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020. 돈이 많으니 별짓들을 다 하는구나 (2)
빌라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는데, 반갑다기보다는 솔직히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여태껏 천호득의 손바닥에서 날뛴 꼴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풀옵션 빌라를 상상하면 되겠다.
홈바에 출입 카드가 놓여있었고 라면, 햇반, 커피까지 고대로 채워두었다.
“커피 마실래?”
“내가 타겠습니다.”
“둘이 있을 땐 편하게!”
“지랄마시고 나의 마음을 받아주세요, 대표님.”
거칠 것 없이 움직인 곽대출의 노력 덕분에 남자 둘이서 넓은 빌라의 홈바에 앉아 봉지 커피를 앞에 두었다.
자정이 다된 시간이었다.
“내일 병원에 들렀다가 다른 일 없으면 봉천동 집에서 짐 가져와.”
대답하기 번거로웠는지 곽대출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나씩 가자. 우선 재벌 싸움에 끼어들려면 내막을 알아야 하는데 너나 나나 이쪽은 꽝이잖아.”
“솔직히 말이 100억이니 200억이니 하는 거지, 나는 실감도 안 난다. 막말로 70억을 깔고 이런 집에 사는 것도 이해 안 되고.”
컵을 잠시 내려다보았던 곽대출이 시선을 들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조 단위면 더 말해서 뭐하겠냐. 그 정도면 사람 한둘 죽이는 것도 별거 아닐 것 같다. 누가 나한테 10억쯤 주면서 부탁했어도 흔들렸을 것 같거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전하는 고해 같은 느낌이었다.
“안 어울리니까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나는 재벌의 생리와 경영에 필요한 것들을 익히는 데 최선을 다할 테니까 내 뒤를 네가 지켜줘.”
“그거야 내 전공이지요, 대표님.”
답을 하는 곽대출은 한결 가벼워진 얼굴이었다.
“염병할, 어차피 이럴 걸 괜히 빙 돌아왔다.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는 건가?”
어머니의 죽음이 남긴 허탈함이 아직 몸 곳곳에 분명하게 묻어있었다. 그러나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어서 천중명은 머그잔의 커피와 함께 남은 흔적들을 가슴 저 깊은 곳으로 삼켰다.
“그나저나 미래나 과거를 보는 건 어떻게 된 거지? 그냥 뜬금없이 나오는 건가?”
“그거? 나도 전혀 짐작이 안 가. 전기 감전은 아니고, 신기가 생긴 건 더 아닐 텐데 당최 감이 잡혀야 뭐라고 말을 하지.”
“하여간 이럴 때 보면 믿음이 안 가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어나.”
커피 잔을 싱크대에 올린 두 사람은 각자 샤워실로 향했다.
갈아입을 옷이야 산에 갈 때 가져갔던 옷 가방이 있고, 침대에 이불까지 있어서 잠자리 걱정도 없었다.
시원하고 개운하게 씻었다.
거실과 주방이 그렇더니 샤워부스 안쪽에도 김순례가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담배?”
샤워를 마치고 나온 천중명을 홈바에 앉은 곽대출이 불렀다.
“뭘 또 그런 눈으로 그랴? 이렇게 하나 해줘야 숙면을 취하는 거라니까, 그걸 몰라?”
홈바에 마주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알았다.
곽대출의 눈가에 흥분이 묻어있는 것을 말이다.
“재미있냐?”
“솔직히 기대는 된다.”
“뭐가?”
“내가 아는 너는 둘 중 하나잖아. 지경그룹을 먹거나 죽거나. 앞쪽이든 뒤든 짜릿한 판국에 운이 좋으면 지경그룹 총수의 최측근이 되는 건데 대표님이라면 이게 덤덤하겠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일부터다. 잘 부탁한다.”
“염려 마셔.”
뭔가 운명에 멱살을 잡힌 듯한 하루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
새로운 하루는 전화로 시작되었다.
둘이서 일어나 시원하게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해결한 직후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어대며 처음 보는 번호를 액정에 띄웠다.
오전 7시에 도대체 누구지?
천중명은 덤덤하게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천중명 대표님이십니까? 왕회장님 지시로 전화드렸습니다. 유진교입니다.
“네, 그런데요?”
- 8시까지 빌라로 찾아뵐 예정인데 괜찮으십니까?
톤이 굵어서 굉장히 묵직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 오늘부터 업무에 복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왕회장님께서 제게 당부하신 것은 대표님이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본 교육이었습니다.
“알겠습니다. 8시라고 하셨죠? 그때 뵙죠.”
천중명은 어제 있었던 천호득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통화를 마쳤다.
어차피 덤벼들기로 한 거고, 누군가 재벌의 삶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참이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먹은 것들을 대강 치운 곽대출에게 천중명은 지금의 통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그냥 병원으로 가. 끝나는 대로 전화하고. 가능한 한 빨리 직원으로 올려서 차와 급여, 경비도 받게 해볼게.”
“알았어.”
유진교가 들어올 때까지 여유는 충분했다.
둘이서 커피와 담배 하나 피워주면서 좀 더 세세한 의논을 마쳤고, 7시 30분쯤 곽대출이 먼저 집을 나섰다.
짐을 모두 봉천동의 집으로 옮겨놓아서 정장은 없었다.
그나마 깨끗한 티셔츠와 면바지 차림으로 천중명은 창밖을 보았다.
아직 꿈을 꾸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외면하려고 그렇게 버둥댔던 재벌, 후계자, 암투 같은 것들이 멱살을 움켜쥔 것처럼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도망은 없다.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천중명이 있을 뿐이다.
천중명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띵동댕동. 띵동댕동.
인간미 없을 정도로 정확한 시간에 벨이 울렸다.
먼저 정문을 열어준 천중명은 이어서 빌라 건물의 입구를 열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유진교입니다.”
윤 실장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남자였다.
살집이 별로 없어서 일할 때 신경질 좀 부리겠구나 싶은 인상이었다.
“들어오세요.”
회색 정장에 빗겨난 세로무늬의 타이를 한 유진교가 거실로 들어와 주방과 안쪽을 둘러보았다.
어디에 앉을지를 묻는 것처럼 보였다.
“소파가 편하세요? 아니면 저기 홈바에 앉으실래요?”
“소파가 낫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커피 하실래요?”
“감사합니다.”
주방으로 걷는 천중명의 뒤에서 소파에 앉은 유진교가 다시 빌라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봉지만 뜯으면 되는 커피가 바로 준비되었다.
“여기요.”
머그잔 두 개를 들고 움직인 천중명이 그중 하나를 유진교 앞에 놓아주었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십니다.”
“뭐라고 들으셨는데요?”
“굉장히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사교성이 떨어지신다고 들었습니다.”
천중명은 픽 웃으며 머그잔을 들었다.
이 양반은 윤 실장이라는 윤만석과 함께 천호득의 심복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왕회장의 지시를 받고 왔다손 치더라도, 조금 전에 했던 평가를 곧이곧대로 들려주기는 어려웠을 거였다.
“무슨 교육을 받나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화로 말씀드렸던 경영과 관련된 일들이고, 다른 하나는 이너 서클에 데뷔하는 일입니다.”
천중명은 잠자코 유진교를 바라보았다.
이너 서클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오늘 중으로 코리아클럽에 가입을 신청할 예정입니다. 제가 오후에 가입비 2억과 연회비 1억을 대표님 이름으로 송금하겠습니다.”
“그러세요.”
돈으로 지랄을 떠는 놈들이니 이 정도쯤 할 줄 알았다.
“대표님은 재계 서열 5위 집안입니다. 다만, 정출이 아니기 때문에 데뷔 형식으로 참석하시고, 이후에는 2부 격인 세컨더리 모임에 집중하십시오.”
이건 알아듣지 못했다.
천중명의 눈을 본 유진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셨을 리 없는데 설명을 원하시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대로 듣고 싶어서요.”
“정출이 아닌 후계자, 신생 기업으로 천억 이상의 개인 재산을 소유한 분들의 모임이 따로 있습니다. 그 역시 코리아클럽에 가입된 회원만 참여할 수 있으니 우선 그들과 친분을 다지십시오.”
“그런 뜻이었군요.”
“대표님.”
유진교가 굵직한 음성으로 천중명의 반응을 잘라낸 뒤에,
“허선영 씨를 만나서 함께 가시는 게 좋습니다.”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이너 서클 모임에 추천서를 주신 분이 허세직 의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 정도 배려는 있어야 합니다.”
천중명의 반응 따위 상관없다는 듯 유진교의 말투는 단호했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지시인데?
고개를 갸웃했던 천중명은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머그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느닷없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이 시커멓게 변하고 있었다.
이건 또 왜 이러는 거야?
우주의 한 공간에 던져진 듯한 광활함과 좁은 칸에 갇힌 답답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어둠을 어떻게 설명할까?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뜬금없이 이러면 도대체 적응이란 걸 어떻게 하겠냐고!
불평을 들어서였을까?
눈앞이 밝아지더니 역시나 물에 젖은 유리 너머로 보는 것처럼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거 우리 연구실에서 만들 수 있어?”
“예. 대략 6개월 정도 주시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고구마처럼 생긴 남자가 작은 눈을 번득이며 답을 들었다.
“그러면 우리가 개발하는 거로 해. 여기 사업계획서와 비교해서 빠져나갈 한 가지 정도는 다르게 해야 하는 거 알지?”
“예.”
소파의 상석에 앉은 고구마가 오른편에 앉은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나왔던 거랑은 완전히 달라. 이 계획서대로만 제품이 나오면 당분간 국내 화장품 시장의 독주는 물론이고, 해외 판매도 끝장나요.”
화장품 시장이라고?
상석에 앉은 거로 봐서 분명 오너나 대표쯤 될 텐데 천중명은 당연하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우리도 6개월이면 만드는 걸 가지고 판매 수익을 평생 나눠 달라면 되나? 하여간 욕심들은!”
“그래도 손도운이 이 바닥에서는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럼 뭐해? 욕심이 배 밖으로 나왔는데! 막말로 연구했다고 제품 만들 공장이 있어? 아니면 판로가 있어?”
손도운?
이 역시 천중명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연구원들 입단속 잘하고 이대로 진행해. 그리고 6개월 걸린다고 했으니까 한 달 단축하는데 1억씩 쏜다. 제품을 한 달 안에 만들어내면 5억이야, 5억.”
어쩐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둘 다 전혀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뭐해? 얼른 가서 1분 1초라도 빨리 만들어야지.”
“알겠습니다.”
연구원이라는 남자가 몸을 일으키면서 어둠이 천중명의 시야를 서서히 감싸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려다가 이랬다.
그럼 지금 커피는 어떻게 된 거지?
세상이 한순간에 돌아왔고, 천중명의 입으로 머그잔이 와 닿았다.
머그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그 찰나에 앞의 대화를 보았던 모양이었다.
미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에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평택과 이천은 언제 방문하실 생각이십니까?”
커피 마시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유진교의 질문이 날아왔고, 그의 시선이 천중명의 복장을 살피고 있었다.
“오후로 하시죠. 아무래도 정장 차림은 해야 할 테니까요.”
“훌륭한 판단이십니다.”
고작 옷 갈아입겠다는 말에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다.
“사업에 관한 브리핑은 오후에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업체를 동시에 관리하려면 아무래도 통합 사무실을 운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형들처럼 말이죠?”
“그렇습니다. 참고로 화장품과 냉동창고는 대표님의 능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겁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두 회사에 쏠린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유의 굵직한 음성으로 유진교가 말을 이었다.
“오후 방문 예정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오전에 코리아 클럽 일을 마무리하고 그 시간에 맞춰 오겠습니다.”
“2시로 하시죠.”
“그럼 그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지경디자인의 고상득 상무가 대표님을 대신해서 평택과 이천의 상황을 번갈아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참조하십시오.”
답을 한 유진교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별로 이야기 나눈 거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얼추 40분이 흘러 있었다.
현관으로 걸어간 그는 천중명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곧바로 문을 나섰다.
참 바쁘고 번거롭게 산다.
이 정도 이야기라면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은데 그랬다.
현관문을 닫고 나자 한숨이 절로 나왔는데 천중명은 곧장 소파로 돌아가 휴대전화기를 들었다.
뜬금없이 떠올랐던 장면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천중명은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