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7화 (27/315)

# 27

027. 일단 지켜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1)

통화버튼을 누른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유진교가 누구에게 어떤 부탁을 하는지 궁금한 얼굴 옆에서 신호음이 세 번쯤 울렸다.

- 윤만석입니다.

“천중명입니다. 윤 실장님.”

설마? 혹시 윤만석?

유진교의 눈과 얼굴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주소와 전화번호 하나 적으세요.”

-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이렇게 연락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요? 상황이 급해서 그런 거니까 우선 이름과 번호부터 적으세요.”

천중명은 제안서에 적힌 손도운의 회사 이름과 주소, 그리고 연락처를 차례로 불러주었다.

“손도운. 화장품 개발자인데요. 이 양반에 관해 있는 대로 알아봐 주세요.”

- 대표님, 저는 왕회장님의 지시만 받습니다.

“내게 신세 진 거 갚는다고 생각하세요. 직원분 눈알 하나 봐 드린 거 잊으셨나 봅니다?”

유진교가 놀라서 바라보았고, 운전하던 곽대출이 룸미러로 천중명을 빠르게 살폈다.

- 왕회장님께 보고 드리고 움직이겠습니다.

“그러세요. 대신 지옥문을 여는 데 필요한 거라고 말씀해 주시면 아마 허락하실 겁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휴대전화기를 내려놓는 천중명을 유진교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윤 실장의 힘을 이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자금은 저를 통해 구할 생각이었습니까?”

“설마요?”

천중명이 가볍게 대꾸했을 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이번엔 유진교의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었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여보세요?”

상대의 말을 듣던 유진교가 천중명을 힐끔 보았다.

“일단 막아. 필요하면 광고 몇 개 주기로 하지.”

언론과 관계된 통화인 모양이었다.

“홍보실과 협조하고, 내가 왕회장님께 직접 보고할 테니 따로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

지시를 마친 유진교는 통화 종료버튼을 눌렀다.

“지경화장품에 있던 기자가 기사를 올렸나 봅니다. 그쪽 데스크에서 확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막는다고 막힐까요? 인터넷에 올라가면 바로 말이 퍼질 텐데요.”

“그래서 막았습니다.”

유진교의 말뜻이 이해되지 않아서 천중명은 잠자코 있었다.

“두 분 형님께도 말이 들어갈 겁니다. 그분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그룹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런 홍보는 알음알음으로 퍼지는 게 더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전무님은 은퇴한 상태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기획실을 통제할 수 있지요?”

오산을 지난 승용차가 용서고속도로의 끝자락에 올라타 용인을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그룹 기획실에 관한 한 총수님의 권한은 막강합니다. 왕회장님의 세 가지 숨겨진 패가 있었는데 하나가 윤 실장, 또 하나가 저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

천호득이 아무렴 뒷방 노인네처럼 얌전히 구경만 할 사람은 아니란 거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가 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물어본다고 답해 줄 것도 아니잖아요?”

유진교가 ‘만만치 않네?’ 하는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천상기의 이름을 올려놓고는 몸을 떨어댔다.

“자금을 해결해 줄 전화입니다.”

이건 또 어떻게 하려고 이러지, 하는 유진교의 얼굴 앞에서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곧바로 녹취 기능을 작동시켰다.

“여보세요?”

- 너 뭐하는 새끼야!

유진교와 곽대출이 충분히 들었을 정도로 거친 고함이었다.

- 야, 이 새끼야! 너 미쳤어? 누구 마음대로 직원을 전부 정규직으로 전환해! 그룹의 지시가 장난이야? 경영이 기분대로 이리저리 휘젓는 거냐고!

휴대전화기를 한 뼘쯤 뗀 상태여서 천상기의 분노가 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좀 침착합시다.”

- 너, 이 새끼! 당분간이라도 하는 꼴을 보려고 했는데 이사회 열어서 그 잘난 대표 자리 잘라줄 테니까 어디 한번 계속 설쳐 봐!

“그전에 내가 큰형님을 만나볼 생각인데 괜찮겠어요?”

- 이 새끼가 총수님의 관심 좀 받더니 뵈는 게 없나? 마음대로 해 봐라. 형님이 널 만나주기나 할 것 같냐?

천중명은 아예 무전기를 들 듯 전화기를 정면으로 든 채 입을 열었다.

“내가 지경갤러리에서 있었던 미팅 내용을 전해드리면 불편하실 것 같은데? 그래도 정말 괜찮다는 거죠?”

천상기는 답이 없었다.

야비한 놈에게는 그에 걸맞은 방법으로.

이것까지는 계산해 놓았던 일이었다.

“어떻게? 국세청 이야기부터 나눌까요? 아니면 정규직 전환과 신제품 개발에 필요한 200억 지원받는 것으로 끝낼까요?”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억지로 버티는 음성이 넘어왔다.

“추가 세금이 얼마라고 하셨더라? 2천억인가 했지요, 아마? 그 조건으로 자금도 지원받으신 거로 아는데?”

경쾌하게 달리는 엔진 소리를 배경으로 짧은 침묵이 지난 다음이었다.

- 너 지금 어디야? 만나. 만나서 말해.

유진교가 놀라 바라볼 정도로 나직한 천상기의 반응이 튀어나왔다.

“내가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요. 얼른 이사장님과 의논 마쳐서 어떻게 할지 알려주면 싶습니다. 참!”

천중명은 픽 웃는 것으로 잠시 틈을 만들었다.

“앞으로 30분이면 강남에 도착합니다. 그 안에 연락이 없으면 내가 바로 큰형님을 뵙게 됩니다. 부디 서로에게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천상기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녹취에 걸릴 만한 뭔가를 토해낼 만도 한데 하여간 영악한 인간이 약점 잡힐 결정적인 말을 꺼내지는 않고 있었다.

- 윤 실장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인데 그런 걸 믿고 설치면 다치는 건 네가 될 거다.

“상상이야 편한 대로 하시고, 나야 속도 별로 안 깊은 데다, 이사장님 같은 여자분이 있어도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다치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음 같은 한숨이 전화기를 타고 건너왔다.

“답은 30분 안으로 와야 합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왕회장님은 모르십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실까 해서 알려드립니다.”

천중명은 묘한 미소와 함께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대표님은 무섭군요.”

“내가요?”

“언제 둘째 형님의 약점을 손에 넣으셨습니까? 듣기에 지경갤러리 이사장님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그걸 굳이 제가 듣는 앞에서 통화한 것도 그렇고….”

“너무 넘겨짚지 마세요. 그룹의 반응을 정하는데 시간 끌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저는 정의로운 척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유진교가 음성만큼이나 묵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그럼 저녁 약속을 위해 잠시만 통화하겠습니다.”

천중명은 그 옆에서 다시 휴대전화기의 번호를 찾았다.

놀랍겠지? 오늘 모습이?

몸뚱이가 바뀌기 전, 1년 동안 지경화장품과 냉동창고를 오가며 봐온 것들을 쏟아내는 거라서 유진교는 절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

천상기는 사무실에서 뛰어나와 옥상의 휴게실로 올라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공간으로 움직인 뒤에야 전화기를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미팅 중이라 그런데 나중에 통화하면 어떨까요?

“이사장님. 중요한 내용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이사장님 방은 피하셔야 합니다. 도청의 위험이 있습니다.”

멈칫한 강승애의 반응이 있었고, 이어서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만 실례할게요. 중요한 통화라서요.” 하는 말이 건너왔다.

걷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 다음이었다.

- 무슨 일이세요?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강승애의 질문이 넘어왔다.

“중명이 놈이 이사장님과 제가 나눈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 그게 무슨…?

“국세청 이야기는 물론이고, 추징금, 제게 송금한 사실, 심지어 마지막에 주고받았던 말까지 모두 떠들었습니다.”

- 그럴 수가 있나요?

강승애도 이제는 당황한 모양이었다.

“윤 실장, 그 인간이 이사장님 방을 도청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 말도 안 돼. 그럼 총수님도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그게 총수님은 모르신다고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말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30분 내로 직원 고용문제와 200억 지원을 결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강승애의 대꾸는 없었다.

천상기가 경계하듯 주변을 둘러본 다음이었다.

- 지금 어디세요? 움직일 수 있어요?

침묵을 깨고 강승애의 질문이 넘어왔다.

“어디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 알았어요. 혹시 전화기까지 도청되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기술적으로 어렵습니다.”

답을 한 천상기가 또다시 주변을 둘러본 뒤였다.

- 추적이 있을지 모르니까 내가 장소를 정해 다시 전화할게요. 문자 하지 말고요. 혹시 막내에게 약점 잡힐 말을 한 건 아니죠?

“절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 그럼 우리 친정 쪽에서 소유한 건물을 정해 알려드릴 테니 거기서 보는 거로 해요.

“30분 내로 답을 달라고 한 건 어떻게 할까요?”

- 시간을 끄세요. 지금 그런 걸 의논할 때가 아니잖아요? 아니지! 200억 지원이라고 했나요?

천상기가 답을 하기도 전이었다.

- 우선 200억은 지원하겠다고 하세요. 나머지는 만나서 의논해요.

통화가 끝났다.

“젠장! 윤만석 이 인간! 내가 눈알을 파내고 만다! 눈알을 파내고 만다고!”

주변을 둘러본 천상기는 죽일 듯이 맞은편의 건물을 노려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

천호득은 탱크가 굴러들어온 고물상 주인처럼 웃었다.

“다시 한 번 말해보게.”

- 지옥문을 여는 데 필요한 거라고 말씀드리면 허락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으하하하! 으하하하하!”

- 회장님.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셋째 아드님이 이렇게 나오면 큰 아드님과 둘째 아드님의 눈에 너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지옥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옥문이 열리는데 적어도 죽고 사는 문제는 걸어야지!”

아직 떨쳐내지 못한 모양인지 천호득은 말끝에 웃음을 흘렸다.

“들어줘. 윤 실장의 능력을 확실히 한번 보여주라고. 조사해 달라고 한 인간의 속옷까지 탈탈 털어서 그놈이 언제 잠자리를 했는지까지 알려줘.”

- 괜찮으시겠습니까?

“젊은 시절의 나와 비슷하지 않나?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를 샅샅이 훑곤 했었지. 그걸 지금 셋째 놈이 비슷하게나마 흉내 내는 거고.”

윤만석의 질문과 동떨어진 기억을 떠올렸던 천호득이 웃음을 지우려는 것처럼, “하아!” 하는 기다란 숨을 토해냈다.

“그놈 참. 직접 지켜보지 못하는 게 억울하군.”

천호득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양, 창밖에 펼쳐진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하는 걸 들어줘.”

그리고는 확인 같은 지시를 짧게 내리고는 통화를 마쳤다.

“어디까지인지 보자. 함부로 선을 넘지는 마라. 터무니없는 욕심만 보인다면 네가 연다는 그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의 마지막일 게다.”

천호득의 나직한 독백이 그의 서재를 떠돌다가 사라졌다.

**

통화버튼을 누를 때는 이미 용인 근방의 골프 연습장 옆을 달리고 있었다.

- 여보세요?

허선영은 꽉 잠긴 음성에 코가 막힌 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 감기 기운인가 봐요.

침을 삼키는 것처럼 무언가를 넘긴 허선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울었거나, 아니면 울다가 전화를 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았다.

“어디야?”

- 집이에요.

“내가 지금 그리 갈 테니까 앞으로 나와요.”

-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죄송한데요, 오늘 저녁 모임은 다음으로….

“나하고 약속했었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는 허선영의 말을 천중명이 잘랐다.

“언제, 어디서고 내가 나오라면 바로 나올 것.”

- 중명 씨…. 나요….

“삼성동이지? 30분이면 도착해.”

말을 마친 천중명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대출아. 삼성동에 나 내려주고 전무님과 함께 빌라로 가 있어.”

“예, 대표님.”

분위기를 알아챈 곽대출이 차의 속도를 높이는 사이 천중명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지, 허선영의 커다란 눈과 소매에 팔을 넣지 못한 뒤에 웃음을 참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천중명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알고,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결혼하겠다고 한 것도 안다.

왜 이러는지 모른다.

허선영이 울고 있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화가 치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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