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4화 (24/315)

# 24

024. 뜻대로 될 것 같지? (1)

장면은 계속 이어졌고, 더욱 또렷해졌다.

강승애의 뒤편에 ‘지경갤러리’란 글자가 휘갈기듯 멋들어지게 달린 것과 그녀의 가슴에서 빛나는 브로치의 모양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막내가 오늘 공장을 돌아본 다네요. 준비는 하셨나요?”

“물론입니다.”

강승애는 천중명을 ‘막내’라 불렀다.

“대표이사 취임식을 하는 모양입니다. 우선 지경화장품 노조에서 능력 없는 대표는 물러나라고 항의할 예정이고, 연구원들은 단체로 휴가를 신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너무 1차원적이지 않나요?”

“1년쯤 뒤에 준비한 일이 있긴 한데 녀석이 워낙 버둥거려서 그 계획을 당기고 있습니다. 오늘도 시험 중에 있으니 얼마 걸리지 않아서 녀석은 무너질 겁니다.”

강승애가 의심 반, 만족 반의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도련님의 능력이야 믿지요. 어찌나 속이 깊은지 그 안을 볼 수 없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요.”

“형수님. 저는 늘 충직했습니다.”

“그 말이 끝까지 유지되었으면 싶어요.”

날이 바짝 선 대화를 두 사람 모두 태연한 표정으로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노조의 항의가 언론에 나오나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련님은 수완이 대단해요.”

대화의 끝에서 강승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려냈다.

미인은 아니지만, 돈을 처바른 덕분에 나이에 비해 피부가 고왔고, 주름이 거의 없었으며, 세련된 맛은 있었다.

그렇다고 남편의 동생을 향해 야릇한 미소를 보낼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걸 또 천상기는 능글맞은 눈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형수님 같은 여자만 있다면 내일이라도 결혼할 겁니다.”

“그래요?”

강승애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어둠이 두 사람을 잡아먹은 뒤에 곧장 눈부신 햇살이 천중명의 눈을 파고들었다.

차창 밖으로 여전히 건물들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승용차는 이미 용서고속도로의 입구에 있었다.

“후.”

나직한 숨이 저절로 튀어나왔고, 그 소리를 들은 유진교가 시선을 돌려 천중명을 살폈다.

이런 땐 그저 별일 아니란 듯이 모른 척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 천중명은 조금 전에 보았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어천수 코스메틱과 화장품 개발자인 손도운이 실제로 있었으니 강승애와 천상기의 대화 역시 현실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현명했다.

구역질 나게 산다.

재벌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기 위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남편이나 형을 교도소에 보낼 궁리를 하며 더러운 시선과 미소를 주고받는 것이 그랬다.

천중명은 소리 나지 않게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어쩌려고 그러지?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는 건가?

강승애의 남동생이 국세청장의 사위인 판국에 세무조사로 천봉서가 구속되면 천호득이 이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지금 남 걱정할 때는 아니었다.

대표이사 취임식에서 노조가 항의할 거란 말과 1년 뒤의 계획을 당겨야 한다는 정보에 대해 고민할 때였다.

‘이범준, 이 개새끼. 그동안 잘 처먹었지?’

지난 삶에서 1년 동안 다녔던 지경화장품의 노조위원장이었던 이범준을 떠올리며 천중명은 소리 나지 않게 웃었다.

고민하던 것 하나와 두 가지 의문이 단번에 풀린 느낌이었다.

천봉서와 천상기가 이전의 천중명을 어떻게 길들였는지를 알게 되었고, 이어서 그토록 직원들을 개처럼 대하는 데도 노조가 꼼짝하지 않은 이유도 깨달았다.

더불어 노조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해결 방법도 찾았다.

성깔 있는 눈매에 괄괄하기 그지없는 이범준이 주둥이를 닥치고 있었던 이유는 천상기와의 커넥션이었다.

‘너는 뒈졌어.’

천중명은 마지막으로 1년 뒤의 계획이 있다는 천상기의 말을 되새겼다.

이 새끼들이 확실히 뭔가를 꾸몄던 건 알겠다.

그래서 이전의 천중명이 무릎을 꿇은 채 몸이 바뀐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매달렸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짓을 했기에 몸이 바뀔 수 있었을까?

만약, 이 상태에서 그 계획을 실행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길은 없었다.

유진교, 곽대출, 천상기, 천호득, 누구와 몸이 바뀔지, 아니면 한순간에 가루로 변해 훅 사라질지 그걸 누가 알겠나.

알고도 또 당하는 건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멍청한 짓이었다.

더구나 앞으로 1년 동안 벌어질 일을 메모까지 해놓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더 그렇다.

일단 하나씩 간다.

언론까지 준비한 취임식에서 이범준 노조위원장부터 상대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곽대출이 운전하는 독일제 승용차는 천중명의 속을 모르는 것처럼 용서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

집으로 들어간 허선영을 맞은 건 밤마다 문고리를 흔드는 허광렬이었다.

“무슨 짓을 하고 들어오는 거야!”

부친인 허세직을 닮아 머리통이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허광렬은 어쩐지 올라오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듯 눈을 번들거렸고, 숨을 내쉴 때마다 역한 냄새를 풍겼다.

“돈 보냈어요.”

“그걸 아니까 묻잖아! 30억을 그렇게 덜컥 준 걸 보면 홀랑 벗고 개처럼 엎드렸던 거지? 좋디? 좋았어? 그놈 앞에서 홀랑 벗고 엎드려 헐떡거리면서 좋았냐고!”

“당신은 미쳤어.”

수치심을 이기려 입술을 꾹 다문 허선영이 방으로 돌아서는 참이었다.

홰액!

그녀의 팔을 허광렬이 거세게 낚아챘다.

“아악! 왜 이래요?”

“말해. 몇 번 했어? 그 짧은 원피스 입고 엎드렸었어? 아니면 누워서 가랑이 벌려줬냐? 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짜악!

듣다 못한 허선영이 따귀를 때린 직후였다.

고개가 돌아갔던 허광렬이 번들거리는 눈을 천천히 돌려 허선영을 보았다. 그리고,

짜악! 짜아악! 짜악!

왼팔을 붙든 채 연달아 허선영의 뺨을 거칠게 때려댔다.

비틀거리는 허선영의 코와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입술과 턱을 적셨을 때, 허광렬은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 훅 뒤로 젖혔다.

“더러운 년이 남자 맛을 보더니 눈빛이 바뀌었네?”

고개가 젖혀진 상태에서도 실제로 허선영의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광렬이 이렇게까지 미쳐 날뛰는 것과 허선영이 끝까지 대든 것은.

“나한테 왜 이래?”

“그러니까 밤에 왜 문을 잠그냐고! 왜!”

“나 당신 동생이야.”

“지랄하네.”

뒤로 꺾은 허선영의 머리를 허광렬은 코 바로 앞까지 바싹 당겼다.

“나는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여태 우리 집에서 먹고 살았으면 최소한 은혜는 갚을 줄 알아야지. 안 그래? 키워줬으니까 몸뚱이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냐? 어?”

“아버지가 아시면….”

“내 아버지야! 그리고 아버지가 잠자코 있는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아버지도 네가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허선영의 눈물 그렁한 큰 눈과 붉게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허광렬은 더욱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와락!

머리채를 더 당기는 것과 동시에 붙잡았던 팔을 놓고는 허리를 바싹 끌어안아서 아래를 밀착시켰다.

“구역질 나.”

“개년이 몸 팔고 들어온 주제에 은혜는 못 갚겠다는 거냐?”

휘익! 꽉!

허선영이 휘두른 오른팔을 허광렬이 붙들었다.

덕분에 딱 붙어있던 허리는 뗄 수 있었다.

“오늘은 은혜 갚아.”

“이러면 나도 언론에 떠들어 댈 거야. 다 같이 죽는 방법을 택할 거라고.”

“병신아. 아버지가 너 정도를 못 막을 것 같냐? 이리와.”

“놔! 이럴 거면 차라리 죽여!”

악착같이 버텼지만, 허선영은 완력으로 허광렬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흘러내린 눈물이 귀 아래에서 피와 엉겼고, 다음으로 머리칼을 적신 상태에서도 허선영은 방문을 붙들고 버텼다.

‘중명 씨…. 나 살고 싶어. 사람답게….’

그러면서 그녀는 이 처절한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천중명을 떠올렸다.

‘나도 행복해질 권리 있는 거 맞지요!’

이렇게 당하면 그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이 짐승에게 물리기 전에 한 번이라도 떳떳하게 그를 볼 수 있었으면 싶었다.

와락!

우악스러운 허광렬의 손아귀가 문틀을 붙잡은 허선영의 손목을 잡았고,

‘중명 씨….’

허선영이 천중명을 떠올린 직후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허세직의 고함이 쩌렁하고 거실에 울려 퍼졌다.

**

평택의 지경화장품 공장은 만 평이 넘는 부지에 한 동의 본관 건물, 두 동의 생산시설, 자재창고, 거기에 넓은 운동장을 품은 구조였다.

연락을 받았는지 열어둔 철문 앞에 경비가 서 있었는데, 먼저 도착한 고상득 상무가 함께 서서 차를 향해 공손하게 상체를 숙이는 것도 보였다.

본관 건물 앞에 차를 세우자 고상득과 경비가 빠르게 다가왔고, 건물 입구에서 얼굴을 알고 있는 부사장과 공장장, 그리고 이사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오셨습니까? 대표님?”

천중명에게 인사한 고상득이 유진교와 곽대출을 향해 경계하는 눈빛을 던졌다.

곽대출은 깡 하나로 살아온 인생이고, 유진교는 천호득이 직접 연결해준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고상득의 눈빛 따위 길가에 지친 고양이 대하듯 무시하는 수준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이중성 부사장입니다.”

알고 있다.

이전의 1년 동안 몇 번이나 봤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처음 보는 척해야 한다.

“네. 천중명입니다.”

이중성 부사장과 인사를 나눈 천중명은 그가 소개해주는 대로 진갑수 공장장, 이어서 영업과 총무 이사 등의 순서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은 천중명의 차례였다.

몸을 돌린 천중명은 유진교를 가리켰다.

“내가 경영을 잘 몰라서 도움을 받는 분입니다. 유진교 전무님입니다. 이쪽은 곽대출이라고 개인 비서인데 지경화장품에 부장 직급으로 자리 하나만 준비해 주세요.”

인사를 마친 다음이었다.

이중성의 안내로 일행은 본관 2층에 있는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천중명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 공장에서 전기에 타다시피 죽었던 기억이 고스란히 있는데 마음이 편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천중명의 표정을 살핀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차를 놓아주었는데 지경화장품 임원들 역시 눈가에 매달린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꾸 분위기 망치느니 일이라도 하는 게 좋았다.

“부사장님.”

“예, 대표님.”

차를 마시기도 전에 천중명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을 당겨왔다.

“여기 노조가 있습니까?”

“예.”

천중명이 질문했고, 이중성이 답했다.

“노조와 경영진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그룹 내의 다른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특별하게 문제는 없습니다.”

천중명은 빠르게 앉아 있는 지경화장품 간부들의 표정을 훑었다. 이들은 천상기와 이범준의 커넥션을 모르는 눈치였다.

“노조위원장은요?”

“예?”

“성향이 어떤지 궁금해서요.”

“아,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규직 직원들만 노조에 가입되어 있고, 정규직이 파견 직원들을 관리하는 방식이라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저, 대표님. 직원들이 모두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취임식을 마친 뒤에 회사 전반에 관한 브리핑을 해드릴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이중성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룹 총수인 천호득을 향한 충성심은 있었지만, 현재 칼자루를 쥔 사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임원의 모습이었다.

취임식에서 이범준이 달려든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놓았던 천중명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시죠. 그럼 가볼까요?”

천중명이 일어섰고, 그 뒤를 따라 앉아 있던 모두가 몸을 일으켰다.

강당은 본관의 3층이었다.

천중명이 들어서자 200명이 넘는 직원들의 시선이 훅 달려들었고, 앞쪽 무대 위에서 기다리던 정장 차림의 직원 한 명이 잽싸게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단상, 그 위에 마이크, 뒤로 쭉 놓인 임원들의 자리까지, 딱 대표이사 취임식에 맞춘 구성이었다.

급하게 의자 두 개를 더 준비해 천중명과 임원들, 유진교와 곽대출까지 모두 무대 뒤편에 앉았고, 여직원이 가져다준 꽃을 가슴에 달았다.

“친애하는 지경화장품 가족 여러분. 새롭게 우리 지경화장품을 이끌어주실 천중명 대표이사님의 취임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대표이사 취임식에 국민의례를 할 줄은 몰랐다.

대략 5분에 걸친 식순이 끝나고 직원이 다시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우리 지경화장품을 이끌어 주실 천중명 신임 대표이사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박수로 천중명 대표이사님을 환영해주십시오.”

굳이 미운털 박히지 않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정말이지 형식적인 박수가 울리는 가운데 천중명은 단상 앞으로 움직였다.

삐이익.

마이크가 터트린 뾰족하고 날카로운 소음이 울리는 동안, 천중명은 왼편 앞줄을 날카롭게 살폈다.

노조위원장 이범준이 그곳에 있었다.

그의 옆에서 카메라를 든 두 명의 남자도 보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뛰쳐나와 이범준이 악을 쓸 거고, 기자들은 그걸 또 자극적으로 보도할 거다.

뜻대로 될 것 같지?

천중명은 마이크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여기 노조위원장 있습니까?”

무슨 말을 하나 지켜보던 이들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을 때였다.

“노조위원장 없어요?”

마이크를 거친 쇳소리로 두 번째 질문이 강당에 울렸다.

직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이범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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