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039. 지켜보자고. 어떤 짓을 하는지 (2)
유진교가 옆에 있었다.
그를 믿고 통화할 것이냐, 아니면 통화 거절 메시지를 보낼 것이냐를 짧게 고민했던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천중명입니다.”
- 대표님. 상황이 심각합니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황성규가 다짜고짜 내용을 전했다.
특유의 넉넉한 음성이어서 그런지 심각하다는 데도 그리 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 시일이 없다고 하셔서 거꾸로 파고들었습니다. 강승애를 위해 일하는 국정원 출신 정보원들을 따라붙었고, 천상기를 위해 일하는 정보원들의 움직임을 파악해봤습니다.
어젯밤에 황성규가 했던 말 대로였다.
천중명과 곽대출을 제외하고는 보고할 때 직급이나 이름을 붙이지 않겠다던 대로 황성규의 보고는 빠르고 간결했다.
- 디데이는 내일입니다. 오후 3시에 국세청이 스케줄을 잡은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강승애 쪽의 조직이 방송사와 연락한 정황도 잡았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보고였다.
이 정도면 흥분할 수도 있었을 텐데 황성규는 여전히 덤덤한 음성으로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 특이 사항이 있습니다. 천상기 쪽 애들이 천호득을 따라붙었습니다.
천중명은 힐끔 유진교를 보았다.
아무리 차분하게 전해주었더라도 놀랄 내용은 또 그렇게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 내일 오후 3시까지는 이쪽에 집중하겠습니다.
“그렇게 부탁합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듬직한 느낌으로 운전하는 곽대출의 뒤통수와 어깨, 핸들에 얹어진 그의 손을 보았다.
정보를 누가 많이 가졌느냐가 승부의 관건인 세상에서 곽대출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엄청난 사람을 데려왔다.
내일 오후 3시?
오늘 중으로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외에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천상기가 천호득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승용차의 창으로 매달렸던 빗물이 속도를 이기지 못한 채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쯤 갔을 때였다.
- 윤만석입니다.
윤 실장의 답이 있었다.
“앞으로 사흘 정도 총수님 주변을 신경 써 주세요. 확실한 내용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곽대출이 룸미러로 천중명을 힐끔 살폈고, 유진교는 고개를 돌려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 무슨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걸 알려드리는 건 곤란할 거 같구요. 사흘 정도면 해결할 것 같으니까 그동안에 좀 더 집중하시라고 당부 드리는 겁니다.”
천중명이 말을 건넨 직후였다.
- 사흘이면 해결되겠어?
뜻밖에도 천호득의 음성이 바로 건너왔다.
바깥의 소리가 깔끔하게 차단되는 차 안이라 유진교는 확실히 천호득의 음성을 들은 표정이었다.
- 사흘이면 되겠냐고?
“예. 그 정도면 제가 해결할 것 같습니다.”
- 둘째 형이냐?
노인네가 확실히 무서운 구석이 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으하하하하.
목에 턱턱 걸리는 듯한 웃음이 있었다.
- 너를 믿어도 되겠어?
그리고는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이번 일은 믿으셔도 됩니다.”
- 알았다. 그럼 내가 사흘을 윤 실장과 지내볼 테니까 어디 제대로 해결해 봐.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면서 픽 웃음이 나왔다.
지켜주려는 천중명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상황이 그렇게 느껴져서였다.
통화가 끝났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비가 더 세차게 내리고 있어서 승용차의 좌우로 빗물이 커다랗게 튀고 있었다.
**
봄비치고는 알이 굵었다.
비에 젖은 올림픽 도로를 바라보던 허선영은 책상 오른쪽의 화장대로 옮겨가 앉았다.
보라색으로 변한 멍을 비비크림으로 감춰야 할 시간이었다.
오늘도 허세직은 점심 약속을 정해놓았다.
부친을 사랑하는 딸의 표정을 하고서 먹히지 않는 음식들을 미소와 함께 먹다가 들어오는 역할이었다.
30억 원을 건네면 이 집을 나갈 수 있으리라던 기대가 얼마나 순진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를 알았다.
그래서인지 허세직과 마주 앉았을 때, 모임에서 억지로 웃을 때면 허선영은 미친 여자처럼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조카의 십팔색….”
천중명이 알려준 이상한 욕을 떠올렸던 허선영이 픽 웃고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바보다, 진짜.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뭐든 듣겠다고 했으면서 고작 문자에 그렇게 들어오는 건 뭐니?
허선영은 느닷없이 사람이 바뀐 천중명을 떠올리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그런 모습이었으면 싶었다.
그럼 뭐해? 그날 이후로 연락이 없는데?
그때였다.
[오늘도 또, 또 못하는 그 말, 집 앞에 서서 준비했던 말, 꿈에서라도, 꿈에서라도 너의 눈을 보며 고백하고 싶은 소중한 말]
허선영의 휴대 전화기가 노래를 들려주었다.
급하게 전화기를 든 허선영의 눈에 ‘천중명’이라는 이름이 올라왔다.
“여보세요?”
- 통화 괜찮아?
사람이 어쩌면 말투까지 이렇게 신뢰가게 바뀌는 건지.
“무슨 일이에요?”
- 오늘 의원님을 잠깐 뵙고 싶은데 가능한 한 빨리. 어떻게 연락하는 게 좋을까?
그렇지.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겠지.
“저랑 함께 참석하는 점심 약속이 있어요. 잠실이요. 그리 오는 게 가장 빨라요. 그곳으로 올 거면 아버지에게 미리 연락해 놓을게요.”
- 그럼 그곳의 주소와 시간을 문자로 부탁해. 당신도 나온다는 거지?
“예.”
허선영이 답을 건넨 직후였다.
- 그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부드러운 음성에 전에 없던 카리스마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뭔가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실려 있었다.
전에는 돈의 힘에 기대 어깃장을 놓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사람이 컸구나 싶었다.
며칠 되지도 않았다.
이 사람도 허세직처럼 변하는 건가?
잠시 생각에 빠졌던 허선영은 화장대 앞으로 몸을 돌려 빠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
천상기나 강승애나 차갑고 냉정한 사람들이지만, 그 두 사람에게도 천호득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이 그랬다.
형제 둘을 제치는 과정에서는 피도 없는 인물 같았고, 그토록 예뻐하던 딸의 죽음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준비는요?”
“친정 쪽은 염려하지 말아요.”
천상기와 강승애는 삼성동의 호텔 특실에 있었다.
정장 차림의 천상기가 앞에 둔 커피를 마시는 동안, 투피스 차림에 브로치를 단 강승애는 투명한 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는 아직 몰라요?”
“윤 실장이 있어서 다가가기 어려웠습니다.”
“어떡할 생각이에요? 막내가 왕회장님께 우리 계획을 알렸다고 봐야 하잖아요?”
“지금은 물릴 수도 없습니다.”
강승애는 해결책을 바라는 눈으로 천상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총수님이 전면에 나서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일은 계획대로 진행하고 그 틈을 노릴 생각입니다.”
“틈을 노리다뇨?”
“형수님이 준비하셨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천상기의 말을 들은 강승애가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상황도 적당하지 않습니까? 장자가 탈세로 구속되자 그 충격에 심근경색이 발생해서 의식을 잃는 겁니다. 그동안 주식을 넘겨오면 세금도 적게 나옵니다.”
강승애는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형수님 쪽에서 도움 주시면 상속세라고 해야 50억 안에서 해결됩니다.”
“만약 왕회장님이 오늘이라도 움직이면요?”
“교통사고가 납니다.”
천하의 강승애도 천상기의 말에는 놀란 눈을 그려냈다.
“총수님을 모르십니까? 그 망나니 같은 놈을 탄천에서 만났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 이기는 놈이 내 편이다. 다만, 심정적으로는 망나니를 응원한다. 이런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겁니다.”
“그냥 있지는 않겠군요.”
“그렇지요. 일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형수님과 나를 응징할 겁니다. 기억하시죠?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요.”
강승애의 눈에 독기가 쨍하고 올라왔다.
딸이 죽었다는 말에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던 천호득은 그 뒤에 관련되었던 이들을 교통사고 따위로 모조리 죽여 없앴다.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에 쓰러지시면 되겠어요?”
“그렇습니다.”
“하아.”
답답한 속을 털어냈던 강승애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백화점까지는 내게 주세요.”
그리고는 천상기를 향해 대가를 요구했다.
“그 정도는 요구할 권리가 있지 않아요? 상속세 줄이는 것만 계산해도 최소 5천억은 넘을 텐데요.”
“그럼 심근경색과 상속세를 포함해서 백화점으로 끝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제가 세무조사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요.”
“그럼요.”
강승애가 분명하게 대꾸한 다음이었다.
천상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약속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이요?”
“어차피 갤러리에 계신 거로 되어 있고, 저야 호텔 사우나를 즐기는 거니까 눈에 띌 일도 없습니다.”
문을 힐끔 보았던 강승애가 의미심장하게 웃자 천상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빌라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전무님. 잠시 의논드릴 게 있는데 올라가시겠어요?”
주차장에서 내린 천중명은 유진교의 스케줄을 물었다.
휴대 전화기로 확인한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셋이서 빌라에 들어섰다.
곽대출이 커피를 준비했고, 천중명과 유진교는 소파에 자리했다.
“어제 탄천에서 총수님을 뵈었고 아까 통화를 들으셨으니 짐작하실 것 같은데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막아야 합니다.”
유진교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우선 허세직 의원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그 양반이 국세청장의 계획을 막을 능력이 있을까요?”
유진교가 묵직하게 숨을 토해내는 동안 곽대출이 커피 잔을 놓아주었다.
“이미 허 의원을 만나기로 하셨던 것 아닙니까?”
“예. 여기 문자에 나와 있는 한정식집에서 12시 30분에 보기로 했습니다.”
답을 하고 나서야 천중명은 유진교가 질문을 던졌던 의도를 깨달았다.
“허세직 의원이 국세청장을 만나게 해볼 생각입니다. 그에게 세무조사를 막을 힘이 없더라도 우리가 이미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알려주는 효과는 있을 테니까요.”
이거 봐?
유진교가 또다시 놀랐다는 의미의 시선을 던졌다.
“어느 정도까지 허 의원에게 푸시할지를 알고 싶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그에게 힘이 있다면 그만한 조건을 내세워야 하고, 반대로 힘이 없다면 만나주는 선에서 부탁해 보려고요.”
“힘은 있습니다. 그러나 세무조사를 하루 만에 막는 건 아무래도 어려울 겁니다.”
천중명의 질문에 유진교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국세청장이 거부하지 못할 청탁이라면 청와대를 거쳐야 할 정도의 수준입니다. 그런 일을 서두르면 반드시 말이 새나갑니다. 그것이 허 의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명분이 있다면 가능할까요?”
“허 의원도 그 부분을 가장 고민할 겁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내가 누구 부탁으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막아야 한다고 떠들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더라고 급하게 서두르기는 힘든 일입니다.”
천중명은 턱을 감싸듯 붙들고는 볼을 쓸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고, 다음으로 경험이 부족했다.
처음엔 행복을 얻는다는 생각에 시작했던 일이었다.
막말로 천봉서가 세무조사를 받다가 자살한다고 해도 천중명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대로 일이 진행되면 결국 다음 타깃은 당연하게 천중명이 된다.
차 안에서 허세직을 떠올린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허세직이 세무조사를 막을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천호득이라면 어떻게 처리했을까?
아는 사람도 많고, 이런 경험도 풍부한 그가 세무조사를 막을 생각이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청와대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거나, 그도 아니면 장관쯤을 타고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나쯤 힌트를 줄 법도 한데 유진교는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지켜보겠다던 천호득의 방침을 따르는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허 의원을 만나서 의논해본 뒤에 다른 방법을 찾든가 해야겠네요. 점심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곽 부장과 함께 드시는 건 어떠세요?”
“이미 점심 약속이 있으시니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유진교는 그렇게 몸을 일으킨 뒤에 빌라의 현관을 향해 걸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인사를 마친 유진교가 현관을 나섰다.
“대표님아. 유 전무님에게 뭔가 방법이 있는 것 같던데 왜 그냥 보내?”
“그냥. 저 양반은 매달린다고 해서 알려줄 것 같지 않았거든.”
“그건 그렇지.”
천중명이 소파에 앉자 곽대출이 아까 유진교가 앉았던 자리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몸을 늘어트렸다.
“아까 공장에서 우리 대표님 멋지더라. 형사 책임은 져야죠. 사표들 내세요!”
“미친놈. 내가 또 언제 그렇게 목을 당기고 자라처럼 말했다고 그래?”
그래도 곽대출 덕분에 웃는다.
킬킬거린 천중명이 커피 잔을 들어서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화아아악!
느닷없는 어둠이 천중명을 둘러싸고는 세상을 새카맣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