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032. 열심히들 사셔 (3)
물 한잔을 얻어 마셔도 그게 선의에서 내미는 건지, 마지못해 주는 물 잔인지를 아는 게 사람 아니겠나.
공장에 들어선 천중명을 향해 난처한 얼굴로 경비가 다가왔다.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를 아는데도 인사를 안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척했다가는 불똥이 튈까 무시할 수도 없는 곤란함이 나이 든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지켜보겠다는 투로 유진교는 묵묵하기만 했다.
이제 겨우 아침 9시다.
새로운 날을 밝힌 햇살 아래에서 천중명은 공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끔찍했던 기억이 그대로 남았던 지경화장품과는 달리 냉동창고는 확실히 덤덤하게 다가왔다.
대표이사 선임 후 첫 방문에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의미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널따란 주차장에는 화물트럭들이 잔뜩 줄지어 있었고, 한쪽에 지게차, 그 뒤로 산더미처럼 세워놓은 팔레트들이 있었다.
흰색 페인트를 바른 거대한 사각형의 공장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는데 식재료를 보관하는 창고의 이미지와는 잘 어울렸다.
분위기를 눈치챈 곽대출이 천중명의 왼쪽 뒤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전무님. 내가 온다고 연락했었나요?”
“예.”
묵직한 답을 들은 천중명은 경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말은 들었습니까?”
“예. 그 점에 대해서 파견직 직원들과 계약직 직원들 모두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경비가 송구하다는 얼굴로 답을 건넨 다음이었다.
천중명은 다시 한 번 공장을 천천히 둘러본 뒤에 곽대출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자.”
“예.”
고맙게도 곽대출은 반문 한 번 없이 운전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냥 가십니까?”
“둘 중 하나 아니겠어요? 엄청나게 바쁘거나 아니면 내가 못마땅한 거. 전자라면 부사장이 직접 창고에 물건을 관리해야 할 정도로 바쁜데 굳이 시간 뺏을 필요 없는 거고, 후자라면 더 말할 필요 없죠.”
말을 마친 천중명은 곧바로 조수석의 뒷자리로 몸을 실었다.
승용차의 뒤를 돌아온 유진교가 운전석의 뒷문을 열고 타기 무섭게 곽대출은 곧바로 차를 출발했다.
“이후의 일정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통합 사무실로 사용할 적당한 곳을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 외에 냉동창고를 맡길 만한 인재를 찾아봐야겠지요.”
“아직 김상용 부사장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성급한 판단을 하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뭘 꼭 된장인지, 오물인지를 먹어봐야 아는 건가?
그가 정말 바빠서 못 나왔다면 최소 이사급이나 부장급이 마중 나왔어야 하지 않겠나.
천중명이 픽 웃었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유진교의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여보세요?”
승용차는 공장 진입로를 빠져나와 사거리의 신호를 막 받은 참이었다.
“잠시만. 김상용 부사장입니다. 받아보시겠습니까?”
짧게 대꾸한 유진교가 휴대전화기를 내리고는 천중명의 의사를 물었다.
“줘보세요.”
천중명은 순순히 전화기를 건네받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공장까지 왔으면 올라 왔다 가지, 그냥 가는 건 뭡니까? 어떻게? 그냥 가실 거야?
걸걸한 음성이 천중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까불지 말고 지금에라도 적당히 숙이고 들어오면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겠다는 김상용의 감정이 여과 없이 담겨 있었다.
“부사장님.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지 모르겠는데 다른 자리 알아보시는 게 좋아요.”
천중명의 말이 건너가기 무섭게 코웃음이 바로 나왔다.
- 우리 신임 대표님이 잘 모르시나 본데, 나 등기이사요. 대표님이 나를 자르려면 이사회를 열어야 하고 그 이사회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뭘 좀 알고 말을 해야지.
“고작 이사회 믿고 그렇게 설친 거야?”
- 이봐요, 신임 대표. 말을 조심합시다. 나이를 먹어도 내가 훨씬 더 먹었고, 이 공장 세울 때 벽돌 한 장, 철근 하나까지 내 손을 거쳐서 꽂았어.
“그래서?”
- 끄응.
유진교가 긴장한 건지, 염려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천중명을 바라보는 차 안이었다.
“이사회 열어서 그 건방진 모가지 잘라줄 테니까 그때까지 거기서 산적놀이나 원 없이 하고 있어.”
- 이봐! 나한테 당신만 한 자식이 있어! 어디에서 함부로….
“나이 따지고 싶으면 양로원에나 가! 그리고 당신은 당신보다 나이 많은 경비에게 공손해? 존댓말 쓰냐고?”
- 하! 나 원!
기가 막힌 탄성의 뒤로 뜨거운 숨을 쏟아내는 소리가 커다랗게 따라왔다.
“내 또래의 아들? 그걸 생각하는 양반이 거기 있는 당신 아들 나이의 직원들이 다 비정규직인 걸 여태 지켜보고만 있었나? 그렇다면 그 잘난 당신 아들은 지금 뭐하는데?
대꾸는 없었다.
그런데 그 침묵이 묘하게 천중명을 긁어댔다.
혹시 이 인간?
“당신 아들 혹시 우리 냉동창고에서 일하나?”
대꾸는 역시나 없었다.
“총수님을 믿는지, 아니면 큰형이나 작은 형을 믿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책상 정리나 하고 있어. 겨우 현상유지 수준의 실적을 올리는 부사장이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목청을 높이지 않아서 천중명이 건네는 말은 서늘하게 들렸다.
“더 할 말 있어?”
-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일단 돌아와서….
“부사장님. 늦었어요.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 진짜 이렇게 나올 거요?
“아니. 좀 더 심하게 할 생각인데? 당신 라인 있을 거 아냐? 줄 서서 목매달고 당신 지시 충실하게 이행한 인간들. 아들 포함해서 그거 다 정리할 거거든. 함께 책상 정리하는 게 좋을 거야.”
- 나를 이렇게 대하면 온전히 냉동창고를 운영하기 어려워질 거요. 그걸 감당할 수 있겠어?
숨겨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든 사람처럼 김상용이 으르렁거렸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다 해결해. 회사와 직원을 위해 독불장군이 되는 건 오케이. 그런데 회사가 당신의 산적 놀이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야.”
- 푸후.
“그만 끊을 테니까 하여간 정리는 좀 깔끔하게 해.”
말을 마친 천중명은 전화기를 유진교에게 돌려주었다.
통쾌했던 모양인지 곽대출이 어깨를 으쓱하고 있었다.
“정말 김상용 부사장을 해고할 생각입니까?”
“가짜로 해고하는 방법도 있습니까?”
유진교가 웃는 것은 처음 보았다.
시원하게 웃은 것이 아니라 기가 막혀서 나온 웃음이었지만 말이다.
“김상용은 등기이사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야비하게 나오면 야비하게, 힘으로 하겠다고 머리를 디밀면 목을 부러트려서라도 제 방식으로 갑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회사와 직원을 위한 고집이라면 오케이입니다.”
천중명은 생각했던 바를 있는 그대로 유진교에게 전했다.
“오해하시는 게 있는데 제가 후계자 싸움에 목을 걸었다고 여기시면 곤란합니다.”
“그럼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기회가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바로잡으려고요.”
유진교는 말귀를 못 알아먹은 눈치였다.
“몇 조씩 되는 유보금 쌓아두고 황제놀이하는 거랑 냉동창고 차지하고 산적두목 노릇 하는 게 다른 게 있습니까?”
천중명은 여전히 대꾸가 없는 유진교를 보며 먼저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 설치다가 총수님의 눈 밖에 나면 그걸로 끝나겠죠. 그럼 내 회사를 차릴 겁니다. 그럴 힘이 생길 때까지 고개 숙이는 게 어떠냐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곽대출은 의자에서 몸을 들썩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물론 자른다고 쉽게 물러날 마음도 없으니까요.”
고속도로 입구에 들어선 승용차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나만 답해 주시죠. 김상용 부사장이 믿는 게 총수님입니까?”
입술에 힘을 주었던 유진교가 한숨과 함께 “그렇지는 않습니다.”하고 답을 꺼내놓았다.
**
김상용은 심통이 잔뜩 오른 얼굴로 천상기의 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회장님. 지금 막 다녀갔습니다.”
- 누가?
“천중명 대표 말입니다.”
천상기의 반응을 듣고 난 김상용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 그걸 왜 나한테 말하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야?
“그게…. 회장님께서 처음부터 기를 잡으라고….”
- 아, 이 양반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공장 주차장에서 바로 돌아갔습니다.”
- 뭐?
확실히 잘못됐다.
김상용은 갑자기 목이 말랐다.
“유 전무님께 전화해서 바꿔달라고 했더니 절 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제 라인을 전부 해고할 거라고….”
- 당신은 무슨 일을 그따위로 처리해!
김상용의 짐작을 확신시켜주듯 날카로운 반응이 쨍하고 터져 나왔다.
- 기를 꺾으랬다고 지시했다 칩시다! 주차장에서 돌아가게 한 게 잘했다는 거야? 당신 혹시 마중도 안 나간 거야? 그래?
김상용은 대꾸도 못 했다.
- 그래서? 전화했더니 돌아와서 둘러보고 갔어?
“워낙 막무가내여서….”
- 흐휴!
깊은 숨소리가 김상용의 미래를 증명하듯 나왔다.
- 알았으니까 전화 끊어.
“예, 회장님. 그럼 저는….”
뚝!
말을 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뭐야, 이 씨…. 이거 잘못하다가 나만 중간에서 터지는 거 아냐?”
김상용은 당황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
짜증이 올라온 얼굴로 천상기가 전화기를 내려놓은 직후였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우우우웅.
천상기의 전화기가 울었다.
“이 새끼….”
액정에 천중명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피하자니 더럽고 받자니 껄끄럽고.
인상을 찌푸렸던 천상기는 결심한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납니다.
천상기는 이를 꽉 깨물었다.
- 김상용 부사장을 해고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그걸 왜 네가 정해?”
- 대표이사니까요.
“야. 적당히 해. 사람이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일주일만 참으면 된다.
천봉서를 먼저 날리고 나면 그 일을 계기로 그룹 기획실을 단숨에 쓸어 버릴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천호득은 양팔이 부러진 꼴이라 천중명을 잡아주지 못한다.
천상기가 올라오는 분노를 억지로 누를 때였다.
- 그러지 말고 김상용은 해고합시다.
또다시 존경심이나 예절 따위 상추와 깻잎에 싸 먹은 듯한 천중명의 요구가 건너왔다.
- 자금 지원하려면 이사회 승인도 있어야 할 텐데 한 번에 해치우면 되죠.
“그 이사회와 이 이사회가 같은 줄 알아?”
- 거 참, 말 많네.
“뭐?”
- 어차피 요구했던 두 가지를 다 들어준 것도 아니고. 원하면 그냥 붙읍시다. 이번 일로 큰형님을 내 편으로 만들면 나야 더 이득이지. 그깟 200억과 김상용 해고쯤 단숨에 해결될 테고.
“정직원 전환 문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 그건 일방적인 통보였지요. 내가 인정한다고 답을 한 것도 아니고.
숨을 들이켠 천상기는 갑자기 쏟아지는 급한 볼일을 참아내는 사람처럼 오른손 주먹을 꽉 쥔 채 인상을 우그러트렸다.
- 빨리 결정하세요. 고속도로 빠져나가면 방향을 정해야 하니까요.
“알았다.”
- 해고 통보와 200억 지급은 오늘 중으로 연락이 왔으면 싶습니다.
“끄응.”
- 수고하세요. 건강 챙기시며 일하시고.
통화가 끝났다.
콰앙! 쾅! 쾅! 쾅!
분노를 이기지 못한 천상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상을 두들겨댔다.
“두고 봐. 윤 실장하고 네놈만큼은 내가 반드시 눈알을 파 줄 테니까. 그때는 어떤 조건을 내세우는지 보자.”
천상기의 섬뜩한 다짐이 그의 책상을 타고 흘러내렸다.
**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중명이 변화된 모습을 보이면서 기억에 있던 1년의 모습이 자꾸만 뒤틀리고 있었다.
몸이 바뀌기 전에는 김상용이 계속 냉동창고를 유지했었는데 오늘 일로 그는 해고당하게 생겼다.
어떻게 될까?
그가 해고되면서 기억에 있는 1년의 모습이 바뀔까, 아니면 어떤 이유로든 김상용이 계속 냉동창고의 부사장으로 있을까?
날씨는 연속해서 화창했다.
화려한 오전의 햇살을 느끼며 천중명은 지금은 지닌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천호득의 말 한마디면 냉동창고에서 밀려나는 것이 김상용이 아니라 천중명이 될 테니까 말이다.
‘재미는 있네.’
이러다가 회사에서 잘리면?
통장에 아직 30억이 넘는 현금이 있는데 무서울 게 또 뭐가 있겠나.
게다가 앞으로 1년 동안 어떤 사업이 유망한지, 어떤 정책이 나올지를 대강 짐작하는 이점도 있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천중명의 생각을 자르며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기다리던 윤만석의 전화였다.
손도운이란 사람의 자료를 어디까지 구했을까?
“여보세요?”
천중명은 기대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