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025. 뜻대로 될 것 같지? (2)
몰려드는 시선이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노조위원장입니다.”
천중명의 왼쪽 아래에서 이범준이 손을 들었다.
거만하게 앉은 상태에서였다.
“저 씨발 놈이….”
뒤에서 나직하게 들려온 곽대출의 욕을 무시한 채 천중명은 마이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지경화장품에 비정규직, 그러니까 계약직과 파견직 직원이 모두 몇 명입니까?”
기자를 슬쩍 돌아보았던 이범준은 도전적인 눈빛을 먼저 던졌다.
“179명입니다.”
“그렇군요.”
원하는 답을 들은 천중명은 앞에 앉은 직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기 앉은 직원 대부분이 파견직이나 계약직 직원이라는 의미였다.
“이제부터 지경화장품은 파견직과 계약직 직원을 없앨 예정입니다.”
뭐라는 거야?
설마 우리를 모두 해고한다는 거야?
직원들과 이범준, 그리고 두 명의 기자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천중명을 바라보는 앞이었다.
“모두 정직원으로 고용하겠습니다. 노조위원장님은 이들의 의사를 반영해서 원하는 분들을 모두 노조에 가입시키세요.”
웅성대는 소리가 커다랗게 피어나 삽시간에 강당을 메웠다.
“여러분들을 정당하게 대우하겠습니다. 월차, 연차, 시간 외 수당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지급할 것입니다.”
놀란 여직원들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동료들을 돌아보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임원들이 당황한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회사는 여러분에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고객을 위한 제품 생산에 최선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티끌만 한 결함도 용납하지 마십시오. 불량에 관해 여러분께 불이익을 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의견이 있습니다!”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천중명의 말을 자르며 이범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지경화장품은 경영에 관해 전혀 모르는 분을 대표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요? 누가 반대하는 건데요?”
“우리 지경화장품 노조는! 회사를 위해 헌신한 우리 노동자를 대표해서 신임 대표님을 거부합니다!”
어쩐지 물을 잔뜩 부어 넣은 곰국처럼 이범준의 주장은 억지스러운 느낌이었다.
“대표님. 오늘은 이만 하시고 나머지는 제가….”
뒤에서 다가온 이중성 부사장을 천중명은 왼손을 들어 만류했다.
“그렇군요. 그럼 민주적으로 하죠. 강당에 있는 분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나를 반대하는 직원이 더 많다면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직원들은 노조원이 아닙니다!”
약속했었던 모양이었다.
이범준의 고함이 터지자 노조원인 듯한 직원들이 일어서서 오른쪽 주먹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곽대출이 천중명의 왼쪽 뒤로 조용하게 다가왔다.
“여기 노조원이 몇 명입니까?”
“37명입니다.”
천중명은 태연하게 질문했고, 이범준이 불만 가득하게 답했다.
“이범준.”
마이크를 통해 이름이 불리자 이범준이 비릿하게 웃었다.
기자들 앞에서 이름만 부른 것이 건수라 여기는 눈치였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한 눈빛도 빼놓지 않았다.
“정규직이 벼슬이야? 너희만 노조를 대표할 수 있다는 개소리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와? 너희가 여기 비정규직 직원을 위해 한 일이 뭐가 있어?”
“회사의 경영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안 그러면 회사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래서 경영을 모르는 대표이사를 거부하는 겁니다!”
“이봐요, 노조위원장님. 직원들 급여도 제대로 못 줄 회사라면 문을 닫는 게 맞아. 그리고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노조가! 왜 비규정직은 직원으로 인정 안 하지? 너희는 태어날 때부터 정규직이라는 인증 받고 나왔나?”
짝짝. 짜짝짝. 짝짝.
직원들 틈에서 뜨문뜨문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여기에는 없지만, 매장 파견 직원도 100명이 넘어! 그분들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할 거다. 경영? 방향은 내가 제시한다! 그게 잘못되었을 때 노조가 나서! 비겁하게 정규직이라는 울타리에 숨어서 밥그릇 챙기지 말고!”
짝짝짝짝짝짝짝짝짝.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표님!”
박수와 함께 중년 여자의 고함이 강당 중간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범준의 옆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번쩍였다.
“여러분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천중명은 이범준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강당에 앉은 직원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노조에 가입하세요. 이후에 회사 규정을 어기는 직원들의 징계나 복지 제도를 정할 때 노조의 의견을 반드시 받을 테니까, 한두 사람에 의해 여러분의 뜻이 왜곡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짝짝짝. 짝짝. 짝짝짝.
강당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박수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지켜내겠습니다. 여러분은 최고의 제품으로 고객에게 답해 주십시오. 이것으로 취임사를 마칩니다. 잘 부탁합니다.”
단상에서 오른쪽으로 벗어난 천중명은 직원들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플래시가 또다시 번쩍이며 무대 위를 향해 달려들었고,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웠다.
몸을 세운 천중명이 무대를 내려가자 임원들이 급하게 따라 움직였다. 그 와중에 볼이 벌겋게 상기된 곽대출이 경호원인 양, 천중명의 옆에 바싹 붙어서 움직였는데 슬쩍 시선을 돌린 곳에서 이범준은 따귀를 제대로 맞은 얼굴이었다.
뭐 이런 거로 그래?
이제 시작인데?
천중명이 이중성 부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강당을 빠져나간 뒤에도 박수는 멈추지 않은 채 복도를 메우고 있었다.
**
허세직은 머리가 꽤 컸다.
그의 정치적 능력이 모두 그 큰 머리통에서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허세직은 사람을 다루는 수완이 좋았다.
받은 만큼 주고, 달라는데 안 주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응징으로 보답했다.
정치인이 줄 게 뭐 있겠나.
그는 은행이나 기보, 신보에 압력을 넣어 기업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으며, 깔끔하게 현찰을 챙기는 수완으로 4선에 성공했다.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면 TV에 자주 얼굴도 비친다.
그만큼 평소 기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이해해주는 배려의 덕도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결혼을 약속했다고?”
그런 그가 서재에 앉아 왼쪽 얼굴이 퉁퉁 부은 허선영을 향해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예.”
“30억은 어떻게 된 거냐?”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까 빌려주는 거라고 했어요.”
허공을 노려보았던 허세직이 쭉 찢어진 눈으로 허선영을 다시 보았다.
왼쪽 눈 아래로 푸르스름한 멍이 올라왔고, 입술은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부었다.
“잠자리는?”
시선을 들었던 허선영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래. 그 정도를 안 하고 30억을 줄 리가 없겠지.”
그러나 허세직은 허선영의 시선을 잘못 이해한 듯 보였다.
“오늘 일은 문이 세차게 닫히는 바람에 얼굴을 다친 거다. 그러니 얼른 얼음찜질을 하든, 마사지를 하든 풀어놔. 저녁에 코리아클럽에도 가야지.”
“30억을 마련하면 어머니와 절 풀어주시기로 했잖아요.”
“그래서?”
“둘이 호주든, 캐나다든 나가서 살겠습니다.”
“내가 그러라고 널 유학 보낸 줄 아느냐?”
허선영의 고개가 또다시 들렸지만,
“어디서 감히!”
허세직의 매서운 눈초리와 음성에 한숨처럼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릴 적부터 허세직에게 눌려서 이런 모양이었다.
분명 대들겠다고 각오를 세웠는데도 막상 허세직을 대할 때면 가슴만 뜨겁게 쿵쾅거릴 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가 총리가 되면 너는? 네가 얻을 것도 생각해야지. 지경그룹에 내가 해 줄 것이 결국은 네 주머니로 들어갈 게 아니냐.”
“저 그런 거 바라지 않아요.”
“아비가 말을 하면 공손히 따라. 네가 세상을 몰라서 그런다. 그러니 당장은 얌전히 입 다물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무언가를 말하려던 허선영이 그걸 삼킨 다음이었다.
“가서 얼굴을 가라앉혀.”
“예.”
“그리고 참.”
기껏 가라고 했던 허세직이 허선영을 다시 붙들었다.
“오늘 잠자리를 했다면, 이제부터는 잘 때 문을 잠글 필요는 없지 않겠니?”
그리고는 상상도 못 했던 말을 꺼내놓았다.
허선영은 마치 허세직의 입에서 굵직한 송충이가 튀어나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교통사고 후유증인 걸 너도 알잖냐?”
“어떻게…. 저는 아버지 딸이고, 오빠의 여동생이에요!”
“누가 너더러 딸이나 여동생이 아니라고 하더냐?”
너무도 태연한 허세직의 얼굴에 허선영은 말문이 콱 막히고 말았다.
“하나뿐인 오빠가 통증을 잊기 위해 약을 쓴다. 그 약이 또 욕구를 강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어요. 그걸 풀지 못하면 다른 사고를 칠 수도 있고. 막말로 밖에서 일을 만들면 내가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겠니?”
기가 막혀 하는 허선영을 보면서도 허세직은 정치인 특유의 근엄한 얼굴로 말을 잇고 있었다.
“표시 나는 것도 아니고. 눈 꼭 감고 결혼할 때까지 오빠를 지켜준다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허선영은 슬프고 아픈 숨을 오열처럼 토해냈다.
“이제 올라가. 저녁에 천중명이 만나면 꼭 잠자리하는 것도 잊지 말고. 남자를 붙드는 데 그것 이상 없다. 취향이 어떤지는 내가 이미 알려줬으니까 잘 맞춰줘.”
허선영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대답해야지?”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깨를 허세직의 말이 붙들었다.
여기에서 반항하면 한없이 말이 길어진다.
“네.”
허선영은 그렇게 허세직의 서재를 나섰다.
**
브리핑을 한다던 한 시간 동안, 이중성과 임원들은 정규직 전환에 관한 어려움을 설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법인이 현상유지 수준인 건 알았습니다. 정직원 고용에 필요한 자금을 내가 준비하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더 있죠? 필요하다면 사채를 가져오더라고 해결할 테니 일단 진행하세요.”
“그룹 전체에 끼칠 영향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해보지도 않고 자꾸 이렇게 나올 겁니까?”
천중명이 독한 눈을 하고서야 이중성은 한 걸음 물러나는 듯 입을 다물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신기하게도 그 긴 시간 동안 유진교 전무는 내내 입을 다문 채 천중명을 지켜보기만 했다.
“전무님. 이천 공장은 내일 가는 게 좋겠습니다. 대신, 그쪽에 연락하셔서 계약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지시해 주세요.”
“예, 대표님.”
지켜보던 이중성 부사장은 아예 질린 얼굴이었다.
그의 눈에 담긴 탄식의 의미를 천중명은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이러다가 천중명이 덜컥 대표이사에서 잘리면,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성 징계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고 상무님.”
그런 이중성의 앞에서 천중명은 한쪽에 앉아 있던 고상득을 불렀다.
“지경디자인도 전부 정규직으로 전환하세요.”
“예?”
고상득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투였다.
심지어 반사적으로 고개까지 저어댔다.
“왜요?”
“대표님. 그룹 전체가 정규직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노조를 못 겪어보셔서 그러시는 겁니다. 저들은 항상 입에 물려준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고상득의 의견을 응원하는 이중성과 답을 궁금해 하는 유진교가 천중명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 전무님.”
“예, 대표님.”
“지경화장품, 냉동창고, 지경디자인의 직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자금이 1년에 얼마나 더 필요한가요?”
“지금의 급여 수준을 유지하는 수준이라면 15억 원가량 됩니다.”
이 양반 봐?
숨도 쉬지 않고 나온 답이어서 천중명은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그룹의 전체 직원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유보금 중에서 몇 퍼센트나 사용해야 합니까?”
“그룹 전체 직원을 말씀하십니까?”
“예.”
계산을 하는 모양인지 유진교는 잠시 말이 없었는데, 이게 마치 중요한 발표를 앞둔 것처럼 묘하게 회의실을 긴장시켰다.
“5조 7천억 원가량의 유보금이 있으니, 1년에 7퍼센트, 약 4천억 원이 더 소요됩니다.
마침내 그가 침묵을 깨며 답을 꺼내놓았다.
“보십시오, 대표님. 10년이면 그룹 유보금의 70퍼센트가 없어집니다.”
금액이 크다고 생각했는지 고상득의 음성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동안 계속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죠.”
“변화하는 환경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솔직히 좀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느닷없이 빤히 바라보던 허선영의 커다란 눈이 떠올랐다. 저쪽은 징그러운 남자로 생각할 텐데 혼자 이러는 건 솔직히 좀 못난 짓이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천중명은 고상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무님의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면 고민 좀 해 봐야겠는데요? 고작 직원들의 급여를 쥐어짜야 회사를 운영할 수준이라면요.”
“예?”
“능력이 없으면 물러나야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을 비정규직으로 갈아 넣어 급여를 줄여야 법인이 유지된다는 말을 하는 분이 임원으로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실망입니다, 상무님.”
“아닙니다! 저야 당연히 자신 있지만, 그룹 내 다른 법인을 염려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지경디자인만큼은 전부 정규직으로 전환하셔도 튼튼하게 유지됩니다.”
고상득은 다급했고, 이중성은 실망한 얼굴이었으며, 유진교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래, 하는 묘한 시선으로 천중명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