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040. 지켜보자고. 어떤 짓을 하는지 (3)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천중명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뭘 보여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어둠이 천중명이 쥘 수 있는 패 하나를 전해줄 거란 설렘과 기대가 숨처럼 빨려 들어와 가슴을 가득 메웠다.
천중명이 온몸을 옥죄여 오는 어둠에 버틸 때였다.
눈앞이 뿌옇게 밝아지면서 물에 젖은 안경을 쓰고 보는 것처럼 흐릿한 화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힘겹겠지만 3년만 고생해. 티켓이랑 비자는 다 해결했지?”
“예, 아버님이 말씀해 주신 곳에서 모두 해결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화면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서재인 듯한 공간의 테이블에서 공무원 특유의 단정한 머리를 한 중년 남자와 젊은 남자가 나누는 대화였다.
“사돈댁에서 회사를 인수한 뒤에 자네가 바로 관계하면 다른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려. 그러니 한 3년 미국에서 지내다가 잊힐 때쯤 들어와. 그런 뒤에 회사를 하나 맡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저 두 사람이?
아닌 게 아니라 30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확실히 강승애와 눈매며 입꼬리가 닮았다.
“필요한 생활비야 얼마든지 지원해주겠다만, 괜히 흥청망청 지내다가 교포 사이에서 말이 돌아도 일을 그르칠 수 있어. 알겠나?”
“예.”
“자네를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니까 내 뜻을 잘 알 거라고 믿는다. 자고로 남자가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집안이 편해. 그런 면에서 우리 애 좀 잘 아껴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피곤할 테니까 가서 쉬어.”
젊은 남자가 고개를 숙여 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집에 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젊은 남자가 방을 나섰다.
가정집에 마련한 서재였다.
테이블에서 일어난 중년 남자가 답답한 얼굴로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이거로는 부족하잖아.
더 보여줘.
저 양반이 국세청장 조세원인 모양인데 제대로 된 약점을 보여 달라고.
천중명의 간절한 바람 앞에서 조세원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번호를 찾아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납니다.”
권위와 자부심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눈을 한 조세원이 그와 비슷한 말투로 통화를 시작했다.
“준비는 어때요?”
천중명은 혹시 놓치는 것이 있을까 싶어 조세원의 통화에 더욱 집중했다.
“그렇지. 재벌가의 큰아들이 세금을 탈루했다는 것이 얼마나 부도덕한 일이냔 말이야. 만약 추징세액이 나왔을 때 이걸 또 그의 부친이 지원한다면 그것 역시 상속세를 추징해야지.”
그깟 상속세를 천호득이 두려워한다고?
“만약 천호득 회장이 세금을 대납할 의사를 밝히면 이번 기회에 특별조사를 그쪽에까지 확대해. 바른 세상, 재벌이라도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으면 벌을 받는 조세정의가 살아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야.”
조세정의가 살아있는 바른 세상이라니?
어둠에 몸을 의지한 천중명이 픽 웃을 때였다.
번득.
조세원의 눈이 꿈틀하더니 천중명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나를 봤다고? 어떻게?
잘 보이던 화면으로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그림이 뭉치기 시작했고, 그 위를 어둠이 커튼처럼 뒤덮었다.
깨어날 줄 알았다.
그런데 곧바로 앞이 밝아지더니 물에 젖은 안경을 쓰고 보는 듯한 화면이 또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강승애였다.
과장될 정도로 커다란 선글라스를 쓰고 영화의 주인공처럼 스카프를 둘러썼지만, 그녀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와 체형, 걸음걸이가 강승애인 것을 증명했다.
그녀에게서 티켓을 받은 직원이 빠르게 달려갔다가 독일제 승용차를 몰고 나타났다.
저기는 어디지?
호텔의 주차장인 듯싶은데 당장은 어디인지 알기 어려웠다.
화면은 이미 또렷해져 있었다.
어디야? 어디냐고?
천중명은 보이는 화면 곳곳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차를 가져왔던 직원이 움직인 곳의 책상 앞쪽에 ‘삼성동 호텔’이란 글씨가 분명하게 쓰여 있었다.
이건 또 언제야?
뭔가 말이라도 해야지.
부으으응.
그러나 차에 올라탄 강승애는 바로 출발했고, 다시 어둠의 커튼이 천중명의 앞을 가렸다.
“뭐야? 왜 그래?”
멀리서 떠드는 것처럼 곽대출의 음성이 먼저 들렸고, 느닷없이 독하게 생긴 얼굴이 불쑥 눈에 들어왔다.
“웃다 말고 갑자기 뭐가 생각났어?”
“또 봤다.”
“뭐? 날아가는 새…? 어? 대표님 혹시?”
“그래.”
천중명은 곽대출에게 좀 전에 보았던 장면을 설명해주었다.
“뭐야? 이게 무슨 힌트가 되는 거야?”
“잠시만.”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고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 말씀하십시오, 대표님.
“황 선생님. 강승애가 삼성동 호텔에서 발레 파킹을 이용했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게 언제인지, 누굴 만났는지를 알 수 있을까요?”
- 오늘 오전에 천상기가 삼성동 호텔에 들렀었습니다. 사우나를 이용한 기록만 확인했었는데 그렇다면 그 시간 위주로 발레 파킹 내역을 확인해보겠습니다.
보고를 듣는 순간이었다.
천중명은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시간대 위주로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국세청장 조세원의 사위가 미국으로 출국했을 겁니다. 그 내용도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 대표님. 다음부터는 알아봐 달라고 하시면 됩니다. 바로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급한 통화를 마쳤다.
“잠시만.”
천중명은 지경디자인의 고상득 상무에게 전화를 넣었다.
- 대표님. 고상득입니다. 이쪽은 비가 많이 옵니다만, 제가 납품에 전혀 차질 없도록 최선을 다해 관리하고 있습니다.
고상득은 거의 자동응답기 수준의 반응을 보였다.
“상무님. 오늘 지시해놓았으니까요. 내일 냉동창고에 연락해서 그쪽 임원들 사직서 전부 받아놓으세요.”
- 예에?
“거기 자재과인가에 김상용 부사장의 아들이 근무한다던데 그 친구 사표도 함께 받아두세요. 시간 되세요?”
- 저를 이렇게까지 신임해주시는데 제가 어떻게 시간을 못 내겠습니까? 비 때문에 길이 막히면 헤엄을 쳐서라도….
“예. 그럼 고생 부탁합니다.”
끝없이 이어질지 모를 통화를 얼른 마친 천중명은 시간을 확인했다.
“잠실에 나 내려주고 너는 먼저 돌아와. 사무실은 어떻게 됐어?”
“마음에 드는 게 세 개 정도는 있는데 하나는 두 개 층을 써야 원하는 평수가 나오고, 나머지 두 개는 한 층을 전부 쓰는 수준인데 좀 커. 한번 봐야지?”
“네가 알아서 결정해.”
재킷을 집어 든 천중명은 현관을 향해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왜? 뭐 놓고 온 거 있어?”
“그게 아니라 황 선생 같은 분을 찾아준 거 진짜 고맙다고. 아까 유 전무가 없었다면 차 안에서 인사했을 거다.”
말을 들은 곽대출이 먼저 넉넉하게 웃었다.
“지랄 마시고 얼른 출발하시지요, 대표님. 이러다가 늦습니다.”
그리고는 짐작했던, 딱 그 반응을 꺼내놓았다.
**
허선영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들어서는 사람들을 향해 웃는 낯을 그려냈다.
“어이구, 의원님!”
과장된 동작과 억양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오랜만입니다.”
양쪽 어깨에 아령을 하나씩 달아놓은 것처럼 목에 힘을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허세직을 거친 사람들이 또 당연하게 옆에 선 허선영의 앞으로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허선영을 한 번이라도 봤던 이들은 안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독 목청을 높이며 시간을 끌곤 했다.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간 다음이었다.
“좀 더 자연스럽게, 친근감이 느껴지게 웃어야지.”
마치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허세직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선양해운 회장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보좌관이 다가오는 사람의 신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늦었습니다.”
“늦기는요? 그래. 요즘 해운 경기가 안 좋은데 어떻게 지내십니까?”
“허허. 역시 허 의원님이십니다. 우리같이 어려운 이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해 주시거든요.”
두 사람의 인사를 지켜보며 허선영은 저 둘의 머리통을 세게 밀쳐서 이마를 찧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올라왔다.
“이분이 영애님이시군요?”
“부족한 여식인데 늘 이렇게 행사를 지켜주니 그게 고마울 뿐입니다. 허허허.”
대꾸를 마친 허세직이 눈빛을 번득이며 좀 더 다정하게 굴 것을 강요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허선영입니다.”
먹지도 않은 점심이 올라올 것 같은 속을 꾹 누른 채 허선영은 억지로 웃었다.
“이런! 허허허! 의원님이 내 이야기를 하셨다니 영광입니다! 앞으로 자주 뵙지요.”
“네.”
곱게 상체를 숙였던 허선영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마치 허공을 뚫고 나타난 것처럼 눈앞에 천중명이 있었다.
온다고 들었다. 이미 부친인 허세직에게 말도 전했었다.
그런데도 천중명을 보자 허선영은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반응하지 못했다.
“괜찮아?”
“예? 예.”
“인사 먼저 드리고.”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미소를 보여준 천중명이 허세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천중명입니다.”
“그래. 어서 오게.”
허세직이 찍어낸 듯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 와중에도 허선영은 분명 보았다.
부친인 허세직의 눈이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해할 수 있었다.
망나니라고 소문났던 천중명이 한눈에 보기에도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태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허선영은 오전에 잠깐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그때 느꼈던 카리스마 같은 위엄이 앞에 서 있는 천중명의 눈매와 몸짓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괜찮으시면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말인가?”
“예. 중요한 이야기인데 10분이면 됩니다.”
허세직은 안쪽을 들여다본 뒤에 곧바로 보좌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적당하게 둘러대.”
“알겠습니다, 의원님.”
“이쪽으로 오게.”
허세직은 보좌관들이 사용하기 위해 비워놓은 방으로 천중명을 안내했다.
“갔다 올게.”
천중명은 잊지 않고 허선영을 챙겨주었다.
저렇게 다정하게 인사해줄 줄 몰랐다.
그래서 허선영은 또다시 말을 잊은 사람처럼 대꾸조차 못 했다.
몸을 돌리기 직전에 보았던 옅은 미소는 또 어떻고.
천중명의 그 미소가 허선영의 가슴에 낙인처럼 분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드르륵.
문을 연 허세직이 먼저 들어갔고, 천중명이 뒤따라 들어가 문을 닫았다.
“제대로 인사 못 드렸는데 이렇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바쁜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게다가 우리는 남들의 시선을 조심해야지 않나? 그래 무슨 일로 급하게 보자고 했지?”
시간이 급한 모양인지 허세직은 천중명을 재촉했다.
“염치없는 청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기자들이 준비를 마치면 내가 연설을 해야 해요. 그리고 자네와 나 사이에 염치를 따질 게 뭐가 있어? 걱정하지 말고 시원하게 말을 해봐.”
꼿꼿한 자세로 앉은 허세직이 다시 권하고서야 천중명은 입을 열었다.
“큰형님이 건설사와 전자회사의 경영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일 오후 3시경에 국세청이 특별 세무조사를 예정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흐음.”
허세직이 묵직한 신음을 토해냈다.
“아시지만 형수님이 국세청장님과 사돈 관계입니다. 아무래도 사돈댁에서 회사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세무조사라고 해봐야 세금 추징과 고발 외에는 특별할 게 없잖나? 천 회장께서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실 텐데?”
“지주회사 체제를 갖췄기 때문에 그룹에서 함부로 지원하기 어렵습니다. 아버님이 세금을 대납할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상속세 때문이 아니라 여차하면 국세청이 그룹 전체와 왕회장님까지 특별 세무조사를 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을 잠시 끊은 천중명은 허세직을 똑바로 바라본 상태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는 그 두 회사를 제가 넘겨받기를 원하십니다.”
허세직의 고개가 보일 듯 말 듯 갸웃했다.
“조건은 큰형님이 고발되지 않는 것입니다.”
“검찰에 손을 써 달라는 뜻인가?”
“세무조사를 막아달라는 말씀입니다.”
“허허.”
워낙 당당하게 요구해서인지 허세직은 기가 막힌다는 웃음을 먼저 흘렸다.
“그 두 회사를 제가 가져오면 그룹 후계자로 한발 앞서게 됩니다. 큰형님은 이번 일로 뒤로 물러나게 될 테구요. 제가 그렇게 된다면 의원님의 선거를 돕겠습니다.”
“이 사람아. 나야 의원 배지를 걱정할 수준이….”
“대선에 나가셨으면 합니다. 필요한 조직을 꾸리십시오. 뒤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첨벙!
물 위를 튀어 오르는 잉어처럼 허세직의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욕망의 불꽃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