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026. 뜻대로 될 것 같지? (3)
지경디자인의 고상득이 정직원 전환을 받아들이면서 더 이상 반기를 드는 임원은 없었다.
“정규직 전환 문제는 이것으로 결론 내겠습니다. 상무님. 내가 말했던 제안서는 가져왔나요?”
“예. 여기 있습니다.”
고상득이 가방에서 누런 종이봉투를 꺼내놓았다.
“대표님. 손도운 씨는 고집이 너무 세서 그와 손잡아서 제품을 생산한 회사치고 이익을 본 곳이 없습니다.”
좋은 뜻에서 건넨 조언이었을 거다.
그런데 고상득의 입에서 ‘손도운’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이중성과 지경화장품 이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손도운의 개발품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이중성은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꺼내 든 빵을 보는 듯한 눈으로 천중명 앞에 놓인 종이봉투를 보았다.
“예. 그렇긴 한데 문제가 있나요?”
“손도운이 제품 개발에 재능이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대신 경영을 전혀 모릅니다. 이익에 대해 무리한 요구는 물론이고, 제품이 실패했을 경우에 져야 할 위험부담을 나눈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부사장님의 말씀을 참고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대표님. 손도운의 개발품을 선택하시는 건 정직원 전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에게 우리 연구원들이 지닌 반감도 고려해 주셔야 합니다.”
이중성이 시선을 돌린 곳에서 지경화장품의 이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좋아 고려해 달라는 것이지, 여차하면 단체행동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처럼 보였다.
궁금한 것은 유진교의 반응이었다.
천호득이 직접 보낸 전무다.
얼마든지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데도 그는 여전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부사장님. 지경화장품을 이끌어 온 데 대한 경험과 연륜을 무시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 양반과 공장장 진갑수가 지경화장품의 실세였다.
두 사람 모두 직원에서 출발해 지금의 자리에 올라온 만큼 직원들의 신망이 있었고, 나름의 자부심과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봅시다. 우리 회사에서 가장 잘 나가는 수분크림과 에센스의 원가가 얼마입니까?”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지?
이중성은 섣불리 답을 꺼내놓지 않았다.
“립스틱은요? 원가가 90원이죠? 수분크림은 드럼통에 원료 부어 넣고 기계로 돌린 뒤에 퍼 담습니다. 케이스와 포장까지 포함한 원가가 1,800원입니다. 그걸 우리는 7만 9천 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누가 저걸 알려줬어?
이사들을 돌아보는 이중성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영업이익 폭을 가지고도 지경화장품은 겨우 현상유지입니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소비자가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실제로 비용을 포함한 공장 출고가는 원가의 10배입니다. 그 외에 변화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 점이나 연구개발에 실패한 점, 광고 부족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불만 가득한 음성으로 이중성이 답을 늘어놓았다.
“국내에 생산되는 화장품의 약 60퍼센트 이상이 한 공장에서 생산됩니다. 우리는 그나마 립스틱과 수분크림, 에센스의 생산시설을 갖추었고 판매망도 가지고 있지요.”
“대표님. 손도운이 개발한 제품에 시설을 투자했다가 시장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지경화장품은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험을 줄일 방법을 찾는 것이 부사장님과 여기 이사님들, 그리고 공장장이 할 일이죠. 그게 경영진이 할 일입니다. 정규직원을 줄이고, 파견과 계약직을 통해 버티는 게 임원진이 할 일은 아니란 겁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정규직원을 줄이는 것은 그룹의 지침에 의해서 실행된 것이지, 저나 여기 이사들이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고상득이 긴장한 눈으로 천중명과 이중성을 번갈아 바라보는 앞이었다.
“이제부터 바꾸시라는 말씀입니다.”
“예, 대표님! 그 전에 부사장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손도운의 제품을 선택하시는 순간, 우리 지경화장품은 존폐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왜 꼭 손도운이어야 합니까? 우리도 연구실과 연구원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질문했었습니다. 왜 영업이익 폭이 그토록 큰데도 현상유지를 하느냐고? 대표 상품이 있습니까? 지경화장품 하면 떠오르는 대표 상품이요.”
이중성은 답을 하지 못했다.
“연구원들이 신제품 한 번 제대로 만들어낸 적 있습니까? 빤한 립스틱 색만 바꾸고, 남들이 시장을 선점한 제품을 보고 나서야 오렌지, 녹차, 코코넛 성분을 추가한 후속 제품 만든 것 말고 다른 게 있냐고요?”
“그야 개발에 투여할 자금이 부족해서….”
“부사장님.”
힘없이 나오던 그의 변명을 천중명이 다부지게 잘랐다.
“지금 그 말씀이 경영진이 무능했다는 자백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것 같습니까? 40명이 안 되는 정규직이 200명 가까운 비정규직 직원 갈아대며 버티는 이 구조가요?”
굴욕을 참기 위해 이중성의 볼이 씰룩이고 있었다.
“이러니 노조에 굽실거려야겠죠. 그들이 비정규직을 찍어 눌러 줘야 회사가 버티니까요. 그들을 관리할 시간과 노력에 그룹 기획실에 자금 지원을 신청해 본 적 있습니까?”
이사들이 이중성의 눈치를 살핀 뒤에 불만 가득한 시선을 가져왔다.
너는 총수의 아들이라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하는 억울함이 그들의 표정과 눈빛에 담겨 있었다.
“부사장님. 이 제안서 보기는 하셨습니까?”
“저도 한 부 가지고 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여기 이사들과 공장장, 연구원들까지 다 보긴 했습니다.”
“가능성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대답 대신 이중성은 시선을 돌려 뒤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개발이사 김태환입니다. 손도운 씨가 이번에 개발했다는 제품은 박테리아를 이용한 화장품입니다.”
천중명은 종이봉투에 담겼던 제안서를 꺼내 앞장을 펼쳐보았다.
잉크젯으로 출력한 게 분명한 제안서는 나름 네모 칸, 세모 칸, 화살표, 그림을 이용해서 개발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화장품에 박테리아를 이용하는 시도는 수차례 있었습니다. 문제는 주근깨, 기미, 검버섯과 같은 변형된 피부를 제거한 박테리아가 소멸되는 시간입니다. 24시간 안에 박테리아가 죽지 않으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해서 그렇습니다.”
제안서에 김태환의 설명이 곁들여지자 손도운의 개발품이 어떤 것인지를 대강이나마 알 것 같았다.
“손도운 씨는 24시간만 살아있는 박테리아를 개발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제품을 생산하려면 임상시험, 혹시 있을지 모를 부작용, 그리고 의약품이 아니라는 인증도 받아야 합니다.”
“만약, 말씀하신 세 가지를 통과하면요?”
이중성을 슬쩍 돌아본 김태환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문제가 남습니다.”
뭐야?
어천수는 6개월 안에 개발만 하면 끝이라고 했는데?
이쪽은 왜 이렇게 문제가 많아?
천중명의 시선 앞에 있던 또 다른 임원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영업이사 오승현입니다. 제품의 개발이 끝나면 대대적인 홍보가 필요합니다. 전단과 샘플 제작, 광고, 매장 유지비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갑니다.”
“얼마나 필요하죠?”
“대략 100억 원가량입니다. 그게 처음 한 달간 쏟아 부어야 하는 비용입니다.”
염병할,
제품 생산에 드는 비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금액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도운은 매출의 50퍼센트를 요구했습니다. 이익이 아니라 매출의 50퍼센트입니다. 미친 소리에 고집은 어찌 그리 센지 솔직히 그 양반 목소리 듣는 것도 소름 끼칩니다.”
이중성이 ‘이제야 좀 이해가 되시나?’ 하는 표정으로 설명을 마무리했다.
“그럼 이 건도 얼른 결론을 내보죠.”
또 뭔 소리를 하려고?
화들짝 놀란 임원들의 시선이 천중명을 향해 달려든 다음이었다.
“정규직 전환에 들어가는 비용은 제가 개인적으로 부담하든, 그룹 기획실에 가서 발목을 붙들고 매달리든 해결하겠습니다.”
이미 결정 난 일이어서 임원진들은 이어질 말이 어떤 것인지에 집중하는 눈빛이었다.
“부사장님. 손도운 씨에게 이익의 몇 퍼센트까지 지급할 수 있나요? 최대로 지급할 수 있는 선을 알려주세요.”
“예?”
“매출의 반을 주고서는 내 생각에도 도저히 제품을 생산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이익으로 바꿔야죠. 몇 퍼센트까지 가능합니까?”
“손도운은 절대 그 점을 양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중명은 물끄러미 이중성을 바라보았다.
고집일 수도 있고, 이 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남는 과정에서 생긴 아집일 수도 있는데, 하여간 천중명은 벽과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세요? 내가 손도운 씨를 만나서 부사장님이 제안한 선을 못 만들면 제품 생산 안 하는 거고, 타협점을 가져오면 만드는 건데. 왜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물러나시는 거죠?”
이번엔 이중성이 천중명을 물끄러미 보았다.
놈팡이라고 들었는데 듣던 것과는 다르잖아?
총수님에게 보일 실적을 위해 저렇게 적극적인 건가?
그의 표정에 담긴 의문은 그랬다.
“이익으로 바꾸면 25퍼센트까지 지급 가능합니다.”
“제품 한 개당 로열티로 지불하면요?”
이중성의 시선을 받은 개발 이사 김태환이 얼른 “900원까지 가능합니다.”라고 답을 했다.
천중명은 슬며시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제안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익의 몇 퍼센트인지, 로열티로는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저 사람들 역시 가능성을 알아보고 의논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손도운이 얼마나 막무가내였기에 저렇게 고민했었던 사람들이 치를 떨며 만류하는지가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럼 손도운 씨를 만나서 지금 말한 선에서 합의되면 제품 개발을 진행하는 겁니다. 괜찮습니까?”
“그야 뭐…. 대표님이 그렇게까지 만들어 주신다면 저희야 따르겠습니다.”
이중성이 마침내 뒤로 물러났다.
“저야 명함을 받았으니까 됐고. 제 번호를 불러드릴 테니까 입력하시든가 적으세요. 당분간 오승현 영업 이사님은 늦은 시간에도 연락드릴 수 있으니 전화 피하지 마시고요.”
천중명은 휴대전화기의 번호를 불러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도운 씨를 만나보고 미팅을 다시 잡지요. 필요하다면 인터넷으로 화상 회의를 할 수 있습니다.”
“예.”
이중성 부사장을 비롯한 임원들과 유진교, 곽대출, 고상득이 천중명을 따라 몸을 일으켰고, 함께 회의실 밖으로 움직였다.
본관 계단을 내려선 천중명이 입구를 향해 걸을 때였다.
“생산시설은 안 둘러보십니까?”
진갑수 공장장이 뒤쪽에서 질문을 던졌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겁이 난다기보다는 끔찍했던 순간을 당장은 되새기기 싫었고, 혹시 그 안에서 또 엉뚱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도 있었다.
“저녁 일정이 바빠서 다음에 보기로 하지요.”
적당하게 답을 건넨 천중명은 본관 건물을 나섰다.
본관 건물 앞에 서 있는 승용차에 도착한 천중명이 인사를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대표님! 가세요!”
생산시설의 문 앞에 서 있던 여직원이 안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르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두 개의 생산시설에서 200여 명의 직원이 몰려나와 승용차와 정문 사이에 양쪽으로 늘어선 것은.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그리고 그들이 천중명을 향해 커다랗게 손뼉을 쳐주는 일은.
살면서 이렇게나 진심이 묻어있는 박수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중년의 여자 직원이 손을 둥그렇게 말아서 소리 질렀고,
“우리 정직원이 되는 거지요? 맞지요? 대표님?”
젊은 남자 직원이 불끈 쥔 주먹을 위로 들어가며 외쳤다.
이중성 부사장은 막막한 표정이었다.
한순간 천중명은 그의 눈가를 스쳐 지나가는 흐뭇함을 보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룹의 방침과 현실이 그를 독한 경영진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좀 더 지켜보면 정확하게 알 게 될 거다.
천중명은 직원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생산시설의 입구에 선 이범준이 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것도 보였다.
“불량품이 출고되는 일 없다고 믿어도 되지요?”
“네! 제품은 염려하지 마세요!”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직원들을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던 천중명이 상체를 드는 순간이었다.
“대표님! 멋있어요!”
“사랑합니다!”
상상도 못 했던 반응이 달려들었다.
임원들과 이범준은 기가 막힌 표정을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저는 수원으로 가 있겠습니다.”
“그러세요.”
고상득이 물러난 뒤에 유진교와 둘이서 차에 올랐다.
이번에는 오승현 영업이사가 문을 열어주었는데 말리지는 않았다.
부으으응.
차가 정문을 향해 가는 동안, 양쪽에 선 직원들이 천중명을 향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계산하셨던 일입니까?”
“그렇게 보이셨어요?”
“몰라서 물어봅니다.”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유진교를 향해 천중명은 미소만 보내주었다.
“손도운이란 사람과 필요한 자금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십니까?”
“지금부터 알아봐야죠.”
이어진 유진교의 질문에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