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9화 (29/315)

# 29

029. 일단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3)

햇살이 담벼락 너머로 사라진 다음이었다.

어둠이 빠르게 주변을 덮었고, 그 뒤에 숨어있던 차가운 기운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밥 먹으러 갑시다.”

“괜찮아요.”

천중명은 답답한 심정에 고개를 정원으로 돌렸다.

재미를 봤던 놈은 벌써 죽어 없어진 거라고, 그래서 오지은과의 관계는 억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긴, 그런 걸 털어놔 봐야 개망나니로 살던 과거를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변명하는 거로 생각하기 딱 좋았다.

“오늘 약속은 미안해요. 다음번에는 꼭 함께 갈게요.”

“그깟 모임, 괜찮다니까.”

허선영이 반쯤 돌린 시선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눈이 부은 데다, 건물에서 달려온 불빛이 들춰내는 멍을 마스크로 가려서 성형수술을 받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혹시 오빠란 인간이 때린 건가 하고 달려왔던 건데…. 하여간 얼굴 봤으니까 갑니다.”

“말 놓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편한 대로 할게.”

“왜 이렇게 종잡기가 어려워요?”

질문이 절묘해서 천중명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느닷없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천중명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밤에 혹시 못 견디겠으면 전화하거나 빌라로 와. 곽대출이라고 함께 지내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방이 여러 개라 그리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화장실도 딸려 있고.”

뻑뻑한 분위기라 더 있어 봐야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간다.”

“30억이요.”

일어서려는 천중명을 허선영이 붙들었다.

“외가에서 사업을 하느라 빌린 돈이었어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운영하는 회사였는데 제대로 망했어요.”

어떻게 하면 제대로 망하는 건지, 얌전한 얼굴에서 나온 표현이 재미있어서 천중명은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교도소에 들어가야 하는 외삼촌을 아버지가 구해줬어요. 그 뒤로 30억을 갚으면 엄마와 나를 놓아주기로 했고요.”

“그럼 어머니도 여기 계셔?”

“엄마가 알려지면 아버지에게 치명적이죠. 나는 태어나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엄마는 안성에 살아요. 내 꿈이었어요. 빚 갚고 엄마와 둘이서 외국 나가 마음 편하게 함께 사는 거요.”

뭔 이런 바보 같은 꿈이 다 있어?

그냥 나가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엄마를 이모라고 불렀어요. 몇 번 둘이서 나가려고 했었는데 아버지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어요. 검찰도, 경찰도, 하다못해 출입국 관리소에서도 아버지에게 통보했었으니까요.”

또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끔찍했어요. 일하는 아줌마가 가고 나면 오빠란 인간이 씻겨준다면서 몸을 만지곤 했었거든요. 중학교 가기 전까지요. 그때부터 밤에 문을 잠그고 잤고요.”

개새끼가 어린 애를!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누가?

천중명의 시선을 본 허선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오빠가요. 그 뒤에 진통제를 독하게 쓰면서 간혹 눈빛이 바뀌곤 했는데 오늘은….”

내내 잘 말하던 허선영이 털어놓은 것을 후회하는 표정으로 정면을 보았다.

“하아.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후련하다!”

눈물이 올라온 것을 감추려는 듯 허선영은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달려와 줘서요. 온다고 했을 때, 내 편이 생긴 것 같았어요.”

짙어지는 어둠을 배경으로 조명처럼 내려온 건물의 불빛이 벤치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당신을 정말 모르겠어요.

내가 의지해도 되나요?

갑작스러워서 두렵고, 이러다가 당신이 변할까 봐 무서워요.

천중명의 답을 바라는 것처럼 허선영의 커다란 눈이 간절하게 빛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자기야!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하는 거 아냐?]

하필이면 어두운 벤치 위에서 액정이 빛났고, 그 안에 뜬 오지은의 이름과 문자 내용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들어갈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실망을 삼킨 허선영이 바로 빌라 입구로 움직였다.

뭐, 이런 문자 하나로?

오지은에게 연락 안 하면 되는 거 아냐!

정원을 가로지른 허선영이 자동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

유진교와 함께 저녁을 먹고 난 천호득은 밥이 아니라 자양강장제를 퍼먹었나 싶을 정도로 활력 넘치는 얼굴이었다.

“2층 거실에 있을 테니까 차를 그리 준비해 줘.”

“네, 회장님.”

두 사람이 2층 거실로 올라가기 무섭게 천호득이 좋아하는 홍차를 메이드가 가져다주었다.

메이드가 사라진 다음이었다.

“그래? 오늘은 어땠나?”

저녁 식사 내내 참았던 질문을 천호득이 던졌다.

20분쯤 걸렸다.

오늘 있었던 일을 유진교가 대략이나마 전하는데 말이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천호득은, “허!”하는 감탄사와, “그래서?” 하는 따위의 독촉을 연달아 쏟아냈다.

그렇게 유진교의 보고가 끝났다.

“고얀 놈. 감히 첫날부터 그룹의 방침에 반기를 들어? 이놈이 귀엽다, 귀엽다 하니까 요강을 닦아서 찬장에 넣는 게 아닌가.”

흥분과 꾸며낸 노여움이 적절하게 섞인 천호득의 반응이 2층 거실에 피어났다.

“헤어지기 직전에 갑자기 왜 변한 모습을 보이는지 물어봤었습니다. 그동안의 모습과 오늘이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녀석이 뭐라고 하던가?”

“자고 일어난 뒤에 갑자기 깨달았다고 답했습니다. 그동안 잘못 살았다는 것과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끝이 너무 비참하고 서글프지 않을까 싶어서 변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미친놈!”

천호득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웃음이 묻어 나오느라 그런 모양이었다.

“사람을 이렇게 궁금하게 만들다니! 내막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느냔 말이야. 마법의 거울이나 구슬 같은 것이 있었으면 싶을 정도야. 이 두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싶어서.”

“젊은 시절의 총수님을 다시 뵙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앞뒤가 없었나?”

“상황 판단이나 목표를 위해 나가는 모습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전해준 자료에도 없는 내용을 꿰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천호득은 유진교의 말에 흠뻑 빠진 얼굴이었다.

“임원들의 성향에 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을 단숨에 설득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마치 몇 번쯤 만나본 경험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걸 알려줄 사람이 있었나?”

“어쩌면 본능으로 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흐음. 본능이라…?”

“총수님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허허! 나쁘지 않군.”

엄지와 검지를 비벼대던 천호득이 거실 밖의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갑한 얼굴이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천중명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누르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정직원으로 전환한다는 거 말이야?”

“일단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잘못되면 이번 일로 녀석이 끝날 수 있어. 그룹의 방침에 반기를 든 꼴이니까. 내가 공식적으로 막아주기도 어렵고. 그래도 지켜보자는 건가?”

“화장품과 냉동창고는 어차피 현상유지 수준입니다. 필요하다면 매각도 가능하고, 정 안되면 사업장 폐쇄와 더불어 사업을 접어도 됩니다.”

의외의 대꾸라는 듯 천호득이 유진교를 날카롭게 보았다.

“그룹은 정의와 온정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자네에게 그런 말을 했었나?”

“좀 더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셨었습니다.”

“자넨 기억력이 너무 좋은 것이 단점일 때도 있어.”

천호득은 상한 과일을 베어 문 듯한 얼굴이었다.

“이 정도 고비를 못 넘길 능력이라면 셋째 아드님은 그 두 회사와 함께 물러서는 게 옳습니다.”

“더 지원해주지 말고?”

“야비하게 달려드는 상대는 야비하게, 거친 방법을 택한 상대에게는 거친 응징을 돌려주겠다고 했으니 지금은 능력을 지켜본 뒤에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천호득은 손을 들어 입가를 쓸어내렸다.

무언가를 고민할 때 그가 보여주는 특유의 모습이었는데 유진교는 10년 만에 보는 장면이었다.

퍼뜩!

그러던 천호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진교를 노려보았다.

“혹시 막내 녀석에게 마음을 뺏긴 건 아니겠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흥! 흐하하! 흐하하하!”

어쩐지 이전과 다르게 반쯤은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둘째의 약점은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을까? 이거야, 원!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고, 수수께끼로 철망을 두른 꼴이니 사람이 궁금해서 살 수가 있나.”

정원을 노려보던 천호득은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가는 꼴로 봐서는 개발비 200억이야 둘째 놈에게서 당겨갈 것 같고, 남은 것은 위에 두 놈을 어떻게 설득해서 정직원 전환 문제를 매듭짓느냐는 건데?”

“그룹 차원에서 묵인해 줘야 가능한 일입니다.”

“흠.”

200만 원쯤 한다는 순모 셔츠에 그보다 조금 저렴한 바지를 입은 천호득이 고민에 빠졌다.

“일단 자네 의견을 따르지. 그룹 기획실은 입장 표명을 보류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총수님.”

유진교가 무거운 얼굴과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을 꺼냈다.

천호득이 유진교의 의견을 따른다고 했다.

당연하게 그 뒤에 따르는 책임은 유진교의 몫이라는 의미였다.

**

허선영의 빌라에서 나온 천중명을 그새 익숙해진 승용차와 거친 인상의 곽대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와 있었어?”

“혹시 몰라서요.”

운전석에서 내린 곽대출이 뒷좌석 문을 향해 다가왔지만, 천중명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뭐해? 얼른 가자.”

아쉬운 얼굴로 곽대출이 운전석에 올랐고, 그 직후에 차가 출발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닭 쫓던 멍멍이 얼굴로 나오셨을까? 우리 대표님이?”

“그래 보여?”

“낮엔 감동 죽이더니만, 지금은 뽀뽀하려다가 딱 따귀 맞은 얼굴인데?”

말을 한 곽대출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배고프지 않냐? 대표님?”

“그래 먹자. 뭐 먹을래?”

“열심히 일한 하루니까 기름기 있는 양, 곱창 어때?”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천중명은 그러자고 답을 했다.

길이 막혀서 빨리 달릴 수는 없었다.

“우리도 조직이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윤 실장에게 의지할 것도 아니고?”

“대표님도 그 생각했구나?”

“경영이라는 것 역시 정보 싸움이겠구나 싶다. 누가 더 많이 아느냐에 따라 힘이 달라지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곽대출이 룸미러로 뒤를 힐끔 살폈다.

“오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앞차를 따라 차를 멈춘 곽대출이 핸들에 팔을 걸친 채 시선을 주었다.

“아까 200억은 해결해주겠다고 했거든. 직원 문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고. 지금쯤 머리가 아플 정도로 회의하느라 당장 누군가를 보내기는 어려울 거야.”

“그렇다면 내일부터는 조심할 필요가 있겠네?”

“아예 우리가 편안한 곳에 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달려들기 적당한 곳에.”

“오!”

기쁜 소식을 받아든 것처럼 곽대출이 탄성을 터트렸다.

“낮에 말이야. 직원들이 나와서 손 흔드는 앞을 지날 때는 뒤가 찌릿찌릿하더라고.”

함께 일한 첫날인지 곽대출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유 전무의 질문에 답하는 것도 그렇고. 대표님은 말이지, 재벌이라는 운명을 타고 난 게 아닌가 싶더라.”

도로의 흐름을 따라 차를 움직이면서도 곽대출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제까지는 언제고 신세 갚아야 할 동기여서 따랐다면, 직원 전부를 정직원으로 전환하겠다는 발표를 할 때는 이런 재벌이라면 목숨 걸고 따라야지 싶었어.”

“적당히 해, 이 꼴통아. 안 어울려.”

“흐흐흐.”

둘이서 킬킬거린 다음이었다.

목적지 입구에 들어서자 주차 담당 직원이 승용차로 다가왔다.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중년 여직원은 천중명과 곽대출을 창가의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유명한 식당답게 곱창 특유의 연기와 냄새, 손님들이 쏟아내는 소음 틈에서 주문을 마쳤고, 기다렸다는 듯 밑반찬들이 달려 나왔다.

“아! 배고프다!”

젓가락으로 천엽을 집은 곽대출이 입에 그걸 넣을 때였다.

“천 대표? 천 대표 맞지?”

정장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상체를 기울여 천중명을 들여다보았다.

볼이 불콰했고, 술 냄새를 풍기긴 했지만 과할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다.

“왜 모르는 사람 보듯 그래?”

천중명은 마흔 중반쯤으로 보이는 이 남자를 처음 봤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글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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