고 갈 수 있겠나? 지금 그 이야기를 논의하느라 늦었다고 할 생각인데?”

“국세청 일은 어쩌시겠습니까?”

“허허.”

멋쩍은 듯한 웃음을 흘려낸 허세직이 문을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20억쯤 준비할 수 있나? 그리고 오후에 일정을 비워놓고?”

“현금으로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송금하면 되니까 그렇게 하지. 자, 그럼 일어나. 나가서 적당히 한 마디 해주고 돌아가게.”

허세직이 먼저 일어났고, 천중명이 그 뒤를 따랐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다급한 얼굴로 보좌관이 먼저 달려왔고, 그 뒤의 입구에서 허선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둘이 함께 입구를 향해 걸었다.

“기자들에게 명함을 나눠줘.”

“아직 정식 명함이 없습니다.”

“명함 정도는 준비했어야지. 현충기라는 기자가 있어요. 그 친구를 잘 관리해.”

“알겠습니다.”

둘이서 허선영 앞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의원님. 따님을 제 회사에 입사시킬 예정입니다. 형님 되시는 분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의원님께서 잘 보살펴주시리라 믿습니다.”

쨍!

유리잔을 깨서 던지는 듯한 시선이 허선영을 향해 달려갔다가 곧바로 천중명에게 돌아왔다.

“의원님의 따님이지만, 저와 평생을 함께 살 여자이기도 합니다.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때였다.

촤자작! 차작! 촤자작!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기자들이 연속해서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허허허.”

허세직은 정말이지 숨을 뱉듯 자연스럽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홀로 버려진 새끼고양이처럼 긴장한 허선영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대단한 사람을 만났어.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니까 너는 다른 생각 말고 우리 천 대표의 일에 적극 협조해. 들어가세.”

말을 하고 돌아서려던 허세직이 뭔가를 잊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고,

“예.”

그 시선에 놀란 허선영이 화들짝 답을 내놓았다.

차작. 촤자자작. 촤자작.

결혼식 피로연을 연상케 하는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이, 안쪽 자리를 향해 움직이는 허세직과 천중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좌관이 건네는 마이크를 받은 허세직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짝짝짝짝짝짝짝짝.

“늦었습니다. 이 허세직이 지금껏 국민과 유권자의 말씀 외에는 뜻을 굽혀본 적이 없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웃음과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테이블에서 뛰어나와 천중명에게 달려들었다.

“밖에서 보셨던 제 여식이 어느새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예비 사위가 이렇게 어려운 자리까지 인사를 왔지 뭡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의 이런 당당함은 참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훤칠하니 보기 좋습니다!”

누군가 소리를 질러주자,

“그렇습니까?”

허세직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천중명을 돌아보았다.

“여러분께 가장 먼저 소개해 드립니다. 여기 이 젊은 친구가 제 부족한 여식과 결혼을 약속한 천중명입니다.”

짝짝짝짝짝짝. 촤자작! 차작! 촤자자자작!

박수가 나오는 사이 허세직이 마이크를 내밀었다.

천중명은 마이크를 받은 뒤에 테이블을 향해 가볍게 고개 숙였다.

“안녕하세요? 천중명입니다. 저를 말씀드리면 잘 모르실 텐데 제 아버님을 말씀드리면 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아버님이 지경그룹 천호득 회장이십니다.”

“오-!”

테이블에서 커다란 탄성이 터져 나왔고,

촤자자자자자작!

플래시가 연속해서 빛을 뿜어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의원님을 존경해왔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기 서 있는 의원님의 따님과 알게 되었습니다.”

이놈 봐?

허세직이 그렇게 바라보았고, 허선영은 사람들 앞에서 천중명이 입술을 맞춘 것처럼 당황한 얼굴이었다.

“제가 최근에 기업 두 곳의 대표이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비정규직 직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돌린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허 의원님께 들었던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위한 저의 작은 노력이었습니다.”

짝짝짝짝짝짝.

박수가 나왔을 때, 허세직은 별것 아닌 것을 떠든다는 듯한 겸손함을 뒤집어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앞으로도 저는 의원님의 말씀을 명심해서 바른 기업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우리나라를 빛낼 의원님께 변치 않는 지지를 당부 드립니다.”

천중명이 마이크를 내리며 고개를 숙이자 박수가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허허허허.”

허세직이 한껏 웃는 낯으로 팔을 벌려서는 천중명의 어깨를 향해 뻗었다.

키 차이가 있었다.

천중명이 그를 위해 상체를 기울이며 팔을 뻗는 순간이었다.

“2시간 뒤에 연락할 테니 그때까지 돈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어.”

섬뜩할 정도로 표정과 다른 음성이 귀를 타고 들어왔다.

가벼운 포옹을 마치고 상체를 세웠을 때 허세직은 여전히 인자하고 다정한 얼굴이었다.

배울 거다, 이런 모습도.

그래서 천호득의 냉정함, 허세직의 이 처세술, 유진교의 바닥을 모를 경영 지식을 모두 익힌 경영자가 될 거다.

내 사람이 행복해지는 세상을 위해 진흙이든, 피든, 내 손에 묻힌다.

천중명의 세상에 함께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면 개싸움이든, 이런 야비한 싸움이든 외면하지 않겠다.

허세직과 테이블을 향해 다시 인사한 천중명이 홀을 빠져나온 직후였다.

“천중명 대표님!”

눈꼬리가 세모꼴로 솟은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다가왔다.

“오늘의 아침, 현충기 기자입니다.”

편안한 점퍼 차림의 현충기가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들개처럼 천중명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 저쪽으로 가시죠.”

천중명은 아까 허세직과 이야기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닫았다.

“의원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제가 아직 명함이 없어서 그런데 명함 있으신가요?”

“아, 예.”

현충기가 건넨 명함을 받은 다음이었다.

“정말 허 의원님 따님과 결혼하십니까?”

“그럼요.”

“솔직히 하나만 여쭙죠. 그동안 대교건설 오지은과 말이 많이 돌았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먹이를 향해 이빨을 들이대는 들개처럼 현충기가 불편한 질문을 디밀었다.

“현 기자님. 저도 하나 묻겠습니다. 사람이 바뀔 때도 있지 않습니까? 새사람이 되는 거요.”

현충기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현 기자님이 내가 개인적으로 만난 첫 기자님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내 편 할래요? 아니면 앞으로는 기자로 뵐까요?”

현충기가 야비하게 생겨 먹은 눈 끝을 늘리며 웃었다.

“아주 시원시원하시네! 그럼 기사 지원금과 광고 한 번씩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기사 지원금이요?”

“홍보용 기사를 쓰면 공식적으로 1천만 원가량 합니다. 그 외에 제 소개라고 하시고 광고 하나쯤 달아주시고요.”

허세직이 말한 기자다.

그 능구렁이가 따로 말했을 정도라면 언론 바닥에서는 제법 먹어주는 인간이란 의미도 될 거였다.

천중명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현충기가 꽉 잡았다.

“대표님 번호 좀 주고 가세요. 제가 대표님께 좋은 정보 하나 드릴 것 같은데요.”

그렇게 둘이서 전화번호를 교환하고서야 현충기는 몸을 돌렸다.

“그럼 대표님,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가 홀 안으로 들어가자 허선영이 복잡한 표정으로 천중명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잠깐 시간 돼?”

“예.”

“어디 조용한 곳 없을까?”

주변을 둘러본 허선영이 엘리베이터 옆의 문을 바라보았다.

“저쪽으로 가세요.”

천중명은 허선영이 가리키는 곳으로 걸었다.

비상계단의 입구였던 모양인지 안으로 계단이 있었다.

두 개 층을 올라간 허선영이 문을 열고 나서자 바람과 차가운 공기가 먼저 훅 달려들었다.

아래층과 위층의 사이에 만든 테라스인 모양이었다.

비가 그쳤지만, 아직 하늘은 우중충했다.

난간으로 걸어간 허선영이 천중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고 달아난 바람이 뒤에 오는 놈들에게 재미있다고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바람이 허선영의 머리칼을 계속 흔들었다.

“큰형님에게 일이 있어서 도움을 부탁드렸어.”

“기자들 앞에 나서서까지 해결해야 할 일이었어요?”

볼과 입술을 간지럽히던 머리칼을 허선영이 귀 뒤로 넘겼고, 그걸 또 짓궂은 바람이 다시 흩트려 놓았다.

천중명은 허선영의 볼과 입술, 그리고 그녀의 커다란 눈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이 빤한 얼굴이 왜 돌아서면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지?

오해하지 않는다면 휴대 전화기에 찍어두고 싶었다.

“미안해요.”

“뭐가?”

“오지은 만나는 거 인정한다면서 먼저 일어선 거요. 지금도 중명 씨 일을 따지고 들었구요.”

픽 웃은 천중명은 난간에 팔을 걸친 채 길게 펼쳐진 화려한 도시를 바라보았다.

“지은이는 그 뒤로 만난 적 없어.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만날 생각 없고.”

난간을 향해 선 천중명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도 허선영은 처음처럼 천중명을 향해 서 있었다.

“오늘 일 미리 말 못한 거 미안해. 하나씩 배워가는 과정이다 보니까 두서도 없고 정리가 안 돼서 그랬어. 아까 인사한 것도 갑자기 결정된 거고.”

말을 한 천중명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내가 행복해지는 일을 찾다가 여기까지 왔어.”

“결국,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한 거예요? 그게 중명 씨가 원하는 행복이었어요?”

실망한 음성으로 건너온 허선영의 질문이었다.

천중명은 도심을 향해 웃어준 뒤에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싸우는 내 뒤에서 당신이 행복했으면 싶었어. 당신이 행복해하는 게 내 행복인 거 같아서. 내가 지켜주는 사람이 행복해할 때 나도 행복한 거 같아서. 진흙탕 싸움이든, 야비한 싸움이든 끝까지 한번 해보려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진흙탕에서 야비한 싸움을 하는 걸 보면서 행복할 거라고요? 우리 아버지를 보세요. 내가 행복해 보여요?”

천중명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바람이 허선영의 입술 끝에 붙여놓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주었다.

커다란 허선영의 눈이 천중명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알고 싶은 눈치였다.

천중명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왜 이러는지를 말이다.

“내가 싸움을 마치고 돌아갈 곳이었으면 싶어. 다치고 상처받은 몸으로 가도 언제고 보듬어줄 곳. 그곳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어.”

왜요? 왜 나예요?

허선영의 눈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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