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030. 열심히들 사셔 (1)
곽대출의 눈치가 빛을 발했다.
“안녕하십니까? 지경화장품의 부장 곽대출입니다.”
상황을 눈치챈 곽대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까지 숙이며 다가온 남자에게 인사했다.
“아! 화서투자증권의 조기대입니다. 잠시만요.”
남자가 뒤쪽 테이블의 재킷에서 명함을 가져오는 사이 곽대출이 빠르게 시선을 던져주었다.
‘들었지? 적당히 상대해.’
‘고맙다.’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온 조기대를 맞았다.
“몸살 약을 먹었더니 멍했어요.”
“난 천 대표가 나를 상대하기 싫은 줄 알았잖아. 잠시만. 곽 부장이라고 하셨죠? 여기 명함입니다.”
곽대출이 얼른 받은 명함을 확인했다.
“상무님. 저는 아직 명함이 안 나와서 나오는 대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식사하던 중에 천 대표 보고 왔던 거니까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봅시다. 식사 맛있게 해, 천 대표.”
조기대가 자리로 돌아가자 기다리던 여직원이 숯불에 양과 곱창을 올려주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식탁에서 천중명과 곽대출은 잠자코 샐러드와 밑반찬을 먹었다.
“다 됐습니다. 드셔도 됩니다. 술은 안 하세요?”
“오늘은 다른 약속이 또 있어서요.”
“네, 맛있게 드세요.”
여직원이 테이블에서 멀어지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잦을 텐데 쉽지 않겠습니다.”
“그러게. 당분간 밥은 외곽으로 나가서 먹어야 할까 보다.”
“얼른 드십시오.”
주변을 의식한 듯 곽대출은 깍듯한 태도였다.
옷이 날개라더니 인상 더러운 곽대출이 셔츠에 정장 차림을 하자 날카롭고 강단 있어 보였다.
“왜?”
고개를 불판으로 기울인 곽대출이 천중명의 시선을 의식한 듯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고,
“정장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렇다.”
천중명이 솔직하게 답을 건넸으며,
“곱창 같은 소리 마시고 양이나 양껏 드십시오.”
속삭이듯 곽대출이 양양거렸다.
먹는 거 양보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조기대에 상관없이 추가 주문까지 해서 양과 곱창을 먹었다.
“천 대표. 우리 쪽은 식사가 끝나서 먼저 일어날게. 나중에 연락 한번 줘.”
중간에 조기대가 식당을 나선 뒤에는 양밥까지 주문해 여직원을 놀라게 했고, 후식으로 나온 팥빙수까지 다 먹어치운 뒤에야 둘이서 빌라로 돌아왔다.
정장을 벗어 던지고 편안한 차림으로 봉지커피에 담배를 앞에 놓자 살 것 같았다.
“후우.”
길었던 하루가 연기를 타고 환풍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곽대출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누군가와 통화에 집중하는 사이에 천중명은 홈바에서 손도운의 사업계획서를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손도운의 제안이 선명하게 천중명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이럴 수 있을까? 화장품이?
바른 후 36시간이 지나면 눈가와 볼 주름이 싹 없어지는 효과가 있단다. 이런 효과가 있다면 안 팔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제안서에 눈과 코 주변을 찍은 그놈의 비포, 애프터 사진을 들여다보며 천중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커피 한 잔 더 할 건데 어떠셔?”
“물 좀 팔팔 끓여!”
“자판기에서 내려주는 물 온도가 봉지 커피에는 가장 적합한 거라니까! 대표님은 봉지 커피의 참맛을 몰라!”
전기 포트에 물을 부은 곽대출이 봉지 커피를 꺼냈다.
“사업계획서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진정 사업가 같으십니다.”
“지랄한다.”
“흐흐흐흐.”
웃음을 흘리며 곽대출이 커피를 앞에 놓아주었다.
“뭐라는 거야?”
“담수 해면체라고 관절염 치료제였는데 그게 치약 구조처럼 생겨 먹어서 얼굴에 바르면 피부를 재생한단다.”
“아후, 어지러워. 듣는 것만 해도 골이 지끈거립니다!”
“그 성분을 이용한 박테리아를 24시간 동안 피부에서 살아있게 해서 피부를 재생한다는 건데, 여기 이 기계 사진 보이지? 이걸 이용하면 1시간 만에 눈에 띄는 효과가 나온다네.”
곽대출이 고개를 돌려 레이저 시술기기 같이 생긴 기계를 들여다보았다.
“그걸 일반인이 살 수 있겠어?”
“화장품 매장에 비치하자는 거지. 제품을 문의하는 고객에게 한번은 무료, 다음에는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데 의료기기가 아니라서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다는 거지.”
사업이란 참 오묘하다.
화장품이라고는 스킨, 로션도 귀찮아하던 두 남자가 느닷없이 바이칼 호수에서나 난다는 담수 해면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지는 해봐야 알지 않을까? 대표님아?”
“그렇겠지.”
천중명이 답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전에 함께 뛰던 도깨비 놈과 연락했거든. 그 해결사 사장 새끼 연결해 준 놈.”
곽대출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대표님도 알지? 장만섭이.”
“악어? 악어 장만섭 말이야?”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끼, 나한테 뒈질 뻔했었는데 그때도 목을 깨물려고 들어서 이빨을 부러트리는 거로 끝났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하여간 장만섭이가 흥신소도 했어요.”
아직도 이만 부러트린 게 아쉽다는 얼굴로 곽대출이 말을 이었다.
“일단 내가 엄청난 분을 모시게 됐는데 정보조직이 필요하다고 했어. 일할 생각이 있냐니까 무조건 오케이라고 달려들던데 어때?”
“믿을 수 있겠냐? 해결사 통해서 병원비까지 독촉하던 놈인데? 무엇보다 너한테 사장 놈 소개했던 것도 있고. 은퇴한 도깨비 철칙을 어긴 거잖아.”
천중명의 반응에 곽대출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잘못하면 우리 쪽 말이 새나갈 위험이 있잖아? 흥신소까지 했다면 애새끼가 돈맛이 들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좀 더 우선 고민해 보자.”
“그랴. 대표님 말을 들어보니까 그건 또 그러네.”
“서운한 거 아니지?”
기가 막힌 웃음을 날린 곽대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하고 옵니다, 대표님.”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말투와 표정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중명은 남은 제안서를 마저 보았다.
제안서대로라면 돈이 없어서 못 사면 모를까, 이걸 마다할 사람은 없겠지 싶었다.
이런 제품을 두고 시쳇말로 누가 보톡스를 맞으러 병원에 가겠나.
내일에라도 만나보고 일단 화장품과 이 스킨 서큘레이터라는 기계를 직접 시험해 보면 알 일이었다.
그사이 씻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천봉서와 천상기는 대책을 세우느라 잠을 잊을 테고, 천호득은 유진교와 윤만석의 보고를 듣느라 눈을 빛내고 있을 거다.
열심히들 사셔.
야비하게 달려들수록 이쪽도 야비해질 거고, 힘을 쓰려고 들면 눈알을 하나씩 파 줄 테니까.
천중명은 픽 웃으며 제안서를 보았다.
곽대출이 왜 천중명에게만큼은 고개를 숙였는지 알게 되었을 때 저들의 표정이 궁금해서였다.
제안서의 가장 뒷면에서 두꺼비 같은 천봉서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허선영의 얼굴로 바뀌어 간질거렸다.
희한하다.
천봉서의 넙데데한 얼굴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데 불과 두 시간 전에 보았던 허선영의 얼굴이 가물가물한 것은.
왜 이렇게 한 방에 훅 넘어가서 마음을 쓰는 거지?
그냥 계산적으로 대하면 되는 거잖아?
오빠가 지랄하고, 아버지가 그걸 묵인하는 집에 계속 있겠다는 걸 어떻게 하겠냐고?
한숨을 길게 내쉰 천중명은 씻기 위해 샤워실로 향했다.
아차!
오지은이 연락 달라고 했었는데?
휴대전화기를 보았던 천중명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면 알아듣고 떨어지겠지.
샤워실의 앞에서 천중명은 시원하게 옷을 벗어 던졌다.
씻고 난 천중명은 홈바로 향했다.
역시나 곽대출이 머리가 반쯤 젖은 채로 수건을 목덜미에 걸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씻고 난 뒤에 피워주는 담배 맛을 아는 동료와 함께라니.
“흐흐흐흐.”
눈과 눈이 마주치자 곽대출이 마음을 읽은 사람처럼 기분 좋게 웃었고, 둘이서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기분 좋게 빨아들였다.
**
오지은은 파랗게 독이 오른 눈으로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고급 호텔 바였다.
테이블과 바에 놓인 기름불이 분위기를 살렸고, 그 사이를 피아노 연주가 뛰어다녔다.
“이럴 순 없어!”
“네?”
“뭐예요! 왜요? 뭐?”
“죄송합니다. 주문하신 줄 알았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나이 있는 바텐더가 능숙하게 오지은을 달래고는 옆으로 움직였다.
“이봐요! 잔 빈 것 안 보여요?”
“같은 거로 준비해 드릴까요?”
“그럼 내가 다른 거 달라고 하겠어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술 취한 개, 아니 오지은을 상대로 바텐더는 태연한 태도와 표정으로 술을 따랐다.
“허선영? 흥!”
오지은은 바의 정면에 진열된 술병이 허선영이라도 된다는 양, 매섭게 노려보았다.
집안에서 엮는 거 인정한다.
분명 천중명도 그런 의미에서 형식적으로 만나는 거라고 했었고, 심지어 허선영에게 오지은과의 만남을 인정받았다고도 했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연락이 없고, 심지어 전화와 문자까지 씹어대느냐 말이다.
“두고 봐.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
씹듯이 말을 뱉은 오지은이 다시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
변함없이 아침이 밝았다.
푹 자고 일어난 천중명을 맞은 것은 칼칼한 라면 냄새였다.
“뭐냐?”
“어? 일어나셨어?
곽대출이 주방에서 천중명을 돌아보고는 양손으로 냄비의 끝을 잡아 홈바에 올려놓았다.
“먹고 씻지? 대표님?”
“내일은 내가 준비할 테니까 네가 더 자.”
“나도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지. 자꾸 그러면 놈팡이 되는 거 같아서 싫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걸 또 뭐라고 하겠나.
하여간 냄새는 죽여줘서 천중명은 얼른 젓가락을 들었다.
“그나저나 대표님. 이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오늘 오후 1시에 김순례 씨가 올 거야. 일찍 올 수 있는지 알아볼까? 앞으로는 밥을 먹을 테니까 준비해 달라고 하고.”
“그럼 이전의 천중명은 밥도 안 처먹었나?”
뜨거운 면발을 건져서 양보 없이 넣어가며 주고받은 대화였다.
삽시간에 라면 4개와 즉석밥 두 개가 사라졌다.
“저리 가!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곽대출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낸 천중명은 싱크대에 달라붙었다.
“그럼 내가 대표님을 위해 커피를 준비하지.”
“그냥 내가 할 테니까 놔둬.”
몸으로 곽대출을 막으려 애써 봤으나 손에 거품이 올라온 천중명은 이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설거지가 끝났을 때는 예의 덜 끓은 물로 완성한 봉지 커피가 홈바에 놓여 있었다.
“대표님의 오늘 스케줄은?”
“이천 냉동창고 방문. 200억을 지경화장품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방법 연구, 서울에 우리가 있을 통합 사무실 알아보는 일.”
“알겠습니다.”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대출아. 어제 말한 장만섭이. 네가 알아서 조직 만드는 건 어때? 알고 싶은 게 생기면 네가 직접 장만섭이 데리고 뛰면 되잖아?”
“장만섭이가 반나절만 확인하면 바로 대표님이 나올 텐데 괜찮을까?”
“윤 실장에게 계속 일을 부탁하면 모두 왕회장에게 들어간다. 그러니 일단 준비해 봐.”
잠시 고민하던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마시고, 나는 장만섭이한테 전화해 볼게.”
“아직 너무 이르지 않냐? 이제 7시 겨우 넘었다.”
“그런가?”
커피를 앞에 두자 자연스럽게 담배가 아쉬웠다.
“요 인간들이 오늘은 뭔가 들고 나올 텐데?”
“누구?”
담배에 불을 붙인 뒤에 천중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천봉서하고, 천상기, 그리고 지경갤러리 강승애.”
“그렇지? 그 인간들이 그냥 있을 리는 없지?”
곽대출이 대꾸한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소파의 테이블에서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참 부지런들도 하다.”
곽대출이 얼른 전화기를 가져다주었다.
“여보세요?”
- 유진교입니다. 일어나 계셨습니까?
“예. 무슨 일이죠?”
- 냉동창고 방문 건으로 전화 드렸습니다. 8시에 출발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이 양반이 경영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사람을 개조하려고 드나?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내려서 시간을 확인했다.
40분쯤 남아서 준비하는데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시죠. 8시에 어디서 뵐까요?”
-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어제처럼 이동하시면 되겠습니다.
“예. 그럼 8시에 뵙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지금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서둘러야겠네!”
“그러자.”
워낙 시간이 칼인 사람이라 어쩐지 마음이 좀 더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