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21화 (21/315)

# 21

021. 나도 당신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1)

평택 공장의 고상득 상무는 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 고상득입니다, 대표님. 이렇게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다 올라옵니다. 많이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아, 예. 나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고, 상무님. 혹시 손도운 씨라고 아세요?”

고상득의 과한 인사를 적당하게 넘긴 천중명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 손도운이요? 그 양반이 대표님께 직접 연락을 했었습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 일주일 전에 제안서를 들고 왔었습니다. 알아보니까 그 양반, 화장품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안서요? 그분이 화장품을 개발한 게 있나요?”

- 예. 제가 직접! 확실하게 거절했습니다.

소파에 앉았던 그 고약하게 생긴 남자는 분명 가능성이 있다고 했었는데?

어쩐지 화장품에 관한 고상득의 눈썰미를 알 것 같은 답이었다.

“이유는요?”

- 소문을 들어보니까 화장품 개발에 능력은 있는데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제품에 욕심냈던 회사들도 다들 물러섰다고 합니다. 전에 몇 곳에서 그 양반 제안을 베껴 제품을 내놓은 곳도 있었는데 별 재미도 못 봤답니다.

정말 있었던 사람이구나.

천중명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도대체 왜 과거나 미래를 보여주는지 이유를 모르는 터라, 이런 일들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상무님. 그럼 혹시 화장품 회사 대표 중에 고구마처럼 생긴 양반 짐작 가는 분 있어요? 납작한 얼굴에 찢어진 눈을 한 사람이요.”

천중명은 혹시나 싶어 또 다른 질문을 고상득에게 건넸다.

- 어천수 말씀하십니까?

“어천수요?”

- 예. 리어카 소매상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분입니다. 어천수 코스메틱이라고 히트 상품을 연달아 터트려서 화장품 업계뿐만 아니라 재계 쪽에선 제법 유명합니다. 다만….

“다만 뭔데요?”

- 다른 회사의 제품을 카피하거나 혹은 남의 개발품을 뺏어가는 일로 악명이 높습니다.

평가가 좋지 않았지만, 이름은 알았다.

- 대표님? 언제 오십니까?

“오후에 평택과 이천에 들를 예정입니다.”

- 대표님! 그럼 제가 먼저 평택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늘 대표님이 계시다는 마음으로 두 개 회사를 모두 관리하면서….”

“고생했어요. 나머지 이야기는 오후에 얼굴 보면서 하죠.”

길게 늘어지려는 고상득의 말을 자르며 통화를 마쳤다. 그런 뒤에 천중명은 휴대전화기에서 ‘어천수’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있었다. 고구마가.

이마에서 턱까지를 손바닥으로 꽉 눌러놓은 듯한 독특한 인상의 남자가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이었다.

이 남자가 손도운의 제품이 성공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 결국 카피 제품을 만들어낸다는 거였다.

제품을 만들라는 계시 같기는 했는데 이게 또 솔직히 확신이 서질 않는 일이었다.

“알아보자! 알아보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천중명은 다시 고상득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예, 대표님. 제가 지금도 대표님이 오후에 오셔서 확인할 서류들을 깔끔하게….

“손도운 씨가 찾아왔었을 때 받았던 제안서가 있나요?”

-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가져다 드릴까요? 바로 갑니다.

제안서를 보는 일이 뭐 또 숨 막히게 바쁜 일이라고 당장 가져오라고 하겠나.

“오후에 볼게요. 그리고 참, 우리 화장품 연구실에 인원은 충분한가요?”

- 다른 업체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어천수 코스메틱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 솔직히 지금은 그쪽이 좀 더 높은 수준입니다.

뭔, 재계 5위의 계열사가 급성장한 회사보다 연구 수준이 떨어지는 건가 싶어서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알았습니다. 오후에 보죠.”

고상득이 쓸데없는 말을 꺼내기 전에 얼른 통화를 마쳤다.

**

9시가 넘어서기 무섭게 천봉서의 사무실로 천상기가 들어섰다.

“무슨 일이 아침부터 그렇게 급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바쁘신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책상에서 일어선 천봉서가 천천히 소파로 움직였다.

“앉자.”

“예, 회장님.”

상석에 천봉서가 앉기를 기다렸던 천상기가 조금 뒤에야 오른쪽 끝에 붙어 앉았다.

“우선 이걸 보십시오.”

그리고는 종이봉투에서 사진들을 꺼내 천봉서가 보기 좋게 놓아주었다.

“가만….”

협탁에 있던 돋보기를 걸친 천봉서가 사진을 천천히 넘겼다. 사진은 전부 천중명의 빌라로 들어서는 유진교의 모습이었다.

“이 양반 혹시…?”

천봉서가 놀란 눈으로 천상기를 바라보았다.

“예, 회장님. 유진교 전무입니다. 지금 방문한 중명이의 집도 그렇습니다. 한 달 전에 매각해서 잔금까지 일시불로 받았던 곳인데 어제부터 그곳에 들어가 지내고 있습니다.”

“결국, 총수님이 이렇게까지 나서시겠다?”

분노를 누르느라 천봉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무슨 말씀이신지?”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를 묻고 있잖으냐.”

“저야 늘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일만 처리할 뿐입니다.”

“생각도 좀 하고 살아! 생각을! 어떻게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모두 알려주고 지시를 해야 일이 돌아가?”

“죄송합니다, 회장님.”

천상기는 송구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렸고, 그 모습을 천봉서는 갑갑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진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직 모르고?”

“한 시간도 안 돼서 바로 나왔습니다. 중명이 놈은 아직 집에 있고, 유 전무는 그곳에서 곧바로 명동 중앙호텔로 이동했습니다.”

“명동 중앙호텔?”

“코리아클럽에 가입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상기의 답을 들은 천봉서의 입술이 꿈틀했다.

“집안 꼴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잡놈을 모임에까지 넣으시려는 건지, 원.”

다시 입을 꿈틀했던 천봉서가 홱 시선을 돌렸다.

“추천서가 있어야 할 텐데?”

“허 의원도 있고, 총수님이 전화 한 통만 해주셔도 모두 해결됩니다.”

“크흠.”

천봉서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갑자기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구나.”

“그보다는 분명 언질이 있으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녁 모임에 편하게 차려입은 것이며, 형님, 아니 회장님과 제게 함부로 대든 것도 그래서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천상기의 말을 들으며 천봉서는 수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총수님을 보면 사람 욕심은 정말 끝이 없구나 싶다. 나만 생각해서 이러는 게 아닌데. 너도 있고, 이렇게 우리 둘이 잘 끌어가고 있는데 왜 분란을 일으키시는 건지 그게 화가 나는 거다.”

“회장님이 이렇게 잘 이끌고 계신 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시는지 저도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천상기는 송구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결국, 좋게 끝내지는 않으시겠다?”

천봉서의 말을 들은 천상기가 죄를 지은 양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다물었다.

그 덕분이었다.

번득이는 그의 눈빛을 천봉서는 전혀 보지 못했다.

“화장품과 냉동창고를 무너트리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

“준비할까요?”

조신한 표정의 천상기에게 천봉서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돈은 편안함과 호사를 가져다주는 데는 비할 바 없는 능력을 지녔다.

무엇보다 거실로 들어오는 탄천의 풍경과 느끼지 못하는 사이 실내의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고 있는 것이 그랬다.

그뿐이면 이곳을 70억짜리 빌라라 하기 어려웠을 거다.

빌라의 바로 앞 도로를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데도 볼륨을 제거한 TV 화면을 보는 것처럼 천중명은 그 어떤 소음도 들을 수가 없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래서인지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어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곽대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액정에 올라온 이름은 허선영이었다.

당연하게 유진교의 조언을 기억한다.

추천서를 원한 건 아니지만, 일단 신세를 졌으니 그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들어주는 것이 공평한 일이기도 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저, 허선영이에요.

“예.”

천중명은 부러 덤덤한 음성으로 그녀의 전화를 상대했다.

- 지금 어디 계세요? 괜찮으시면 잠시 뵙고 싶은데요.

“들으셨을 거 같은데요? 집에 있습니다.”

- 제가 그리로 가도 되나요?

어색한 관계라 밖에서 뻑뻑하게 만나는 것보다는 둘만 있는 빌라가 낫겠지 싶었다.

“그래요. 집에서 봅시다.”

- 네, 그럼 30분쯤 뒤에 도착할게요.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어둠 속에서 보았던 허선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제법 당차게 행동했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렇게 공손한 건지 궁금했다.

30분 뒤면 알게 될 일이라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유진교의 머그잔을 씻은 천중명은 다시 물을 끓여 두 봉짜리 커피를 만들어서는 홈바에 앉았다.

와이드비전을 보는 듯한 거실 창, 100인치쯤 되는 TV, 대리석 바닥, 숨겨진 조명, 거기에 장식장과 소파, 그 외에 소파와 장식장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가슴 후련한 공간까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돈 좋다.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어서.

그러나 올바르게 벌어야 당당하게 쓸 수 있는 거고, 이깟 것들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 가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 죽이라는 지시까지 서슴지 않으면서 사는 게 정말 행복할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천중명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

갓 피어난 담배 연기가 천장으로 끌려가서는 환풍구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이 정도 빌라에 현금 70억 원만 딱 주고 끝난다면?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나.

몸뚱이 바뀌고 어머니 잃고서 이따위 것을 얻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금은 엉뚱한 후계자 싸움에 말려들고 말았다.

띵동댕동. 띵동댕동.

벌써 30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문으로 움직인 천중명이 바라본 화면에 실제로 허선영이 있었다.

빗살로 된 정문의 버튼을 눌러준 천중명은 그녀의 차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건물의 현관문 버튼을 또다시 눌러주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끈 뒤에 현관문을 열고서 그 앞에 섰다.

때앵.

엘리베이터의 벨소리가 들렸고, 잠시 뒤에 과일 바구니를 든 허선영이 천중명의 빌라 앞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들어와요.”

“네.”

웨이브가 진 머리칼,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원피스인 것까지는 좋았다. 보기에도 깔끔했고.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오지은이 입었던 것과 비슷한 검정원피스 차림이었다.

물론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지만 말이다.

“커피 마시고 있었는데 드실래요? 대신 봉지 커피밖에 없는데 괜찮겠어요?”

“네에.”

“거기 앉아요.”

소파에 앉기에는 불편한 복장처럼 보여서 천중명은 홈바의 건너편을 가리켰다.

홈바 아래로 다리를 넣으면 서로 편할 것 같아서였다.

별로 어려울 것 없이 커피를 타서 허선영의 앞에 놓아줄 때였다.

바보처럼, 멍청이같이 시선이 그녀의 가슴으로 가고 말았다.

원피스의 검은색과 가슴골의 살이 또렷하게 대비된 것도 있었고, 홈바에 앉아 있는 허선영에게 서서 잔을 권하느라 그런 것도 있었다.

곧바로 고개를 들었는데도 허선영은 천중명의 시선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허선영이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저, 지금 자도 돼요.”

천중명의 커피가 아까 타 놓은 것이어서 망정이지 지금 건네준 허선영의 것처럼 뜨거웠다면 입천장 다 뜯길 뻔했다.

“잠시만요.”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거기에 두었던 옷 가방에서 셔츠를 하나 꺼냈다.

옷을 들고 돌아섰을 때 드레스룸 앞에 허선영이 서 있었다.

“주세요.”

분명 허선영에게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사람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먼저 씻을게요.”

역시!

천중명은 힘없이 웃었다.

허선영은 확실히 샤워 후에 천중명이 들고 있는 셔츠를 입고 나오란 뜻으로 받아들인 게 분명했다.

“오해한 모양인데 이걸 걸치고 있었으면 해서 찾은 겁니다. 시선이 불편해서 편하게 이야기하기 어렵잖아요.”

허선영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가요. 가서 남은 커피마저 마십시다.”

셔츠를 건네준 천중명이 드레스룸을 빠져나가는 찰나였다.

“왜 이러세요!”

화가 난 허선영의 음성이 천중명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사람을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그러는 건데요? 나한테 정말 바라는 게 뭐예요?”

허선영에게 천중명이 모르는 애처로운 사연이 있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 염병할 사연을 지금의 천중명이 전혀 모른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변태스러운 관계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그러면 관음증 같은 거예요? 봐야 하는 거 뭐 그런 걸 원하세요?”

기가 막혔지만, 웃을 수도 한숨을 쉴 수도 없었다.

천중명의 앞에 서 있는 허선영의 표정이 워낙 절박하고 힘겨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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