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031. 열심히들 사셔 (2)
유진교는 마치 손가락을 대고 있다가 8시 정각에 누른 사람처럼 벨을 울렸다.
곽대출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알려준 사실이 더 놀라웠다.
차가 멈추고, 운전석에서 내린 유진교가 벨을 눌렀는데 그게 정확하게 8시였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무섭다, 이런 사람은.
“바로 내려갈게요.”
정문을 열어준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내가 혹시 조직 만들면 무조건 저 양반 뒷조사부터 한번 한다, 진짜!”
웃기는 했는데 솔직히 천중명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말이다.
셋이 인사한 뒤에, 천중명의 독일산 승용차에 함께 타서 이천의 공장으로 출발했다.
“곽 부장. 피곤하겠지만 앞으로 대표님 차는 가능한 한 세차를 한 뒤에 움직일 수 있도록 신경 쓰세요.”
“예, 전무님.”
잠실 종합 운동장을 끼고 올림픽 도로를 들어설 때 유진교가 나직하게 조언을 건넸다.
“대표님. 이전과 달리 전면에 나서는 상황입니다. 업무를 보실 때는 국산 대형차를 이용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라면 밴이나 고급 승합차를 알아보셔도 좋습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나요?”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지금까지는 관심 밖이어서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전 직원 정규직 전환 건이 소문나면 바로 언론의 표적이 됩니다.”
날카로운 체형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묵직한 조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잘 될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기면 하다못해 자동차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언론이고, 세간의 인심입니다.”
“고민해 보죠.”
천중명의 답을 들은 유진교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곽 부장을 통해 윤 실장과 같은 조직을 하나 만드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런 다음에 곽대출의 뒤통수가 뜨듯해질 정도로 뜨끔한 제안을 꺼냈다.
“어차피 통합 사무실을 운영할 계획이고, 어제 둘째 형님을 흔든 일도 있으니 싸움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얼마나 정보를 제대로 지녔는지가 중요합니다.”
말하던 도중에 생각난 것처럼 유진교는 가죽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냉동창고에 관한 기본 자료입니다. 물론, 대표님이 지경화장품의 경우처럼 사전에 숙지하셨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난 것을 모르는 유진교는 천중명이 미리 공부한 것으로 짐작하는 눈치였다.
“곽 부장의 출신이 흥미롭던데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내내 잽을 날리던 유진교가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리는 듯한 느낌의 질문이 이어졌다.
“성창욱이라고 학생을 한 명 소개받았거든요. 그 친구를 집에서 면접했는데 그때 곽 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행하게 성창욱은 열쇠를 훔쳐서 저축은행에 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구요.”
눈빛이 드러날 것이 염려했는지 곽대출은 앞을 뚫어지라 노려보며 운전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차피 형님들과 홀로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라 저 친구를 바로 찾아갔지요. 성창욱의 모친 장례까지 곽 부장의 요청에 의해 처리했었습니다.”
“그렇군요.”
임기응변이긴 하지만, 나름 그럴듯했다.
천중명이 만족한 숨을 내쉬려는 순간이었다.
“곽 부장은 성창욱이란 학생을 어떻게 알게 되었지?”
요건 어때? 하는 느낌으로 유진교가 곽대출의 뒤통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군 동기였습니다.”
“자네는 해군특작부대 출신 아닌가? UDU라고 하지?”
“그렇습니다. 성창욱도 그곳 출신이었습니다.”
이 양반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이러나 싶을 정도의 질문이 수제비 뜨는 사람처럼 툭툭 나오고 있었다.
“말을 하다 보니 궁금해서 그런데 그곳에서는 서로를 도깨비라 부른다던데? 제대한 뒤에 서로 연락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고? 곽 부장은 어떻게 성창욱이란 학생과 연락이 됐었나?”
연달아 나온 질문에도 곽대출은 태연했다.
“그 친구가 제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는 따로 연락했었습니다.”
“그랬군.”
유진교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받아들였다.
빠르게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천중명은 서류를 살폈고, 유진교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무언가를 검색했다.
묵직한 침묵이 깔린 승용차 안에서 천중명은 잠시 시선을 빠르게 흘러가는 창밖으로 돌렸다.
왜 갑자기 뜻밖의 질문을 던졌지?
뒤를 캐고 다녔다는 뜻인가?
천중명의 뇌리에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곽 부장. 앞으로 대표님이 노출될수록 곽 부장 역시 함께 추적의 대상이 돼. 그러니 당분간은 특히 행동에 주의할 필요가 있어. 혹여나 불쾌한 모습이 보이더라도 함부로 폭력을 사용하는 건 특히 금물이고.”
“명심하겠습니다, 전무님.”
천중명의 의문을 알아차린 듯 나온 조언이었다.
너희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내가 질문한 것들에 대해 빈틈은 없는지를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
조금 전 유진교의 조언이 천중명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
천봉서는 피곤한 기색으로 아침 일찍 찾아온 천상기를 맞았다.
“건강이 안 좋으십니까?”
“괜찮아. 앉아.”
책상에서 일어난 천봉서가 소파의 상석으로 다가왔다.
최근에 만나기 시작한 병아리 연예인의 집에서 출근한 길이라, 여직원이 차를 가져올 때까지 천봉서는 두 차례나 하품을 쏟아냈다.
“무슨 일이야?”
“어제 막내 놈이 화장품과 지경디자인, 냉동창고의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피곤하던 두꺼비가 눈앞에서 파리를 발견한 것처럼 천봉서의 표정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회장님과 저의 약점을 잡고서 신제품 개발 자금을 지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천상기의 보고를 천봉서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약점이라니…?”
천중명이 이토록 천봉서와 천상기에게 이를 드러내는 이유와 원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께서 어젯밤에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다고….”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감히 누굴 협박해! 감히!”
파리로 알고 삼켰는데 사실은 벌이어서 혓바닥을 쏘인 것처럼 천봉서는 쨍하는 분통을 터트렸다.
“더러운 놈이 감히 내게 목욕값을 줘?”
“예?”
“모욕감! 모욕감을 줬다고!”
천봉서의 분노를 받은 천상기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다.
왜 혀가 꼬일 정도로 천봉서가 흥분하는지를 말이다.
그는 지금 만나는 여자아이에 푹 빠져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전세로 살던 집을 아예 사주었고, 최고급 독일제 승용차를 안겨주었으며, 일주일이면 두 번 이상 그곳에서 자고 나왔다.
이대로 두었다면 천봉서는 분명 아이를 낳을 게 분명했다.
잠시 씩씩대던 천봉서가 매서운 눈초리로 천상기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그 미친놈이 잡았다는 너의 약점은 또 뭐냐?”
“회장님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며 협박했었습니다.”
“뭣이?”
이번에야 천봉서는 제대로 놀란 얼굴이었다.
“사실은 그 일을 의논하느라 어제 이사장님을 따로 만났었습니다.”
“그래서 만났었구나.”
천상기는 등골이 서늘했다.
두꺼비 천봉서답게 그 역시 강승애와 천상기의 뒤를 계속 살폈던 모양이었다.
“회장님을 방해하지 않으려 이사장님을 먼저 뵈었습니다. 다행히 이사장님께서 우선 힘을 써주기로 하셨습니다.”
천봉서는 시선만 주었다.
“우선 이사장님의 친정 쪽에서 제가 운영하는 저축은행으로 200억을 돌려서 지원하고, 막내 놈이 국세청과 언론에 제기할지 모를 민원을 막는 일 역시 돕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흠.”
천봉서는 한쪽으로 쏠린 넥타이를 천천히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내가 막내를 만나볼까?”
“회장님. 테러리스트나 납치범과는 협상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자칫 막내 놈이 녹음이라도 하는 날이면 뒤가 더 복잡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다시 무언가를 계산하는 천봉서의 앞에서 천상기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기 위해 조심스럽게 숨을 뱉어냈다.
뒤를 쫓고 있는 줄 몰랐다.
혹시 천봉서는 이미 상황을 대강 알아챈 상태에서 천상기를 떠보는 것은 아닐까.
불을 껐었는데?
아래에서 창을 본 직원이 그 사실을 보고했다면 어쩌지?
쿵쿵쿵쿵. 쿵쿵쿵쿵.
길어지는 침묵만큼이나 천상기의 심장이 요란스럽게 뛸 때였다.
“그래서 방법은?”
침묵의 꼬리를 잡아챈 천봉서의 질문이 있었다.
“우선 이사장님의 의견대로 200억을 지원한 뒤에 상황을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정규직 전환의 경우에는 총수님의 반응을 기다릴 필요도 있습니다.”
“얼마나 기다려볼 생각이냐?”
“지금 보기에는 대략 일주일이면 되겠지 싶습니다. 안 되면 그 안에라도 제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겠습니다.”
입맛을 다신 천봉서가 소파의 팔걸이를 매만질 때였다.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그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어? 잠시만?”
이름을 확인한 천봉서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책상 뒤편의 창으로 움직였다.
“여보세요? 그래, 나는 괜찮다. 너는 어떤 거야? 왜 일어나서 그래?”
새로 들여앉힌 병아리인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음성과 대화 내용이 그랬다.
“지금?”
천봉서가 고개를 돌려 천상기를 바라보았다.
“허허. 알았다. 내가 급한 일만 처리하고 들르마.”
애교에 푹 빠진 듯 천봉서는 넋이 풀린 얼굴로 답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크흠!”
그런 다음 다시 근엄한 표정을 찾는 데 필요한 헛기침을 쏟아냈다.
“일주일이면 되겠냐?”
“예. 그 정도면 제가 충분히 감당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일주일은 지켜보마.”
답을 건넨 천봉서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봐. 나는 회의가 연속해서 있어서.”
“예, 그럼 회장님. 저는 이만 돌아가 있겠습니다.”
인사하는 천상기를 천봉서는 손짓으로 대했다.
그 바람에 그는 문을 나서는 천상기의 표정은커녕 뒷모습조차 제대로 보질 못했다.
**
기억에 있는 1년 동안, 냉동창고 역시 한 달에 두 번쯤은 꼭꼭 들렸던 곳이었다.
확실히 냉동창고는 지경화장품과는 회사 분위기가 또 달라서 좀 더 거칠고 투박한 느낌이었다.
취급하는 품목이나 업무환경이 남자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영하 20도는 그저 기본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창고에는 주로 수입 육류나 수산물을 채워 넣었다.
지경그룹에서 사용하는 식자재가 우선 들어왔는데 식품 회사의 매출이 신통치 않은 만큼 냉동창고의 매출도 별로 좋지 않았다.
서류를 보던 천중명은 부사장이자 공장장인 김상용을 떠올렸다. 그는 한 마디로 나이 먹은 곽대출을 상상하면 딱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거친 인상에 괄괄한 입을 가지고 있었고, 로열패밀리인 천중명을 묘하게 무시하는 성향도 있었다.
술 더럽게 좋아하고, 뒷돈을 챙기는 버릇도 지녔다.
‘분명 뭔가 있는데?’
그가 왜 그리 천중명에게 안하무인인지, 무얼 믿고 그따위로 함부로 대하는지에 관해서 들은 것은 없었다.
‘이 인간을 어떻게 때려잡지?’
그러고 보면 만만한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지랄, 염병을 떨어대던 이전의 천중명도 강한 이들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고개를 숙였었다.
이럴 때 세상이 캄캄하게 변하면서 김상용의 아픈 곳이 딱 떠오르면 얼마나 좋을까?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자료에서 시선을 든 천중명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천 시내의 국도를 달리고 있어서 밥집 간판이 여기저기 꽤 붙어있었다.
언제 시간 나면 허선영하고 저런 곳에서 밥 먹고 싶다.
돌솥에서 윤기 흐르는 쌀밥을 퍼낸 다음, 하나는 물을 부어두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긁어서 누룽지로 먹어도 좋은데.
잘 지내고 있을까?
한숨을 푹 내쉴 때 커다랗게 커브를 그려낸 승용차가 샛길로 빠졌다.
지경 냉동창고라는 동글동글한 형태의 글씨를 단 커다란 창고 건물 정면에 있었다.
“오늘도 놀랄 만한 발표가 있습니까?”
목적지를 확인한 유진교가 농담처럼 건넨 질문이었다.
“부사장을 해고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부사장이라면 김상용 공장장 말입니까?”
“예. 이유를 물어봐도 되냐고 질문할 참이셨죠?”
허를 찔린 유진교가 입을 다문 채 시선만 주고 있었다.
“그 양반이 어쩐지 우호적이지 않을 것 같아서요.”
“뭔가를 하실 것 같기는 했는데 설마 김상용 공장장을 해고할 생각인 줄은 몰랐습니다.”
뭔가가 있구나!
지금의 천중명은 모르는 사연이.
천중명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 옆을 스치는 냉동창고의 경비실을 바라보았다.
김상용에게 숨겨진 내막이 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나아가는 선택만 할 뿐이다.
곽대출이 세운 차에서 내린 천중명을 한쪽에 높다랗게 쌓인 빈 팔레트가 가장 먼저 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