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023. 나도 당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3)
빌라에서 은행까지는 자동차로 5분 거리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까지 운전 잘하던 허선영은, 막상 지점장실에 들어서자 오히려 겁이 난 얼굴이었다.
“지점장님. 결혼을 약속한 사람입니다. 허선영 씨이고, 선영 씨, 이쪽은 남철양 지점장님.”
“남철양입니다.”
“허선영이에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직원이 들어와 유자차가 담긴 종이컵을 놓아주었다.
“30억을 송금할까 하는데요.”
“어카운트를 주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지점장이 ‘누가 계좌를 줄 거지?’ 하는 눈으로 천중명과 허선영을 번갈아 본 다음이었다.
“뭐해? 계좌 드려야지?”
“네? 예.”
재촉을 받은 허선영이 지점장이 내민 용지에 은행과 계좌번호, 그리고 ‘송순주’이라는 입금자 이름을 적어 넣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지점장은 메모를 들고 곧장 방을 나섰다.
“부자는 참 좋은 거네요.”
“꼭 그런 거 같지도 않던데?”
“다른 사람 말하듯 하세요? 통장에 여유롭게 30억을 가지고 있잖아요. 100년 뒤에 갚으란 말도 할 수 있구요. 이러다가 정말 못 갚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질문이 나온 직후에 지점장이 들어오는 바람에 굳이 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확인해보십시오.”
지점장은 창구에서 사용하는 작은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허선영이 송금전표를 확인했고, 그 표정 그대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가자. 바빠.”
그런 거 깡그리 무시한 채로 지점장과 악수를 나눈 천중명은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놀라움과 당황함이 올 때와는 다른 맛의 어색함을 차 안 가득 뿌려댔다.
“송금한 사실을 총수님과 형들도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내가 얻는 게 많아져.”
“어떤 걸 얻는 건데요? 따지는 게 아니라요, 궁금해서 그래요. 아직 그 큰돈을 어디에 쓸지도 듣지 않았잖아요.”
“당신과 결혼이 확실해졌구나, 하는 확신? 그렇게 되면 내 뒤에 배경이 생기지. 당분간은 당신 아버지와 친한 척해. 필요하면 나와 셋이서 식사자리도 만들고.”
허선영이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얼른 핸들 앞으로 얼굴을 돌렸다.
“오늘 오후에 돌아볼 공장 중에서 자리를 만들 테니까 오빠가 괴롭히면 일 핑계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나와의 관계도 확실해지는 거라 나쁠 것 없지 않나?”
“중명 씨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오빠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운전에 집중하지 못했는지 차선을 변경하던 허선영의 뒤에서 택시가 요란스레 클랙슨을 울려댔다.
“미안해요.”
천중명은 뒤만 힐끔 보았을 뿐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길이 막히지 않아서 사거리를 돈 허선영의 차는 곧바로 빌라 앞에 멈췄다.
“가서 일 보고, 저녁에 봅시다. 그리고 모임에 가서는 말 편하게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지금껏 편하게 했어요.”
픽 웃어준 천중명은,
“됐어. 그냥 가.”
운전석에서 내리려는 허선영을 만류한 뒤 뒤로 물러났다.
끝내 당황함을 털어내지 못한 허선영이 출발하자, 천중명의 주변에 남은 것은 햇살과 바람뿐이었다.
곽대출의 연락이 없다.
뭐, 그 인간이 도심 한복판에서 죽어 나자빠질 놈은 아니니까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천중명은 잠시 걸었다.
비싼 정장과 셔츠, 구두 따위의 화려함에 갇힌 삶에 주는 선물 같은 여유였다. 인도를 걸어 탄천으로 내려간 천중명은 계단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았다.
잘하고 있다.
천호득이 만들어준 돈으로 지경그룹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발판을 샀다면 손해 볼 거 없는 거래였다.
“사람 가지고 놀다가 코 물려서 넘어지면 당신들 전부 후회할 텐데 조금 전에 30억을 지불하는 바람에 돌이키기는 늦은 것 같지?”
탄천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뱉은 천중명이 픽 웃고는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
윤만석과 유진교를 맞이한 천호득은 모처럼 2층의 거실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비싼 작품들을 위해 내내 꼭 닫아두었던 거실 창을 연 뒤에 그 앞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허선영 양과 함께 은행에 들러서 30억을 송금했답니다. 수취인 계좌는 송순주이고, 허선영 양은 그 길로 출발했으며 셋째 아드님은 탄천을 걷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문자를 확인한 윤만석의 보고에 천호득은 눈을 길게 늘이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장님. 저야 그렇다 쳐도 여기 윤 실장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은 나를 신경 쓸 틈이 없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이어진 유진교의 염려에도 천호득은 태평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왜 셋째 아드님의 손을 잡아주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다 해놓고 여쭤 봐도 되냐니? 유 전무, 자네는 그 의뭉스러운 말투를 언제나 고칠 건가?”
농담처럼 유진교의 질문을 받았던 천호득은 특유의 독한 눈으로 창밖으로 보았다.
“첫째와 둘째 놈이 미국에서 수아의 목을 매달았을 때도 참았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어. 내가 녀석을 예뻐하는 게 눈에 드러날 정도였으니까.”
세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 천수아는 미국에서 목을 매단 모습으로 발견되었고, 자살로 처리 되었다.
“재벌이라는 게 인정이니 피니 눈물에 엮이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지. 재벌을 노리는 인간들은 그런 것들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그 모든 것이 약점이 되니까.”
씁쓸하고 서글픈 미소를 보였던 천호득이 고개를 돌려 유진교 전무를 바라보았다.
“거기까지 허락한다는 의미였는데 두 놈은 한 걸음 더 나가서 나를 노리더군.”
아직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유진교는 천호득의 다음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허허허. 그렇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어지지 않은가?”
농담으로 분위기를 털어낸 천호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막내를 경계하게 만들 생각이네.”
“제가 만나본 셋째 아드님은 절대 나약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회장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충분히 경계의 대상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게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일세. 전에는 그저 놈팡이에 불과했거든. 느닷없이 사람이 바뀐 것처럼 화장품과 냉동창고를 주기로 한 날에 제멋대로 차려입고 와서는 큰놈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지 뭔가.”
천호득이 재미있다는 느낌의 웃음을 풀어냈다.
“유 전무.”
“예, 회장님.”
“당분간 막내를 가르쳐 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매 순간 번득이는 재능은 보았습니다. 다만, 그 재능이 올곧게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지, 아니면 단순히 임기응변에만 강한 독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유진교의 질문이었다.
“그거 참!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하는 건지. 하여간 막내 녀석 덕분에 큰놈과 둘째의 시선이 그리 돌아가서 오히려 내가 여유가 생긴 꼴이 되었지. 대신 한 놈쯤 사고로 보내 버릴 계획이었는데 나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잖은가.”
천호득이 독한 눈빛으로 웃었다.
윤만석 실장과 유진교 전무는 누구보다 천호득을 잘 안다.
지금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할 때의 그는 절대 헛소리를 하지 않았다.
“지경그룹의 총수가 되기까지 나 역시 형님 두 분을 밀쳐내지 않았나? 그리고 재계 5위까지 끌어올렸어. 그 바람에 자식 농사를 완전히 망친 꼴이지 뭔가.”
“아예 지분을 공평하게 나눠주시지 그러십니까?”
“허허허.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고 죽여야 그나마 그룹이 멀쩡하지 않겠나? 물려주고 나면 내가 중재할 틈도 없어져. 결국, 치고받다가 엉뚱한 놈들 좋은 일 시키는 거지.”
이제야 뭔가를 알 것 같다는 유진교를 향해 천호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래서 은퇴한 자네를 부른 걸세. 막내를 키워서 돌아가는 꼴을 보려고. 뭔가 있는데 윤 실장 홀로 모든 것을 알아내는 데는 무리가 있어서 말이야. 알겠나?”
“예, 회장님.”
유진교의 답을 받은 천호득은 변한 것 없는 정원을 확인하듯 시선을 돌렸다.
**
곽대출은 12시 30분에 돌아왔다.
“점심 안 먹었지? 대표님?”
전화 한 통 없었던 녀석이 뻔뻔스러운 얼굴로 종이 쇼핑백을 높다랗게 들어 보였다.
“뭐냐?”
곽대출은 쇼핑백에서 상자를 주섬주섬 꺼내 홈바에 올려놓았다.
“쨔잔!”
“머리 고기?”
“그렇습니다! 역시 대표님은 개코십니다. 김밥도 있습지요.”
점심을 어떻게 하나 하던 참이었다.
부리나케 둘이서 뚜껑을 열었고, 나무젓가락을 쪼갰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던 건데?”
“다음 달에 퇴원한대. 그래서 진희 엄마가 이걸 직접 만들었다네. 대표님께 꼭 전해달라며, 고맙다고 백 번쯤 고개 숙이더라고.”
둘이서 머리 고기와 김밥을 욱여넣으며 주고받은 대화였다.
아닌 게 아니라 김밥은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손맛을 담고 있었다.
이번엔 천중명의 차례였다.
유진교의 방문, 고상득과의 통화, 허선영이 와서 함께 은행에 다녀온 이야기까지를 천중명은 순서대로 전부 전해주었다.
30억 원을 주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던 곽대출은 다른 말없이 김밥을 입에 집어넣었다.
“공장에 들를 때부터 운전은 내가 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 있겠냐?”
“나도 하는 일이 있어야지! 나중에 다른 일을 할 때 하더라도 당장은 운전이나마 마음 편히 합시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어서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둘이서 깨끗하게 먹어치운 뒤에 정리를 마쳤고, 커피를 준비한 뒤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본격적으로 시작이구만?”
“허선영에게 30억을 건넨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거지.”
“그렇긴 하네요, 대표님.”
맞은편에 앉아 떠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곽대출은 천중명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뭘 그런 눈으로 보셔? 부담스럽게?”
“고마워서 그런다.”
“머리 고기랑 김밥이 그렇게 좋으셨어?”
뻔뻔한 곽대출의 표정이 웃겨서 둘이 킬킬거리고 난 다음이었다.
“대표님. 진희 일도 그렇고, 봉천동 집 지켜준 것도 정말 고맙다.”
곽대출이 진지한 표정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런 거 더럽게 어색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장 갈 준비나 하자. 유 전무 그 양반 시간이 칼이다.”
“예!”
둘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씻어놓고 샤워한 후에 옷을 갈아입은 다음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시간을 칼로 자른 것처럼 정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독한 인간이네.”
곽대출의 감상평을 들으며 천중명은 휴대전화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빌라 앞에 있습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만, 어떻게 하실지 몰라 먼저 전화드렸습니다.
역시나 묵직한 목소리의 유진교였다.
“차를 가져갈 생각이거든요. 어떻게 하실래요?”
- 이천 공장까지 가야 하니 한 차로 움직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문을 열어드릴 테니 주차장에 차를 세우세요. 내 차로 가시죠.”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버튼을 열어 정문을 열어주었다.
“내려가자. 공장 가는 길은 알지?”
“벌써 다 확인했어. 나가서부터는 깍듯하게 대표님으로 모실 테니까 그렇게 아셔.”
당장은 조심하는 게 좋아서 천중명은 다른 말 하지 않은 채 구두를 신었다.
곽대출은 백화점에서 산 정장 차림이었는데 나름 잘 어울렸다.
1층의 현관을 나섰을 때 유진교는 그 앞에 있었다.
“인사하세요, 전무님. 개인 비서로 일하는 곽대출입니다. 여기는 유진교 전무님.”
유진교는 여유 있게, 곽대출은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나눴다.
인사를 마치고 뛰어간 곽대출이 차를 가져왔다.
문을 열어준 유진교가 차를 빙 돌아서 운전석의 뒷자리에 올라왔고, 곧바로 곽대출이 차를 출발했다.
“전무님. 다음부터는 문 열어주지 마세요. 전무님이 그렇게까지 하는 건 불편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는 동안 이 서류를 살펴보십시오.”
유진교가 답과 함께 건네준 서류를 받은 천중명은 잠시 시선을 창으로 돌렸다.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듯 날씨는 여전히 좋았다.
지경화장품에 앞으로 1년 동안 있을 일을 대강 짐작한다.
천중명의 행동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당장 노조가 들고 일어나 악을 써댈 게 분명했다.
노조를 상대할 방법쯤 세워두었다.
길가에 늘어선 건물들을 바라보던 천중명이 세련되게 꾸며진 카페를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창밖의 세상이 느닷없이 시커멓게 변했다.
너무 자주 이러는 거 아냐?
기가 막힌 천중명의 심정을 외면한 채 눈앞에 두 사람이 보였다.
“입금 확인하셨죠?”
“예. 모두 형수님 덕분입니다.”
강승애? 천상기? 너희 둘이 왜?
유리로 된 세련된 책상에 앉은 강승애가 맞은편의 천상기에게 서류를 디밀었다.
“이게 건설과 전자의 지분 현황이에요. 내 남동생의 장인이 국세청장인 건 알죠? 특별 세무조사가 벌어지면 추가 세액이 대략 2천억 정도 될 거예요.”
천상기는 대꾸 없이 서류만 살폈다.
“우리 회장님이 워낙 순진하셔서 이대로 가면 지키기 어려워요. 그래서 나선 거니까 오해 없기를 바라요.”
“오해했다면 제가 형수님을 찾아뵙겠습니까?”
서류를 내려놓은 천상기가 공손한 태도로 답을 건넸다.
“회장님은 이번에 구속될 거예요. 추가 세액을 우리 친정에서 납부할 테니까 지분 확보를 도련님이 도와주셔야 해요.”
“총수님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친정에서 건설과 전자를 가져가면 나머지는 도련님이 모두 가지실 수 있도록 제가 도울게요. 이렇게 되면 지경그룹의 다음번 총수는 자연스럽게 도련님이 되는 거예요.”
“형수님. 저는 욕심 없이 늘 한결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천상기는 여전히 충직한 얼굴이었고,
“도련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날 속일 생각은 마세요. 내가 연락하지 않았다면 도련님은 우리 회장님을 꼬드길 생각이었잖아요? 총수님께 대들도록요.”
그 충직한 천상기의 얼굴 아래 감춰져 있던 속내를 강승애가 내놓았다.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거지?
천중명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