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033. 고집스럽게 생겼다 (1)
그의 성격인 모양이었다.
- 윤만석입니다. 대표님.
굳이 이름을 밝히며 통화를 시작하는 것이 말이다.
- 손도운 씨의 조사가 끝났습니다. 자료를 어떻게 전달해드리면 편하시겠습니까?
“이메일로 부탁드려요.”
답을 했던 천중명은 아차 싶었다.
천중명의 이메일 주소야 당연히 안다. 그러나 그동안 비밀번호를 알아놓지는 못했다.
-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통화가 끝났다.
“윤 실장이 손도운 씨에 관한 조사를 끝냈다고 하네요. 꽤 빠르군요.”
“대표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간단한 대화를 나눈 천중명은 우선 윤만석에게 이메일 주소를 보내주었다.
멍청하게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한 비밀번호처럼 정작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이렇게 사소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 중에 아직 잊고 있는 건 없을까?
지이잉.
[자료 보냈습니다. 메일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뒤에 윤만석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전무님. 통합 사무실은 곽 부장이 집 근처의 적당한 곳을 알아볼 참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중요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는 특별하게 걸려온 전화나 나눈 이야기 없이 삼성동의 빌라에 도착했다.
“그럼 저는 돌아가 있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모처럼 드라이브가 좋았습니다.”
주차장에서 유진교와 헤어진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먼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곽대출이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천중명은 공인인증서와 포털 아이디의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그 짧은 작업을 하는 데 OTP와 휴대전화기를 통한 본인 인증만 열 번은 넘게 했지 싶었다.
마침내 비밀번호를 모두 변경한 천중명은 홈바에 노트북을 두고서 윤만석이 보내준 자료를 살펴보았다.
커피를 가져온 곽대출이 고개를 기울여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고집스럽게 생겼다.”
“그렇지? 딱 너 같은데?”
“우리 대표님이 또 욕을 쳐드시고 싶은가?”
둘이서 킬킬거리며 커피를 마셨고, 그 뒤에 천중명은 자료에 집중했다.
솔직히 특별한 뭔가가 있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다섯 페이지를 넘기도록 나이가 53세이고, 주소가 안산이라는 것, 상을 받은 것들, 가족사항과 그동안 보도되었던 기사들이 전부였다.
소파에서 전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곽대출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중명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동안 손도운이 개발했던 제품들이 순서대로 있었다.
이거 봐?
놀라운 건 개발 제품 옆으로 실제 제품 생산으로 이어진 경우와, 화장품 회사에서 교묘하게 복제품을 생산한 경우들을 나누어 알아보기 쉽게 기록했다는 점이었다.
불행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제품은 하나도 없었다.
“뭐 이래?”
성공한 제품이 없다는 말쯤 이미 들었었다.
그렇더라도 최소한 적당한 수준의 기본 매출은 나왔으리라 기대했었는데 시장에서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모니터에 시선을 준 채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200억 원이다. 200억 원.
물론 홍보에 100억 원 이상을 쏟아 붓는 것이긴 하다만, 그 큰돈을 들여 개발한 제품이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여태 잘난 척, 센 척 밀어붙였던 모든 것이 한낱 철부지 짓이 되고 만다.
이걸 밀어붙이는 것도, 이 제품의 출시를 막을 수 있는 권한도 모두 천중명에게 있었다.
당연하게 이 사업과 관련한 책임 역시 결정권자인 천중명의 몫으로 돌아온다.
천중명은 처음으로 사업이 무섭다고 느꼈다.
지금 200억도 버겁지만, 앞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투자금의 규모가 상상을 넘어설 수도 있는 일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잠시 제품 결과를 확인한 천중명은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뭐야? 이건 또?
그리고는 노트북의 모니터에 고개를 바싹 가져갔다.
[꼼꼼하나 주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임. 좋아하는 과목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강함.]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의 손도운의 생활기록부가 모두 있었다.
다음은 손도운의 사진이었다.
그걸 보며 천중명은 소름이 끼쳤다.
어릴 적 찍은 색 바랜 가족사진부터 중고등학교 때의 교복과 사복 사진, 그리고 연애 기간과 결혼식, 이후의 가족사진이 순서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어떻게 구했을까?
집을 털어서 앨범을 훔쳤나?
윤만석의 능력에 놀란 천중명이 굳은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볼 때였다.
“뭔데 그래?”
곽대출이 다가왔다.
“이거 봐. 앞쪽에 있는 손도운의 생활기록부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가족사진까지 다 있다. 거기에 여기는 손도운의 부인의 생활기록부와 성장기, 그리고 부인의 가족사진들이다.”
“이걸 어떻게 구했지? 집에 들어가서 찍어오나?”
곽대출도 꽤 놀란 눈치였다.
그렇게 둘이서 손도운과 그의 부인인 천미진의 결혼까지를 사진으로 모두 보았다.
“어후, 진짜! 윤 실장인가 하는 인간 무섭네! 이렇게까지 자료를 구해야 하는 거구나! 이러면 싫든 좋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는데?”
곽대출의 감탄에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 모두 끝나고 다시 문서로 작성된 기록이 나왔다.
이번엔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이들의 사진은 확실히 좀 더 선명했다.
“이런 사진 정보가 주는 게 있구만! 얼굴을 보니까 설명을 듣는 것보다 이 사람들의 감정을 확실하게 알겠잖아?”
서류를 살피던 곽대출이 두 번째로 쏟아낸 탄성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손도운과 그의 가족들 사진을 보며 그때그때 힘겹거나 즐겁거나 어려웠던 환경을 모두 알 것 같았다.
자료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천미진이 다니는 식당의 위치와 급여, 군대에 간 아들의 면회횟수, 심지어 딸이 따돌림으로 인해 두 번이나 학교를 옮겼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후.”
자료를 다 본 천중명은 상체를 세운 뒤에 담배를 집어 들었다.
“대표님아. 우리가 조직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거 같지?”
“그러네. 도대체 이런 정보를 어떻게 구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면 안 되겠다.”
천중명의 옆에서 담배를 집은 곽대출이 라이터를 집었고, 둘이서 불을 붙이고 난 다음이었다.
“장만섭으로는 안 되겠다.”
곽대출이 무거운 얼굴로 노트북의 자료를 다시 보았다.
“흥신소 수준으로 될 일이 아닌 거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알아볼 테니까 그렇게 이해해주라. 괜찮겠냐? 대표님?”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이렇게나 무서운 인간들을 상대로 어설프게 대들었다간 또다시 천호득의 손바닥 안에서 뛰어다니는 꼴이 되기 좋았다.
자료를 보며 손도운뿐만 아니라 천호득의 조직이 가진 힘을 좀 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이 양반을 만날 수 있는지 전화부터 해보자.”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어서 손도운의 번호를 눌렀다.
새소리가 요란한 신호음이 울린 다음이었다.
- 여보세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높은 톤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여보세요? 손도운 씨 되십니까?”
- 그런데요? 어디시죠?
여자 목소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가늘고 높은 톤이었다.
“지경화장품 대표 천중명입니다. 잠시 뵙고 싶은데, 혹시 시간이 되시나요?”
- 지경화장품이요?
“예. 새로 대표이사가 된 천중명입니다.”
손도운은 잠시 멈칫했다.
- 그럼 이중성 부사장님은 어떻게 되셨나요?
“임원진의 교체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새로 대표이사를 맡게 됐고, 선생님의 제품에 관심이 있어서 뵙고자 하는 겁니다.”
- 대표님. 제 조건에 대해서는 이미 부사장님과 김태환 이사님께 다 말씀드렸습니다.
톤이 높은 음성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셨던 조건을 받아들이는데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다른 제안을 하려는데 괜찮으시면 만나서 말씀하시죠?”
- 네에.
뜬금없는 대꾸를 꺼내놓은 손도운이 망설이는 것처럼 잠시 말이 없었다. 목소리와 다르게 성격은 사진에 나온 인상 그대로 투박한 모양이었다.
천중명은 손도운에게 치를 떨던 이중성 부사장을 떠올렸다.
이렇게 높은 음성으로 고집을 피워대면 고개가 저어질 만도 하겠구나 싶어서였다.
- 어디에서 뵈면 될까요?
“편한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움직이죠.”
- 대표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삼성동입니다.”
또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 제가 오후에 서울에 갑니다. 삼성동에 있는 담배 회사의 로비에서 뵈면 어떨까요? 그곳이 담배 피우기가 편해서요. 아! 담배 하시나요?
“예. 오히려 반갑습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뵙죠? 시간은요?”
- 오후 2시쯤 어떠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후 2시에 삼성동 담배회사에서 뵙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내려놓고 모니터에 올라온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가족사진이었다.
아마 아들이 군대 가기 전에 찍은 사진인 모양인데 가족 모두 웃고는 있지만 어쩐지 우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긴, 가장이 화장품 개발에 매달린 데다, 어쩌다 제품을 출시해도 성과가 좋지 않으니 삶이 힘겹고 팍팍하기도 하겠다.
손도운의 고집스러운 눈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담겼고, 그 옆에서 아들은 의연한 척 어머니를 안고 있었으며, 부인과 딸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점심은 어떻게 하시려나, 대표님?”
곽대출의 질문이 사진에 빠졌던 천중명을 깨웠다.
“조금 뒤에 먹자. 오늘 김순례 씨 오는 날이거든. 혹시 식사준비를 해 올 수 있는지 문자 먼저 해봐야겠다.”
천중명은 김순례의 전화번호를 찾아 점심을 위한 장을 봐올 수 있는지 물었다.
지이잉.
[점심을 드실 거면 제가 조금 일찍 가도 될까요?]
답은 곧바로 왔다.
이걸 뭘 고민할 게 있겠나?
[가능하면 부탁합니다.]
[네. 그럼 12시까지 준비해서 도착하겠습니다.]
문자 두 번으로 점심이 해결되었다.
“이 아줌마가 그렇게 솜씨가 있어?”
“그냥 감동이야.”
곽대출의 질문에 가볍게 답을 한 천중명은 포털을 열어 그동안 왔던 메일들과 과거 메일들을 살펴보았다.
메일들은 죄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 성인용품, 심지어 아가씨들을 소개해준다는 스팸들이 대부분이었다.
“에효.”
하여간,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것처럼 정확하게 증명해 줄 것들이 또 있을까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말이지 행여 누가 볼까 두려운 수준이어서 진지하게 아이디를 새로 만드는 것을 고민할 정도였다.
곽대출은 연신 전화기를 붙들고 몇 사람과 통화했다.
정보 쪽 관련자들이지 싶은 통화에,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분명한 통화가 있었다.
그동안 천중명은 제안서와 손도운의 자료를 꼼꼼히 다시 살폈다.
이 제안서를 만들며 얼마나 간절했을까?
궁금한 것도 있었다.
사람이 간절하면 매달리는 법인데 손도운은 도대체 왜 판매금의 절반을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지이이잉.
제안서와 노트북을 번갈아 들여다보던 천중명의 옆에서 휴대전화기가 짧게 울었다.
[자금 지원은 결정 나서 통보했다. 전환사채로 지원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김상용 부사장의 해임은 2시에 결정해서 알려주마.]
천상기가 보낸 문자였다.
단순한 문자일 뿐인데도 어쩐지 독기와 살벌함이 철철 넘치는 느낌이었다.
“아, 이거! 공부를 해야겠는데?”
“뭘 또 공부하시나? 좋은 대학 나온 우리 대표님이?”
“전환사채야 아는데 이걸 저놈들이 어떻게 이용할지 알아야 대비를 하지. 그러고 보니까 이거 회사에서 수익을 올려도 나는 얻는 게 없잖아?”
“그게 뭔 소리야?”
억울한 일이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악을 쓸 것 같은 표정으로 곽대출이 다가왔다.
“그렇잖아. 회사 지분이 전부 저쪽에 있으니까 이게 잘 되면 지분 가진 사람들만 좋은 거고, 만약 실패하면 나만 욕 뒈지게 먹고 끝나는 거 아니냐 이거지.”
“그런 게 있어?”
곽대출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우선 손도운 씨를 만나보고 나서 투자하게 된다면 이 부분도 꼼꼼히 살펴봐야겠다.”
“그러셔, 대표님. 손해 보지 않게! 매조지 잘해서!”
“매조지? 그건 뭔 소리냐?”
“어허! 마무리한다는 우리말 아냐? 왜 이래, 이거!”
곽대출이 짧은 지식을 한껏 자랑할 때였다.
띵동댕동. 띵동댕동.
벨이 울렸다.
“김순례 씨 왔나 보다.”
“내가 열겠습니다, 대표님!”
현관으로 움직인 곽대출이 인터폰을 향해 팔을 뻗다가는 멈칫했다.
“얼른 열어주지 뭐해?”
“김순례 씨치고 너무 젊은데?”
“뭐?”
홈바에서 일어난 천중명은 현관 앞의 인터폰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