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2화 (22/315)

# 22

022. 나도 당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2)

수치심을 이기기 위해 애쓰던 허선영의 눈가에 물기가 올라왔다.

왜 저러는지 천중명은 알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능력에 기대야만 해결되는 절박한 일을 만났을 때, 그 상대의 요구조건이 수치스러운데, 그마저도 빙빙 돌리며 말하지 않아서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일 때 저렇다.

확 때려치우고 돌아서고 싶은데 절대 그럴 수 없는 절박함을 느꼈을 때 사람들은 대개 허선영 같은 표정을 짓는다.

당신은 뭐가 그렇게 힘겨워?

아버지가 4선 의원이고 그 나이에 비싼 승용차 타고 다닐 정도인데 뭐가 그렇게 절박해서 그런 얼굴을 하는 건데?

천중명은 말없이 허선영을 향해 움직였다.

움찔.

손을 뻗자 긴장을 이기지 못한 허선영의 몸이 떨렸다.

“줘 봐요.”

천중명은 셔츠를 받아서 그녀의 뒤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팽팽하게 긴장한 채 서 있는 허선영의 등으로 셔츠를 펼쳐 주었다.

“팔 넣어요.”

허선영의 얼굴이 천중명을 찾았다.

왜 이러는지 좀 더 확신이 필요한 눈이었다.

“얼른 입읍시다. 그런 다음에 커피 마시면서 당신이 바라는 것을 다시 말하기. 괜찮죠?”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허선영이 팔을 뒤로 뻗었다.

사람이 참, 이럴 땐 순순히 팔이 꿰지면 얼마나 좋겠나?

오른팔은 잘 들어갔는데 왼팔이 두 번이나 소매에서 빗겨나고 말았다.

이게 좀 웃겼다.

긴장과 당황한 상태여서 허선영은 더 그랬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자존심이 상할까 웃음을 참는 천중명을 보자 허선영이 먼저 맥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둘이서 하여간 실없이 웃었다.

“자! 커피 마십시다.”

“네.”

웃음이 주는 위로 덕분인지 허선영은 조금이나마 편안해진 얼굴로 천중명을 따라 홈바를 향해 움직였다.

“커피가 다 식었다. 다시 끓여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둘이서 홈바에 앉았고, 식어서 단맛이 아래로 가라앉은 봉지커피를 한 모금씩 마셨다.

“허선영 씨.”

“네.”

“장난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거니까 당신이 원하는 걸 다시 말해 봐요.”

빌라였다. 햇살과 조명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고급스러운.

남자 셔츠를 걸친 눈 큰 여자가 섹시할 수 있다는 것을 천중명은 처음 알았다.

눈과 눈이 마주친 상태였다.

감정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는데 여자란 동물의 감각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날 다 말씀드렸고, 그렇게 하기로 했었잖아요.”

“알죠. 그날 당신에게 관계를 가져야만 믿을 수 있다고 했었던 것도.”

딱딱하게 굳었던 허선영의 눈빛이 한순간에 천중명을 향해 집중되었다. 지금 천중명이 원하면 더 마음 바뀌기 전에 잠자리를 받아들이겠다고 각오한 것처럼 보였다.

“자 하나씩 다시 말해 봅시다. 우선 내게 가장 원하는 것.”

“결혼이요.”

천중명의 눈을 똑바로 보며 허선영이 마침내 답을 꺼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당신 정도면 솔직히 이곳저곳에서 꽤 연락이 올 텐데 왜 내게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거지?”

허선영의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렸다.

“내 주제를 알라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네. 저는 중명 씨와 또 다르게 불륜으로 태어났어요. 총리를 노리는 아버지의 커다란 짐이구요.”

시선을 떨궈 잔을 보았던 허선영은 잠시 뒤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왕회장님이 안 계셨으면 아버지의 4선도 어려웠을 거구요. 이 일이 밝혀지면 아버지나 지금 살고 있는 본가, 그리고 친모까지 모조리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천중명의 앞에서 허선영은 발가벗은 얼굴이었다.

“오지은을 만나도 상관없어요. 대신 나와 결혼만 해주면 돼요.”

염병할, 재벌이고 정치인이고 도대체 행복한 집구석은 하나도 없나?

먼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고, 다음으로 이해가 되질 않아서 궁금한 것이 생겼다.

“내가 왕회장님을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면요?”

“중명 씨. 내 출신에 대해 재벌가는 다 알잖아요. 아버지가 왕회장님과 사돈이 되면, 재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요.”

“4선 의원에 총리 후보라면 재벌들이 알아서 고개 숙이지 않나?”

허선영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끝까지 이러세요? 중명 씨와 잘못되면 내가 드러날 거고, 반대로 아버지와 왕회장님이 사돈이 되면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니까요.”

“다른 재벌가와 연결되는 건?”

갑갑했는지 허선영은 도톰한 입술로 나직하게 숨을 뱉어냈다.

“불륜의 증거를 확실히 가진 분이 왕회장님이시고요. 우리 결혼은 왕회장님의 제안이었어요. 됐어요? 이제 후련해요?”

“그러니까 그 증거를 내가 알아서 없애주면? 왕회장님이 더는 그 문제를 가지고 말하지 않도록 해주면? 그럼 선영 씨도 자유로워지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허선영은.

“선거 자금도 해결해야 하는 건가? 만약 그것까지 내가 해결해 주면? 내가 궁금한 건 요즘 같은 세상에 아버지의 지시라고 선영 씨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그걸 이해하기 어려운 거지.”

이상하게 말이 짧아졌는데 허선영은 오히려 존댓말보다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눈과 눈이 마주친 상태였다.

“어머니도 구해주실 수 있어요?”

허선영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은 질문을 건넸다.

“어떻게 해주면 됩니까?”

긴장했는지 허선영은 아랫입술의 안쪽을 살짝 물었다.

“괜찮으니까 편안하게 말해 봐요.”

“30억을 빌려주실 수 있어요?”

답은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에 후회하는 허선영의 얼굴도 함께 보았다.

“미안해요.”

“뭐가?”

“터무니없는 말을 해서요.”

“나와 결혼하게 되면 왕회장님이 그것까지 지원해주기로 했었던 모양이지?”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시선을 들지 못하는 태도로 봐서 답은 ‘예스’였다.

후회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군 허선영과 그걸 묵묵히 지켜보는 천중명 사이에서 침묵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피어난 침묵이라는 놈이 식어버린 커피 향을 즐긴 뒤에 홈바 주변을 떠돌아다니도록 천중명과 허선영은 꼼짝도 않고 있었다.

“어디로 보내주면 됩니까?”

천중명이 질문을 던졌고, 허선영이 옷을 벗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 보내주면 돼요? 그 30억.”

“왜요? 왜 이러시는 건데요?”

“빌려달라면서요? 어머니를 구하는 데 필요해서. 그러니까 말해요. 어디로 보내면 되는지?”

주름 한 점 없는 목선이 움직였다.

여자는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재미있어요?”

그런 뒤에 슬픈 눈으로 허선영이 던진 질문이 천중명에게 날아들었다.

“돈 많아서 그렇게 말하면 좋아요? 내가 들떠서 나가면 또 바뀔 거죠? 그래놓고 이번엔 뭘 요구할 거예요? 벗고 개처럼 숙여야 하나요? 나, 다 들었어요. 중명 씨가 뭘 좋아하는지.”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허선영은 말을 쏟아냈다.

이전의 천중명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좋아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더 뭐가 필요하겠어요? 나요. 집에서 한숨도 못 자요. 오빠란 인간이 밤마다 날 노리거든요. 말도 못했어요. 나는 나서면 안 되는 자식이니까.”

불쑥 올라온 설움과 비참함을 삼킨 허선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도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답은 입을 다물라는 거였어요! 나요! 그 집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우리 어머니 다치지 않게 나올 수만 있으면 지금이라도 엎드릴게요. 됐어요? 됐냐고요?”

삐죽이는 입술을 한 손으로 막은 허선영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뚝. 뚝.

그리고 그 직후에 커다란 눈에서 올라온 눈물이 볼을 지나 턱을 타고 떨어졌다.

천중명은 홈바 위에 있던 고급 티슈를 뽑아서 허선영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 냉장고의 생수를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마셔요. 좀 나아질 겁니다.”

손등으로 볼에 흐른 눈물을 닦은 허선영이 붉게 물든 눈으로 천중명을 보았다.

“결혼을 바로 하기는 어려울 테고, 당신도 굳이 불행할 결혼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 계약 하나 합시다. 내가 30억을 보낼 테니까.”

남은 눈물을 훔친 허선영은 아직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뭔 놈의 의심을 이렇게까지?’ 했다가도 이전의 천중명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떠올리면 또 그러려니 싶었다.

“우리 결혼하는 거로 합시다. 대신 한 가지만 지켜줘요. 내가 나오라고 할 때는 시간, 장소 가리지 않고 나오기.”

“그건….”

‘할 수 있어요.’ 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허선영이 천중명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늘 오후에 코리아클럽엔가 함께 가야 하는 거 알고 있죠? 나와 그곳에 함께 가는 게 당신도 수치스러운 일일 거잖아? 개망나니에게 돈으로 팔려간 꼴이니까. 그렇죠?”

허선영의 머리가 움찔했다.

끄덕이려다가 아차 싶었던 모양이었다.

피식.

천중명이 웃었고,

“미안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허선영이 뒤늦게 빤한 변명을 건넸다.

“됐고. 대신 나는 후계자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겁니다.”

“정말 30억을 빌려주나요?”

끄덕.

천중명은 분명하게 고개를 숙여 답을 해주었다.

“잠자리도 요구하지 않고요?”

끄덕.

“결혼을 진짜 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번엔 픽 웃는 것으로 답해주었다.

“왜요?”

“당신은 그 돈으로 자유와 행복을 찾아. 나는 지경그룹을 향해 한 줄로 나갈 거니까.”

“내가 돈을 못 갚으면요?”

허선영은 의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올라온 얼굴이었다.

“글쎄. 왕회장님의 돈이니까 나야 뭐, 별 상관없지만, 그건 나중에 가서 정리하기로 하지. 대신 기간 안에 독촉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요.”

“기간이요? 얼마 뒤에 갚아야 하는데요?”

“돈을 받은 날로부터 100년.”

멍했던 그녀가,

“후.”

가슴에 손을 얹은 허선영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네?”

“은행에 갑시다. 바로 돈 보내줄 테니까 오늘부터 100년 안에 갚고 만약 못할 거 같으면 100년 더 연장하는 거로 해.”

“장난치지 마세요.”

“은행 가서 돈 받고 나머지 말해.”

“돈이 어디에 필요한지도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홈바를 돌아 나오던 천중명은 허선영의 옆으로 움직였다.

“어디에 필요해?”

“그건….”

“됐지? 이제 가. 가서 돈 받고 나머지는 저녁에 코리아클럽 모임에서 말합시다. 그때 할 얘기가 있는 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 보기에 좋지 않겠어?”

천중명은 성큼성큼 현관을 향해 걸었고, 허선영은 놀란 눈으로 쭈뼛대며 일어섰다.

“빨리 갑시다. 오늘 할 일 많아. 오후에 평택과 이천 돌아봐야 하고, 저녁에는 코리아클럽인가도 참석해야 한다니까.”

“정말이세요?”

“속고만 살았나? 대신 우리 결혼하기로 한 겁니다. 나 그거 대놓고 떠들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내가 부르는 곳에는 언제, 어디든 와야 하고.”

“예.”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허선영이 따라왔다.

“셔츠는 벗고 가는 게 좋지 않겠어?”

“아!”

허선영은 어쩐지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오빠라는 인간 때문에 그런데, 집에서 당장 나올 핑계 없을까? 의원님이 거부할 수 없는 핑계.”

리본이 예쁜 구두에 발을 넣던 허선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들었다.

“당신을 보면서 결심한 게 있어.”

“뭔데요? 그게?”

“나도 당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부모를 우리가 선택한 건 아니니까, 환경에 상관없이 행복해질 권리 말이야. 행복해져야겠어.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 지경그룹을 손안에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야.”

답을 잊은 허선영을 향해 천중명이 픽 웃었다.

“그동안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더럽고 추하게 살았거든. 이제부터 바뀔 생각인데 당신 도움이 필요해. 당장 코리아클럽에 가는 것부터.”

눈과 눈이 똑바로 마주친 상태였다.

처음으로 허선영의 눈에 호감이란 느낌이 올라와 있었다.

“도와줄 거지?”

“네에.”

그녀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답했다.

“당신이 행복한 범위 안에서만 그렇게 해. 다른 사람을 위해 너무 희생하느라 함께 불행해지지 말고.”

“중명 씨, 무슨 일 있었어요?”

또 괜한 질문을 했나 싶은 표정을 짓는 허선영을 향해 천중명은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지경그룹의 후계자가 되기로 했다니까. 2퍼센트쯤 이유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그걸 당신이 메워준 거야. 더 할 수 없이 확실하고 분명하게. 내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

허선영은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하긴, 설명한다고 해도 죽었다가 몸뚱이가 바뀌어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천중명이 지경그룹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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