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028. 일단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2)
허선영이 사는 곳은 삼성동 사거리에서 영동대교 방향으로 있는 고급 빌라였다.
“전무님. 오늘 저녁 약속은 아무래도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십시오. 혼자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음번에 허선영 씨와 함께 가는 게 좋을 테니까요.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알아먹지 못할 질문을 던진 유진교가 천중명을 살폈다.
“솔직히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아침과 오후의 모습이 다르고, 지경화장품에서와 지금의 얼굴이 또 다릅니다. 임원을 압박하는 모습과 둘째 형님과 통화하는 모습이 다르더니 이제는 허선영 씨와 통화 후에 또 다릅니다.”
“대표님. 신호등 두 개 너머 저 앞의 빌라입니다.”
유진교의 말을 물고 들어온 것처럼 곽대출이 목적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전무님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십니까? 조직폭력배처럼 가둬놓고 두들길까요? 엄지 잘라다가 지장 찍고요?”
첫 번째 신호에 서 있던 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믿고 의지해주는 직원들이라면 내 가족처럼 챙기겠습니다. 대신, 야비하게 달려드는 상대는 야비하게, 거친 방법을 택한 상대에게는 거친 응징을 돌려줄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신음처럼 대꾸를 건넸던 유진교가 또다시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의 목표는 역시 지경그룹의 총수인 겁니까?”
“아니요.”
천중명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 목표는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잘 사는 회사를 만드는 겁니다. 그걸 위해서 필요하다면 총수도 할 거고, 깡패도 될 거고, 야비한 인간도 될 겁니다.”
솔직한 답이었다.
이전의 1년이란 세월 동안 개처럼 구는 천중명과 그 집안 식구들을 보며 느꼈던 점이었고, 오늘 직원들을 상대하며 확신했던 각오이기도 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 함께 잘 사는 회사라는 것이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두 번째 신호에 걸려있던 승용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서 허선영이 사는 빌라가 골목 안쪽에서 높다랗게 서 있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빌라를 향해 방향을 꺾도록 유진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침내 차가 멈춘 다음이었다.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인 이유를 여쭤 봐도 됩니까? 그동안 대표님이 보여주었던 모습과 오늘 말씀해 주신 목표가 너무 달라서 여쭤보는 겁니다.”
내리는 천중명의 어깨를 붙잡는 것처럼 정말이지 진지한 얼굴로 유진교가 오늘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자고 일어난 뒤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 정도로 깨달았다는 게 제 답입니다. 그동안 잘못 살았다는 것과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끝이 너무 비참하고 서글프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유진교는 대충 둘러댄 답이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갑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천중명은 그런 유진교를 두고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대표님! 전무님 내려드리고 이 앞에 와 있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집에서 쉬고 있어.”
마지막으로 곽대출에게 말을 건넨 천중명은 차에서 내려 빌라를 향해 걸었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우뚝 선 빌라였다.
작은 성의 정문처럼 나무에 쇠가 박힌 출입구가 있었고, 그 옆으로 차가 드나들 수 있는 철문이 따로 있는 구조였다.
벨을 누르기 위해 천중명이 빌라의 나무문 앞에 섰을 때였다.
소리 없이 옆으로 문이 밀려나더니 안쪽에 허선영이 서 있었다.
“정원이 있어서 바람도 쐴 겸 기다리고 있었어요.”
문을 바로 연 것에 대한 변명 같은 말이 건너왔다.
울음은 떨쳐낸 얼굴이었다.
마스크로 얼굴 아래를 가렸는데 눈두덩이 살짝 부어서 울었던 것을 증명해주었고, 왼쪽 눈 끝에 멍이 달려 있었다.
“들어가도 돼?”
“네. 정원에 벤치가 있어요.”
안으로 들어서자 자동차 열 대쯤 세우면 꽉 찰 크기의 둥근 정원이 있었고, 담장을 타고 벤치가 놓여 있었다.
나무와 꽃들에 가려져서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허선영은 왼쪽 얼굴을 가리려는 사람처럼 천중명의 왼쪽에서 걸었고, 벤치에서도 역시나 왼편에 앉았다.
“맞았어?”
허선영은 처음으로 사람의 손길을 느낀 고양이처럼 천중명의 시선을 피했다.
“바보같이 맞고 사냐?”
답은 없었다.
맞았다는 걸 감추지 못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구차하게 변명하기 싫어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저녁은?”
“괜찮아요.”
“그러고 집에 있으면 불편할 것 같은데 나랑 갈래?”
천중명을 보았던 허선영이 왼쪽 얼굴을 가리려는 것처럼 얼른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우리 집도 좋고, 아니면 호텔도 괜찮고. 오해하지 마. 원하는 곳에서 편하게 있으라는 거지, 함께 있자는 건 아니니까.”
“왜 이렇게 잘해줘요?”
“결혼할 사람이니까.”
눈 끝은 웃는데 신기하게도 허선영의 그런 눈에 눈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왜 난 중명 씨처럼 강하지 못할까요?”
“개망나니로 살았잖아. 이쪽 바닥에서 유명할 정도로. 그래서 강해 보이는 게 아닐까?”
“그렇게 살면 나도 강해질까요?”
엉뚱한 질문이어서 대꾸를 건네주지는 못했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따지기도 하고요. 각오를 아무리 세워도 막상 앞에 서면 가슴만 뜨거워져요. 욕도 막 하고 싶은데 입에서 안 떨어지고요.”
픽 웃은 천중명은 허선영과 같이 고개를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씨발놈이.”
놀란 허선영의 시선이 천중명을 향했다.
“해 봐. 연습을 해야지. 씨발놈이.”
“그걸 어떻게 해요?”
“속으로는 해봤을 거 아냐?”
허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운 거부터 시작할까? 이 조카의 십팔 색 크레파스!”
“풋!”
웃음이 터졌다.
셔츠에 팔을 넣지 못해 이리저리 뻗은 뒤에 나왔던 때보다 조금 더 큰 웃음이었다.
“뭐야? 연습하자니까. 다른 거로 해? 이 씨벌 건 목도리를 하고 조까지 미끄러질! 이건 어때?”
“난 재능이 없나 봐요.”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있을 텐데? 당신이 물러서면 그만큼 불행이란 놈이 주둥이를 훨씬 크게 벌리고 달려들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텐데? 그때도 재능이 없다고 물러서서 울기만 할 거야?”
천중명을 바라본 허선영이 말을 잊은 사람처럼 커다란 눈을 껌벅였다.
“무서운 상대에게 맞서는 건 누구나 두려운 일인데, 잠자코 있으면 당신은 밟아도 되는 사람이 돼.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커다란 눈이 천중명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거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면서 처음에는 등에 숨어서라도 버텨. 그 정도 노력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날 숨겨줄 사람이 없어요.”
“일단 개망나니 뒤라도 괜찮다면 내가 앞에 서 줄 수는 있는데.”
허선영의 커다란 눈이 천중명을 알고 싶다는 욕심을 담은 채 또렷하게 빛났다.
해가 지는 시간이었다.
8차선 도로에서 넘어오는 자동차 소리가 담벼락에 걸러져서 들어왔고, 황색으로 변한 햇살은 극장의 영사기 같은 빛줄기를 건물과 담벼락 사이로 뻗어냈다.
“망나니가 이런 소리 하니까 이상해?”
“중명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잘 자고 일어나서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
천중명이 답을 건넨 직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옆에 내려놓았던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며 시선을 당겨갔다.
오지은이었다.
“받으세요.”
액정에 떠오른 오지은의 이름을 허선영은 분명 보았다.
받기도 지랄 같고, 안 받자니 뭔가 감춘 인간 같고.
재미는 이전의 천중명이 봤는데 뻘쭘하기는 지금 천중명의 몫이었다.
벗은 몸과 그 상태에서 허리를 숙인 것까지는 봤으니까 뭐 할 말은 없는 건가 싶기도 했다.
망설이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하필이면 이럴 때 전화를 해서는!
천중명이 입맛을 다실 때였다.
지이이잉.
문자가 액정에 떠올랐다.
마스크 쓴 얼굴로 정면만 보는 허선영의 옆에서 천중명은 문자를 확인했다.
[자기야! 연락 부탁해.]
간단한 오지은의 요청이 담겨 있었다.
“배 안 고파?”
“안 고파요.”
어쩐지 차갑게 느껴지는 허선영의 답이 곧바로 나왔고,
지이이잉.
이어서 또다시 문자를 알리는 진동이 천중명과 허선영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진짜 너도 눈치 더럽게 없다.
지이이잉.
문자는 또다시 들어왔다.
이렇게 되면 확인 안 하는 것이 더 껄끄럽다.
휴대전화기를 들어 문자를 누른 천중명은 잠시 내용을 확인한 뒤에 픽 웃었다.
[200억은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마. 정직원 교체는 회의와 결정 과정이 필요해서 당장 답을 줄 수 없다.]
이것이 먼저 온 문자였고,
[협박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공연한 오해가 외부로 퍼져 그룹 이미지를 추락시킬까 봐 우선 협조한다.]
변명 가득한 내용이 두 번째 문자에 담겨 있었다.
웃음이 나왔던 천중명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은이 문자 때문에 웃은 거 아냐.”
“상관없어요. 오지은 만나는 거 받아들인다고 했잖아요.”
허선영은 문자를 확인한 뒤에 웃는 천중명을 보며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
천상기는 앞에 놓인 물병을 들어 컵에 따랐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 계속 엉뚱한 요구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녹음한 원본을 회수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치해야지요.”
물을 마시는 천상기의 맞은편에서 강승애가 심각한 얼굴로 의견을 꺼내놓았다.
“이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중명이뿐만 아니라 윤 실장까지 개입되어 있다면 이걸 막기는 힘듭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예요?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답을 원하는 강승애를 천상기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에요? 그 눈빛은?”
“저쪽은 둘입니다. 하나는 중명이, 다른 하나는 윤 실장, 둘을 동시에 해결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요?”
천상기의 눈빛이 무언가를 계획한 느낌이어서 강승애는 조용하고 나직하게 다음 말을 재촉했다.
“어차피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총수님이 모를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왕회장님께 자백하자는 건 아닐 테고, 생각한 걸 그냥 말해보세요.”
“이사장님. 지금 이 계획이 형님께 들어가는 것이 걱정이잖습니까?”
천상기는 분명 독해진 눈빛이었다.
“그럴 바엔 계획을 앞당기는 겁니다. 어차피 국세청이 움직인 뒤에 회사가 이사장님께 넘어가면 총수님도 다 알게 되고요. 그럴 바엔 계획을 앞당기는 게 가장 현명합니다.”
“우리 회장님은요?”
“구속으로 압박하는 것 외에 좀 더 몰아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승애가 무슨 소리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고,
“형님이 은신하거나 최악의 선택을 할 정도로 압박을 가해서 중명이 놈이나 윤 실장의 연락을 스스로 피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천상기가 생각한 것을 모두 털어놓았다.
“방법은요?”
“형님이 최근에 새로 만나는 여자 연예인이 있습니다.”
“그걸 먼저 터트리려고요? 그래서 일단 연락을 끊게 하고 바로 세무조사를 잇자는 거죠?”
“비자금 조성의 혐의가 나오면 훨씬 좋을 겁니다.”
입술에 힘을 꾹 준 강승애가 벽을 노려보며 계산에 빠졌다.
그녀의 친정 소유 오피스텔이라 말이 새나갈 염려는 없었다.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겠어요?”
“그전에 이사장님의 각오를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무슨 각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강승애가 고개를 갸웃했고,
“이사장님 친정 건물입니다. 여기에서 위험에 빠지면 저만 죽게 됩니다. 그러니 이사장님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주십시오.”
이제야 말귀를 알겠다는 듯 강승애가 야릇하게 웃었다.
“나도 믿음이 필요하긴 하지요.”
그녀는 시선을 들어 오피스텔의 입구를 보았다가 다시 가져왔다.
“증거는 확실하죠?”
“내일 중으로 발표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네요?”
“이사장님을 보필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강승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럼 막내와 윤 실장은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는 입구 앞에서 몸을 돌려 질문을 던졌다.
“급한 불을 끄고 나면 다음은 큰불을 꺼야지 않겠습니까?”
“멋진 표현이네요.”
달칵.
그녀의 손끝이 움직이며 오피스텔의 등이 꺼졌다.
창으로 들어온 도시의 불빛이 욕망에 불타오르는 두 사람을 피해 구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