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34화 (34/315)

# 34

034. 고집스럽게 생겼다 (2)

천중명이 들여다본 인터폰의 모니터에는 곽대출의 말대로 단정한 차림의 20대 후반 아가씨가 서 있었다.

“누구세요?”

[천중명 대표님 댁이죠? 저는 코리아클럽에서 나온 서수미라고 합니다. 대표님을 잠시 만나 뵈러 왔습니다.]

뭔가 이상한데?

절로 고개가 갸웃해지는 방문이었다.

천중명이 이 시간에 집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으며, 또 가입비 2억에 연회비 1억씩 하는 코리아클럽 같은 곳이 약속도 안 잡고 이렇게 방문한다고?

천중명은 의아한 눈으로 모니터를 다시 살폈다.

“다음에 오세요.”

그리고는 간단한 답과 함께 모니터의 액정을 꺼버렸다.

“왜? 코리아클럽에 가입했었잖아?”

“저런 약속이 있다면 유 전무가 알려줬겠지. 가입도 내가 한 게 아니라 유 전무가 대신했고. 진짜 코리아클럽에서 나온 여자라면 나중에 다시 만나면 돼.”

“그렇긴 하네. 그럼 도대체 누구지?”

“급하면 다시 찾아오겠지. 지금 생각난 건데 우리가 없는 동안에도 김순례 씨가 이 빌라를 치웠다고 했었거든. 그렇다면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러네! 그럼 굳이 벨을 누를 필요가 없지!”

이제야 상황을 이해한 곽대출이 확인처럼 인터폰을 노려보았다.

“그럼 도대체 아까 그 여자는 뭐야?”

궁금증을 털어내지 못한 곽대출이 혼잣말을 뱉는 동안, 천중명은 휴대 전화기를 들어 유진교의 번호를 눌렀다.

- 그런 약속은 없었습니다. 혹시 기자일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주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천중명의 설명을 들은 유진교의 답이었다.

“기자가 저런 식으로 들어와도 되나요?”

- 들어오면 끝입니다. 그렇게라도 대표님을 마주해서 신분을 밝힌 뒤라면 내쫓기는 상황도 기사가 되니까요.

“코리아클럽의 가입은요?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 말이 나갈 곳은 많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적을 만드셨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유진교의 답을 들은 다음이었다.

“알겠습니다. 또 전화 드리죠. 그리고 참!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조건으로 200억을 투자받기로 했습니다. 김상용 부사장의 해고는 2시에 결정 난다고 들었고요.”

- 참고하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통화 내용을 곽대출에게 알려주었다.

“조심해야겠는데? 유 전무님 말대로 걸리는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또다시 곽대출의 혼잣말이 터져 나왔을 때였다.

삑삑삑삑삑삑삑삑. 띠루룩.

문이 열리며 김순례가 커다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빌라에 들어섰다.

“이리 주세요.”

곽대출이 달려가서 받았다.

그 뒤로 천중명이 두 사람을 소개했고, 메이드 복으로 갈아입은 김순례는 곧장 주방으로 움직였다.

확실히 모든 분야에 전문가는 따로 있다.

뚝배기, 냄비, 프라이팬을 인덕션에 올려놓은 김순례가 뚝딱뚝딱 재료들을 손질해서 그 안에 담아 넣자, 마법처럼 된장찌개, 계란찜, 생선구이, 밥, 간단한 나물과 콩나물 무침 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천중명과 곽대출이 지켜보는 김순례의 뒷모습에서 고수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라면 사실 말 다한 거였다.

밥 냄새가 코를 마구 간질인 직후에,

“식사하십시오, 대표님.”

김순례가 쟁반에 담은 밥 두 공기를 홈바에 놓아주며 천중명과 곽대출을 불렀다.

기름진 쌀밥, 매콤한 무침, 김순례가 가져온 겉절이와 된장으로 무친 나물, 된장찌개, 그 외에 계란찜과 밑반찬까지, 보기에도 환상적이었지만, 맛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이었다.

혼자서 먹었다면 그나마 좀 덜했을 텐데, 곽대출과 함께 모처럼 먹는 집밥이다 보니 결국 둘이서 밥이고 반찬을 깨끗하게 비우고서야 식사가 끝났다.

“이렇게 많이 드시는 건 처음입니다. 다음에는 좀 더 준비하겠습니다.”

반가운 얼굴의 김순례가 솥에 끓여낸 누룽지를 천중명과 곽대출 앞에 놓아주었다.

구수한 누룽지 한 숟가락 입에 넣고 나자, ‘지금껏 잘 버텼어. 이거 먹고 힘내. 기운 잃지 마.’ 하며 누군가 등을 다독여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후! 이야!”

곽대출의 나직한 감탄사를 들으며 천중명은 먹먹한 가슴으로 누룽지를 입에 넣었다.

오랜 병수발에 밥하는 것쯤 천중명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위로가 되는 식사가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이전 삶에서 먹었던 김순례의 식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위로이기도 해서,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잘 먹었습니다.”

천중명이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이게 밥이지!”

보약처럼 누룽지를 들이마신 곽대출이 감탄과 함께 그릇을 내려놓았다.

‘아차!’

곽대출이 움찔해서는 김순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 앞에서 너무 편하게 행동했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곽 부장. 커피 좀 부탁해.”

“예, 대표님.”

천중명은 적당하게 지시를 내리고는 노트북을 챙겨서 서재로 움직였다.

밥이 따듯하고 맛있었던 만큼 아쉬움이 크게 다가왔다.

철들면서 기억하는 어머니는 환자의 모습이 전부였다.

이런 식사조차 못 하고 떠난 어머니가 불쌍했고, 그렇게 떠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은 아버지란 인간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대표님? 커피.”

그때 서재에 들어온 곽대출이 잔을 놓아주고는 천중명의 안색을 살폈다.

“그냥 어머니 생각이 났었다. 아버지란 인간도 그렇고.”

“하기야. 병원에서 어머니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을 땐 나도 황당하더라.”

슬쩍 밖을 살핀 곽대출이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을 마셨다.

“아주머니도 타 드렸어. 그나저나 음식 솜씨가 죽어.”

천중명은 픽 웃으며 앞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떠난 사람을 추억하는 것이나 책임감 없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좋았다.

“2시 약속 준비하셔야지? 나도 대표님과 같이 나가서 이 근처 사무실 자리 돌아보고, 3시 반에 사람 한 명 만나 볼 예정입니다.”

“편하게 다녀.”

“그나저나 나 없이 괜찮겠어?”

곽대출은 아까 모니터에서 보았던 여자가 떠올랐는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취재하면 그 인터넷에 제목이 이상한 기사로 올라오는 모양이지? 지경그룹 망나니 아들의 개과천선? 이런 거? 아니다.”

곽대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가?”

“개과천선이 아니라 원래 망나니였으니까 개가 천선이 되는 거겠지?”

“확!”

둘이서 킬킬대다가 동시에 움찔하고는 밖을 살폈다.

“일어나자. 양치하고 옷도 갈아입어야지.”

“그럽시다, 대표님.”

천중명이 단숨에 비운 커피 잔을 곽대출이 들었다.

간단하게 씻은 천중명과 곽대출은 셔츠에 정장을 걸치고 거실로 나섰다.

“아주머니. 혹시 주말을 빼고 주 5일을 와줄 수 있나요?”

“네?”

김순례는 어쩐지 반가운 기색이었다.

“주 중에 매일 와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번 주에 아르바이트 정리하면 다음 주부터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천중명이 다음 주부터라는 말에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김순례의 얼굴에 담뿍 올라왔다.

천중명의 일을 하면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확실히 급여를 더 받는다. 그렇더라도 김순례의 반응에는 어쩐지 그 이유를 뛰어넘는 절박함이 있었다.

분명 딸이 취직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다고 했었는데?

“그러세요. 가능하면 점심과 저녁을 먹을 수 있으니까 필요한 재료도 준비해 놓으시고요. 비용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급여와 재료 구입비는 제가 비서실에 말씀드리면 됩니다.”

“그럼 다음 주부터 매일 오시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별걸 다 비서실에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주 5일을 결정한 천중명은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다.

취직했단 딸이 한 달인가 지나고 수습직에서 잘리게 생겼다며 걱정하던 모습이었다.

“참! 따님은 남부증권인가 잘 다니나요?”

곽대출이 왜 이러나 하는 얼굴로 천중명과 김순례를 번갈아 본 다음이었다.

“그게….”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고객 응대를 잘못해서 문제가 생겼나 봅니다.”

“고객 응대요?”

머뭇대던 김순례가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00억가량을 투자하던 고객이 있었는데 제 딸아이가 뭔가를 잘못해서 인출한다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무래도 수습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것 같다고….”

없는 사람의 설움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려 애쓰던 김순례가 말끝을 흐렸다.

“남부증권은 무슨 100억 원짜리 고객을 수습직원이 상대하지?”

증권회사의 생리를 몰라도 김순례의 말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물었는데요? 혹시 몰라서 그런데 따님 이름이 어떻게 되죠?”

김순례가 어떻게 할지 모를 얼굴로 천중명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아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 그래요. 따님 이름이요.”

“이명선입니다, 대표님.”

“알았어요. 갔다 올게요. 시간 되면 퇴근하세요.”

김순례의 배웅을 받으며 천중명과 곽대출은 빌라를 나섰다.

“모처럼 걸어갈란다. 너는?”

“대표님이 그러시다면 나야 환영이지요.”

정문을 나선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삼성동을 향해 걸었다.

“그럼 사무실을 알아보고 들어오겠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향하는 곽대출을 보낸 뒤에 천중명은 삼성동 사거리에 있는 담배 회사로 걸었다.

배불리 먹은 후에 즐기는 산책처럼 걸었다.

담배 회사 건물은 삼성동 사거리에서 대치동 방향으로 꺾어 조금 올라간 자리에 있었다.

담배회사는 확실히 달랐다.

1층 로비에 담배자판기와 커피 자판기가 있는 꽤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환풍시설도 그렇지만, 이용자가 나간 직후에 바로 청소하는 시스템이어서 흡연실은 이렇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표본을 보는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을 확실히 지난 덕분에 자리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흡연실 부스의 문을 열고 들어간 천중명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허름한 양복과 그에 걸맞은 투박한 넥타이를 매고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손도운을 발견했다.

천중명은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네모나고 각진 1인용 소파가 양쪽에 두 개씩, 모두 네 개가 놓인 자리에 다가가자, 그의 오른편에 놓인 낡고 오래된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손도운 선생님?”

“아, 예! 제가 손도운입니다.”

목소리가 너무 가늘고 높아서 누군가 손도운의 뒤에 숨어서 대신 말을 건네는 건 아닌가 싶었다.

“천중명입니다.”

악수를 나눈 천중명은, “음료수는요?” 하는 질문을 던졌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아뇨. 여기까지 오셨으니까 제가 사는 게 공평합니다. 뭐 드시겠어요?”

“물이면 됩니다.”

답을 해놓고도 미안했던지 손도운은 천중명의 뒤를 따라와 자판기에서 뽑은 물병을 받아들었다.

이온음료를 추가로 뽑은 천중명은 손도운과 함께 자리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담배 하신다면서요?”

“예. 대표님은요?”

옆에 앉은 두 사람이 닭살이 돋는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뽑아 드는 손도운을 힐끔거렸다.

“저는 조금 있다가 피울 테니까 편안하게 하세요.”

지지 않겠다는 듯 안간힘을 쓰지만, 천중명의 맞은편에 앉은 손도운은 낙인처럼 달려드는 시선에 이미 주눅 든 모습이었다.

혹시 딸이 따돌림 받은 게 목소리 때문일까?

여자라면 그리 흉잡힐 목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담배를 입에 문 손도운이 가방에서 투명한 표지에 들어있는 제안서를 두 부 꺼냈다.

“보셨겠지만, 제안서입니다.”

그리고는 천중명이 보기 좋게 한 부를 돌려서 놓아주었다.

“이중성 부사장은 손 선생님이 판매금액의 50퍼센트를 요구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네.”

손도운은 급하게 빨아들인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대표님도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보다는 제품 개발을 오래 하셨으니 화장품업계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왜 그런 요구를 하셨는지가 궁금했었습니다.”

제안서를 향해 시선을 떨어트린 자세로 손도운은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익의 몇 퍼센트라는 조건으로 한 번도 수익을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던 손도운이 작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매번 같은 조건이었는데 항상 정산해 보면 결과는 같았습니다. 샘플 제작, 홍보비용, 그 외에 온갖 사유로 이익을 털어낸 뒤에 성분을 약간 바꾼 다른 제품으로 수익을 내곤 했었습니다.”

천중명의 눈을 본 손도운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소송을 위해 변호사도 만나보곤 했는데, 제가 이길 방법은 없었습니다. 판매 중간에 몇 백씩 서너 번 받은 게 전부였고요.”

“미니멈 개런티라도 요구하지 그러셨어요?”

“대한민국에 화장품 개발자에게 미니멈 개런티를 주는 기업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제걸 베끼는 게 빠를 겁니다.”

세상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에 부딪혀 상처 입은 개발자의 독백 같은 답이었다.

“대표님. 이 제품은 생산시설만 갖추면 수입하겠다는 업체도 있습니다. 초도 물량만 800억입니다. 제가 매출의 50퍼센트를 달라고 한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공장이라면 손 선생님이 충분히 만드실 수 있지 않나요? 특허가 있으니까 신보나 기보에 신청하면 될 텐데요?”

마지막 끈을 붙잡듯 말을 건넸던 손도운이 서글프게 웃었다.

“특허는 기본입니다. 거기에 매출 계약을 가져오랍니다. 선금 받은 증명하고요. 수입하겠다는 쪽은 공장 시설이 완비되어야 선금을 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말입니다.”

“그 내용을 제가 확인할 수 있습니까?”

“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가 공장을 지을 자금을 투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손도운의 눈 끝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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