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037. 피에 적셔진 것처럼 보였다 (2)
답하기가 곤란한 질문에 천중명은 그냥 웃고 말았다.
“총수로 만나 뵌 게 아니니까 무섭게 눈 뜨지 마세요.”
그리고는 날카로운 천호득의 눈에 답하듯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로 뵌 거라고요. 그러니까 오늘은 그렇게 뵌 거로 넘어가시죠.”
멋진 대꾸를 했다고 생각한 직후였다.
“아버지를 보자는 놈이 유 전무를 통해 전화해?”
말문이 턱 막히는 질문이 바로 넘어왔다.
“말을 돌리는 것까지는 받아주마. 내 눈을 피해 정보를 구했다는 것이 놀랍긴 하다만, 너도 조직이 하나쯤 있을 시기니까 그 점도 나쁘지 않고.”
말문이 막힌 천중명을 보고서야 천호득은 기분이 풀린 얼굴이었다.
이런 일에도 승부 근성이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 말고 천호득이 진짜 아버지였다면 천중명은 어떻게 대했을까?
“감정이 보이는 눈빛은 좋지 않아. 어떤 때에도 속을 읽히지 마라. 누군가 너를 읽을 때는 네가 말 대신 표정으로 뜻을 밝힐 때가 유일해야 한다.”
“예.”
굳이 다른 말을 하기 싫어서 내놓은 답이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싶으냐?”
그런데 또다시 대답의 끝을 문 것처럼 천호득의 질문이 나왔다.
“네 말대로라면 회사 두 개가 저쪽으로 넘어가고, 그 일로 큰형까지 죽게 생겼다. 내가 너라면 큰형을 구하고 회사를 갖겠다.”
시선을 주었던 천호득이 픽 웃었다.
“여기까지 나를 불러냈으면서 그 정도도 생각 안 해 봤어?”
“저는 회장님이 알아서 해결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나야 네가 못 막으면 회사 두 개 빼앗기고 아들 하나 잃는 거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천중명의 다부진 질문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엇차!”
마치 일의 해결 방법을 찾은 듯이 후련한 얼굴로 천호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지금껏 저기 넘어가는 해처럼 붉게만 살았지. 젊을 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할아버지와 똑같은 꼴을 하고 있더구나.”
이런 말을 꺼낸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호득이 입술을 뒤틀며 웃었다.
“네가 바꿔봐. 큰형 살리고 작은형 손에 쥐고서 새롭게 만들어봐.”
“그래서 유 전무를 보내신 겁니까?”
이미 건물과 도로 너머로 넘어간 태양이 기회를 노리는 어둠의 멱살을 붙든 채 마지막 빛을 뿌리는 시간이었다.
“네가 불리했으니까 공평하게, 그 뭐냐? 요즘 애들이 쓰는 말 있던데…? 아! 치트키! 그걸 하나 준 것뿐이다. 그 외에 이렇게 직접 나와서 너를 본 것도 큰 도움이 될 게다.”
날카로운 총수의 눈을 한 천호득이 천중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가 알아냈으니 해결도 네가 해. 모른 척 눈 감는 것도 나쁘지 않아. 어쨌든 힘겨운 적 하나가 해결되는 거니까.”
말을 마친 그는 할 일을 끝냈다는 듯 몸을 돌려 차를 향해 걸었다.
젊은 남자 둘이 재빨리 다가와 담요를 받았다.
“독해져. 독해져야 살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큰형을 모른 척해.”
“그러기는 싫은 것 같습니다.”
승합차를 향해 걸으면서 주고받는 대화였다.
“싫으면 싫은 거지, 싫은 것 같은 건 뭐야?”
“제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해 봐서 그렇습니다.”
걸음을 멈춘 천호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 형의 회사를 가질 생각을 안 해 봤어?”
“예.”
“왜?”
“제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손에 넣는 건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주름과 검버섯 피어난 얼굴로 잠시 천중명을 바라보던 천호득이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승합차에 오르기 전이었다.
유진교과 윤만석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가까이 있었다.
“독해져.”
인사 대신 한 마디를 남긴 천호득이 차에 올랐고, 윤만석과 유진교가 눈인사를 전한 뒤에 그 뒤를 따랐다.
승합차의 자동문이 천천히 닫히는 동안, 천호득은 끝까지 천중명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감정에 총수의 냉정함이 섞인 눈빛이어서 마치 따듯한 찻잔에 담긴 독약을 받는 느낌이었다.
달칵.
마침내 문이 닫혔다.
천천히, 부드럽게 승합차가 출발해서 커다랗게 방향을 튼 뒤에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천중명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천봉서가 당할 때까지.
이렇게라도 천호득에게 내용을 전하면 최소한 천봉서가 당하지 않게 조치할 거라고 믿었다.
천호득의 답은 직접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아니면 적 하나를 줄이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거나.
태양의 손아귀를 뿌리치고 달려온 어둠이 천중명과 주차장을 품에 안고 있었다.
“후.”
총수란 정말 만만치 않은 인간이구나.
천중명이 긴 한숨을 내쉴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폰의 액정에 곽대출의 이름이 올라왔다.
**
허선영은 버릇처럼 휴대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허세직이 짜준 모임에 나가 웃음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도망칠 거다.
이 집에서 나가고 말 테다.
매일 되새기는 각오와 달리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기자회견을 통해 허세직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상상쯤 해 봤다. 그러나 허세직에게 우호적인 기자들이 과연 허선영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써줄지가 의문이었다.
출입국 사무소에서조차 허세직에게 먼저 연락해 주는 세상에서 허선영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오지은을 만나는 거 인정한다고 했었는데.
30억 원이라는 돈을 빌려주고 숨을 수 있는 등을 준다고 했었는데.
자물쇠를 세 개나 달아놓은 방 안에서 허선영은 어둠이 깔리는 창밖을 보았다.
허광렬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벼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서 불안한 날들이었다.
**
천상기는 이를 갈아대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왜! 왜 나를 두고 하필이면 그 개망나니냐고! 왜! 내가 뭐 그리 부족해서!”
천호득이 천중명을 따로 만났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
삼성동의 집무실 책상에서 벌떡 일어난 천상기는 책상에 두 팔을 짚은 자세로 뜨거운 숨을 푹푹 내쉬었다.
미칠 것처럼 분했다.
샘도 났고,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정말 다 했어! 멍청한 형도 챙겼고, 이 그룹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고!”
오늘 천호득은 탄천에서 천중명을 만났다.
왕회장이 직접 움직였다는 것의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그룹의 관계자들에게 천중명의 말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였고, 계획했던 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천상기와 강승애에게 보내는 묵직한 경고와 같은 일이었다.
“염병할! 젠장!”
천상기는 소름이 끼쳤다.
천호득이 누군가?
형제 둘을 제치고 그룹을 거머쥔 사람이며, 딸이 목매달아 죽은 채로 발견되었을 때도 “그러냐?”하고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내용을 빤히 아는 천중명과 탄천에서 만났다.
누가 불렀는지 모른다는 것이 가장 아팠다.
천호득이 불러서 천중명이 나간 건지, 천중명이 천호득에게 만나자고 한 건지?
그렇다고 천호득이 탄천까지 움직인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목젖이 크게 움직일 정도로 마른 침을 삼킨 천상기는 상체를 세우고 창으로 움직였다.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맨 듬직한 모습이 어둠을 배경 삼은 사무실 유리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일단 물러서야 하나?
결정은 강승애의 몫이었다.
“결국, 끝장을 보자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창을 노려보며 천상기가 질문을 꺼내 들었다.
“나를 꼭 불효자로 만들어야겠다면, 예!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결심을 굳힌 천상기는 매서운 눈으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
집에 돌아와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졌을 때 문이 열렸다.
곽대출이 먼저 들어왔고, 시커먼 얼굴에 눈과 코, 입이 큼지막하게 생긴 남자가 뒤를 따라 빌라에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제가 말한 황성규라는 분입니다.”
“안녕하세요? 천중명입니다. 이리 앉으세요.”
악수를 나눈 천중명은 소파를 향해 팔을 뻗었다.
거실의 소파는 둥그런 형태라 상석이란 개념이 없었다.
창을 등진 자리에 천중명이 앉았고, 왼쪽에 2인용 소파에 황성규가 앉았다.
“황 선생님. 커피?”
“좋지요.”
곽대출이 담배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주문을 받아 주방으로 움직였다.
“집으로 불러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성규는 서른 후반으로 보였다.
정보계통이 아니라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온 사람처럼 푸근한 인상이었다.
“담배 피우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말이 새나갈 위험이 없을 것 같아서요. 담배 하세요?”
“아! 감사합니다.”
천중명이 건넨 담배를 황성규가 받았고, 둘이서 불을 붙였다.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나요?”
“어떤 분인지 눈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눈을요?”
“눈빛까지 거짓을 만들기는 정말 어렵거든요. 만약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속아도 할 수 없는 일이구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서 천중명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자! 커피가 왔습니다.”
그때 곽대출이 믹스 커피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았다.
“대표님. 저에 대해 궁금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정보를 다루신다면서요? 곽부장이 그러더군요. 자부심이 대단하고, 무엇보다 믿을 만한 분이라고요. 저는 그거로 됐습니다. 저 친구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요.”
천중명은 맞은편에 앉은 곽대출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경그룹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해야 할 적이 많아서 그만큼의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렇군요.”
황성규가 두어 모금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갑자기 변하셔서 뵙고 싶었습니다.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구요.”
“그럼 그때 떠나시면 되잖습니까?”
황성규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대표님의 뒤를 알게 됩니다. 어떤 것들을 조사했는지도 알게 되고요. 그러니 대표님을 떠나도 다른 분을 모시기가 어려워집니다. 우리끼리는 소문이 제법 빨라서 그렇습니다.”
“혹시 일하게 된다면 원하는 조건이 있으신가요?”
“저까지 일곱 명입니다. 경비 포함해서 1년에 10억은 주셔야 합니다.”
“그렇군요.”
천중명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제 경력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언제부터 일할 수 있나요?”
이거 봐? 돈이 많아서 이러는 거야? 믿겠다는 거야?
황성규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계좌 번호를 알려주면 내일 개인 통장에서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아직….”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엿 같은 양반이긴 한데 죽는 꼴을 보기는 싫어서요.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가능하면 바로 시작했으면 합니다.”
곽대출이 천중명과 황성규를 번갈아 보는 앞이었다.
“함께 먹고 사는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쥐어짜고 누르는 것 말고 마주치면 저절로 고개 숙여 인사하는 회사,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의 가족들이 행복한 회사, 그런 거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등은 곽 부장에게 맡겼습니다. 이제 눈과 귀가 필요합니다. 저기 곽 부장이 있으니까 이제 황 선생님만 결정하시면 되겠네요.”
황성규가 졌다는 투로 웃으며 천중명을 보았다.
“비겁한 조사도 많을 겁니다. 제가 단기간에 적을 좀 많이 만들었거든요. 야비한 상대에게는 악착스러울 정도로 야비하게, 대가리 디미는 적은 반드시 목을 돌려줘 가면서 나갈 겁니다.”
천중명은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꺼내놓았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질문을 받은 황성규는 손도 대지 않은 찻잔에 시선을 떨어트리며 답을 하지 않았다.
이런 남자에게 잔머리 굴려봐야 바로 들통난다.
구질구질하게 다른 소리 하느니 솔직하게 털어놓은 뒤에 함께 가면 가는 거고, 아니면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은 거였다.
천중명과 곽대출의 시선을 받은 상태에서 황성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켜보던 곽대출이 갑갑한 듯 커피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은 다음이었다.
“후.”
짧은 숨을 뱉어낸 황성규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급하다고 하셨는데 제가 뭘 알아오면 되겠습니까?”
그가 천중명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는 커다란 눈으로 답을 기다렸다.
“일하기로 하신 겁니까?”
곽대출이 끼어들어서 질문을 던졌고,
“대표님을 따르는 동안은 내 등도 도깨비가 지켜줄 텐데, 이만한 자리가 또 있겠습니까?”
황성규가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답을 꺼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