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38화 (38/315)

# 38

038. 지켜보자고. 어떤 짓을 하는지 (1)

아침부터 거실의 창에 매달린 물방울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눈을 떴을 때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빌라는 쾌적했다.

잠에서 깨어난 천중명을 곽대출은 주방에서 맞았다.

“뭐해? 오늘 내 차례라니까!”

“닥치고 물이나 드시지요, 대표님.”

김순례가 준비해 놓은 마른반찬과 김치가 냉장고에 가득해서 식사준비라고 해봐야 밥 하나 한 게 전부였다.

시간 끌 거 뭐 있겠나.

대략 10분 만에 아침 식사가 끝났다.

곽대출이 준비했으니 설거지는 천중명의 몫이었다.

“자! 커피올시다.”

설거지를 마친 천중명의 앞에 곽대출이 커피를 놓아주었다.

“담배는?”

“드려얍지요!”

“왜 이렇게 공손해?”

“내가 있잖아. 어제 대표님 모습에 감동했다는 거 아냐.”

“지랄.”

둘이서 킬킬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그나저나 정말 천봉서를 살려주려고?”

“늦었을지 몰라. 시간이 급하잖아.”

“아무튼, 가닥을 그쪽으로 잡은 거잖아?”

“그렇지.”

천중명은 간단하게 답을 하고는 커피를 마셨다.

“정보야 황 선생이 가져온다고 치고, 국세청장을 어떻게 할 방법이 있어? 어차피 총수가 안 도와준다고 하면 그쪽을 막을 방법이 없잖아?”

그렇지 않아도 고민되던 점을 곽대출이 분명하게 짚어주었다.

“생각해 둔 게 있기는 한데 한번 알아봐야지. 그건 그거고 지금 몇 시야?”

“아차차! 서두릅시다, 대표님.”

8시 정각에 나타날 유진교를 맞이하기 위해 천중명과 곽대출은 서둘러 샤워실로 향했다.

**

일본식 조식이었다.

된장국, 생선구이, 밥, 몇 가지 짭조름한 반찬들을 천호득은 모처럼 맛있게 들었다.

그의 뒤로 메이드 복장의 두 명이 서 있었고, 맞은편 테이블에는 윤만석이 앉아서 밥을 입에 넣고 있었다.

“더 할 텐가?”

“충분합니다.”

윤만석의 대꾸를 들은 천호득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비가 와서 그런지 몸뚱이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슬픈 일이야. 1년 젊어지는데 100억쯤이라면 한 20년 어치는 단번에 살 것 같은데 말일세.”

계단을 올라가며 천호득은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꺼내놓았다.

2층 거실의 테이블은 내리는 비를 배경으로 이전과 다른 풍경을 펼쳐놓았다.

“앉지.”

천호득이 앉기 무섭게 메이드가 차를 준비해주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회장님. 제가 이렇게 매일 찾아뵙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더구나 제가 몰랐을 정도로 은밀하게 작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차를 마셔.”

“회장님?”

천호득이 날카롭게 눈을 치켜뜨자 윤만석은 더 말을 하지 못했다.

“어제 막내 놈을 공개된 장소에서 만났으니 타깃은 녀석이 되겠지. 물론 그만큼 나를 어찌하려는 욕망이 커지겠지만 말일세.”

찻잔을 들어 홍차의 향을 마시듯 가볍게 입술만 적셨던 천호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집구석은 형제들이 질서정연하게 잡음 없이 살아가고, 어느 집구석은 자살에 소송에 정신이 없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재벌 집구석들이 그렇잖나.”

거실 창에 매달린 빗방울을 보며 천호득은 입술을 꿈틀거리며 웃었다.

“어제 막내 놈을 보면서 하늘이 마지막 기회를 주는구나 싶었지. 욕심이 없다고 할 때 녀석의 눈을 자네도 봤어야 했어.”

“저도 모르는 정보를 가졌을 정도로 무서운 분입니다.”

“그게 더 기가 막히지 않나? 그런 능력을 지니고도 큰형을 구해달라는 게.”

말끝에 나온 웃음을 들이마신 천호득이 그걸 삼키는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켜보자고. 어떤 짓을 하는지. 늘 말하지만, 녀석이 무리하게 선을 넘으면 우리에게도 비장의 한 수가 있지 않은가?”

비장의 한 수란 말을 들은 윤만석의 표정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돈이란 무섭지. 한순간에 사람을 잡아먹으려 드니까. 세상의 모든 기준이 얼마를 가졌느냐로 판단되는 시기가 있다네. 그때는 더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게 되지.”

천호득은 홍차를 들어 다시 입술만 적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렇더라도 큰놈을 죽이려 든 일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나?”

묵직한 윤만석의 시선이 들릴 때 천호득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이었다.

“준비해 두게. 그년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는 걸 내가 꼭 봐야겠어.”

“그러실 바엔 막내 아드님의 말씀대로 우선 큰 아드님의 손을 먼저 잡아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다고 큰놈이 고마워나 할까? 멍청한 놈이 마누라를 망쳤다고 나를 원망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리고는 또다시 둘째의 먹이가 될 거야.”

천호득의 눈이 더 이상의 대꾸를 허용하지 않고 있어서 윤만석은 잠자코 있었다.

“막내가 구해내지 못한다면 큰놈은 이쯤에서 정리되는 것이 좋아. 다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년과 그년이 낳은 새끼들까지는 용서할 마음이 없으니까 그에 맞게 준비를 해놓게.”

“예.”

지금처럼 냉정한 표정일 때의 천호득은 누구도 거스르지 못한다. 특히나 손자와 손녀까지 내치겠다고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흠. 그나저나 이놈이 오늘은 또 어떤 소식으로 날 놀라게 할는지 유 전무가 부러운 날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네.”

놀랍게도 천호득은 재미를 한껏 기대하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

처음 냉동창고를 방문했던 날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서울보다 조금 덜하긴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는 데도 냉동창고의 정문 안쪽에는 제법 많은 숫자의 임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씁쓸한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월급쟁이들의 처지와 힘겨움이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차에서 내린 천중명의 머리 위로 우산이 다가왔다.

작정하고 온 길이다.

이런 친절은 고마운 게 아니라 불편한 종류였다.

“고맙습니다. 가져온 게 있으니까 이걸 쓰겠습니다.”

천중명이 준비해온 우산을 펼친 다음이었다.

“우선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얼굴과 몸이 모두 빵빵하게 생긴 이수원 상무가 나서서 본관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를 따라 냉동창고의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왼편으로 가면 냉동창고, 오른편으로 가면 사무실과 임원들의 방, 회의실이 있는 구조였다.

복도를 걸은 천중명과 일행은 회의실로 들어가 앉았다.

길고 무척이나 넓은 탁자였다.

“빗길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야 차로 이동하는 거라 괜찮은데 빗속에 계시느라 오히려 고생하셨겠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전하는 사이 여직원이 차를 가져다주었다.

천중명은 예의상 가볍게 한 모금을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불편하고 뻑뻑한 데다 어색하기까지 한 긴장감이 술 먹고 돈 없는 진상처럼 대놓고 테이블을 넘실거리고 있어서 분위기는 하여간 죽여줬다.

이런 순간은 빨리 끝내주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김상용 부사장은요?”

“어제 짐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답을 들은 천중명은 임원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작업 점퍼 차림의 다섯 명 모두 이전의 삶을 통해 안면은 있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시겠지만, 그동안 이곳은 산적 소굴처럼 운영되었습니다. 김상용 부사장이 현금 거래를 핑계로 회사의 수익을 빼돌리는 동안, 여러분은 충직하게 그에게 협조했고요.”

“크흠.”

의미를 알기 어려운 헛기침이 임원들 사이에서 나직하게 나왔다.

“그동안의 비리를 털어내고 냉동창고의 영업을 바로잡을 생각입니다. 여기 있는 임원 분들은 전부 사직서를 제출해 주십시오.”

김상용의 해고를 보며 각오했던 모양인지, 임원들 다섯 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기만 할 뿐, 대꾸가 없었다.

“우선 사직서를 받은 후에 면담을 진행하겠습니다. 억울한 분이 있다면 그때 말씀하세요. 참! 여기 김상용 부사장의 아들도 근무하고 있다면서요?”

“예. 자재과에 대리로 있습니다.”

처음에 회의실로 안내했던 이수원 상무가 답을 꺼내놓았다.

“사직서 받아놓으세요.”

천중명의 지시가 떨어지자 무언가를 말하려던 이수원이 멈칫했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근로기준법에 따라서 처리하세요. 만약 불만이 있다고 항의하면 알려주시고요. 필요하다면 외부 감사 기관을 동원해서 지난 5년 치 회계자료를 전부 검토하겠습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임원들을 돌아보면서도 천중명은 그들이 안 됐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동안 실컷들 해먹었다.

현찰을 주면 깎아준답시고 유혹해서는 그렇게 받은 돈을 김상용에게 상납한 뒤에 다시 일정 금액을 받아 챙겼다.

그사이,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은 밀려나거나 지쳐서 떠나가고 냉동창고는 이들의 꼬리에 매달린 사람들만 바글바글한 추악한 직장이 되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들 있어요?”

“회사 현황에 관한 브리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냉동 보관된 물품의 수량과 품목을 정확하게 보고할 거라면 듣겠습니다.”

“예?”

“어차피 현금 받고서 목록 없이 보관하는 품목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거 없다고 자신하면 지금 브리핑하세요. 대신 창고에 보관 중인 물건의 품목과 수량을 정확히 기재해서 따로 한 부 주시고요.”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이수원이 시선을 뚝 떨궜다.

“시켜서 했다느니, 관례가 그랬다느니 하는 핑계는 꺼낼 생각들도 마시고, 개인면담 때 하고 싶은 말씀들만 준비하세요.”

“예.”

상투적으로 나온 답처럼 들렸다.

“명심하세요. 먼저,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분만 구제해드릴 겁니다.”

“그게 무슨…?”

“최소한의 형사나 민사 처벌은 각오하셔야죠. 설마 이래놓고 퇴직금 챙겨서 편안한 노후를 준비할 생각은 아니죠?”

“대표님. 우리는 김상용 부사장의 지시에 따른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에게 대드는 듯한 항변이었다.

천중명은 입술만 움직여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쥐는 쥐고, 고양이는 고양이인 거다.

게다가 이쪽은 도깨비 출신 고양이였다.

“어쩔 수 없이 회사의 수입을 빼돌렸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 말은 나중에 변호사와 나누시고, 지경디자인의 고상득 상무를 보낼 테니까 그분에게 사임서 제출하세요.”

임원들의 대답은 없었다.

하기야 지금 무슨 말을 하겠나.

현금으로 이미 보관비를 받아먹은 상태에서 물건을 빼랄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천중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곽대출과 유진교, 그리고 임원들이 줄줄이 몸을 일으켰다.

회의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는 동안 사무실 전체가 고요하니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렇게 본관 건물을 빠져나와 승용차에 도착했다.

우산을 접은 천중명이 뒷좌석에 타자 복잡한 표정의 임원들이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출발하겠습니다.”

냉동창고를 빠져나온 승용차는 빗길을 달려 공장에서 이천 시내로 빠지는 도로의 신호등 앞에 멈췄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습니까?”

“첫 방문 이후에 고민해서 정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런 공장은 임원과 직원들이 끈끈하게 엮여 있어서 단체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도 하겠죠.”

신호를 받아 움직이는 차 속에서 유진교는 궁금한 얼굴이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노조의 파업, 이런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유진교의 말을 들은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이런 거 모를 유진교가 아니다.

그러니 지금 질문은 어디까지 짐작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던진 질문 같았다.

“파견직과 계약직 직원들을 정직원으로 돌렸습니다. 지금껏 임원과 노조원들이 그들을 한 식구라고 대하지 않았을 텐데 이 상황에서 총파업이 일어날까요?”

“흠.”

“물론 사람 일이니까 총파업이 일어날 수도 있겠죠. 그럼 회사를 폐쇄할 생각입니다. 썩은 물이 남은 단지에는 아무리 많은 새 물을 부어줘도 반드시 썩습니다. 그럴 바엔 아예 단지를 바꾸는 게 낫습니다.”

“정직원 전환 때부터 이걸 계산했었습니까?”

천중명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운전석 뒤에 앉은 유진교를 보았다.

“계산했다기보다는 잘못된 걸 발견할 때마다 바로잡는 겁니다. 지금까지 부정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살아왔던 이들의 반항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에 대한 내 답은 지난번과 같습니다.”

유진교가 다음 말을 꼭 듣고 싶다는 눈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야비한 방법이든, 대가리를 디밀든, 똑같이 갚아주면서 나갈 생각입니다. 그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그룹의 모습을 만들려면 필요한 일을 하는 겁니다. 얼마나 큰 머리통이 앞을 막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잠시 천중명을 바라보던 유진교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면서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이 조용하게 변했다.

천중명이 검색을 위해 휴대 전화기를 들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액정에 ‘황선생’이라는 글씨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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