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9화 (19/315)

# 19

019. 돈이 많으니 별짓들을 다 하는구나 (1)

아픈 여자아이와 곽대출을 죽이겠다며 협박하는 재벌 총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관심 없다는데 사람을 죽이겠다고까지 하면서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천중명의 대꾸가 곱지 않았고,

- 허허허.

돌아온 웃음은 어쩐지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더 까불면 천중명조차도 죽여 버릴 수 있다는 독기처럼 들리기도 했다.

- 네놈이 바뀌었다는 윤 실장의 표현이 이제야 이해되는구나.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 돼.

“그러지 마시고 내일이라도 후계자를 정하십시오.”

- 그렇게 하면 후계자가 된 놈이 떨어진 둘을 노리겠지.

“후계자를 정하고 지분을 넘기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코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이제는 쉬어야겠다. 끊기 전에 한 가지만 알려주마. 만약 내일까지 회사로 복귀하지 않으면 내가 말한 연놈이 죽은 걸 발견할 거고.

무척이나 재미난 이야기여서 뜸을 들인다는 것처럼 천호득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 뒤에 널 후계자라고 발표하겠다. 물론 지분은 내가 만족할 만큼의 경영성과를 내면 그때 물려줄 거라고 할 거고.

“회장님. 제가 지옥문을 열면 회장님도 그 안에 들어가시게 될지 모릅니다.”

- 모처럼 흥미로운 제안이구나. 내일 복귀했다는 소식과 이후의 움직임을 기대하마.

길었던 통화가 한순간에 끝났다.

이 역시 천호득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후.”

고개를 떨구고 휴대전화기를 내려다보던 천중명은 말없이 그걸 윤 실장에게 내밀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어쩐지 천봉서와 천상기가 말했던 어머니라는 여자의 행방을 이 양반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용인에 계십니다.”

“회장님도 알고 계시죠? 그 장소?”

분명 천호득도 알고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고,

“그렇습니다.”

역시나 윤 실장이 확인해 주었다.

목이 말랐고,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커피가 있나요?”

“믹스 커피가 있습니다.”

“하나 부탁하죠. 밖에서 마실 테니까.”

멈칫했던 윤 실장이 “알겠습니다.”하고 답을 건넸다.

둘이서 승합차에서 내렸다.

‘괜찮으니까 긴장 풀어도 될 것 같다.’

‘일단 경계하고 있을게.’

곽대출과 시선을 나눈 천중명은 승합차에 기대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산에서는 해가 일찍 떨어진다.

그래야 하는데 오늘의 태양은 이 상황을 좀 더 보고 싶었는지 아직 산의 대가리에 얼마 남지 않은 햇살을 승합차 주변에 뿌려대고 있었다.

바람 좋았다.

생기를 끌어올리는 나무 특유의 향도 좋았다.

싸늘한 저녁 기운이 퍼지는 가운데 봉지커피의 달달한 냄새가 바람과 산과 나무의 냄새를 다독인 뒤에 천중명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종이컵을 받은 천중명이 시선을 돌린 곳에서 곽대출 역시 커피를 받아들고 있었다.

천중명은 픽 웃으며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곽대출은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을 거다.

이곳의 남자들을 완전히 신뢰하기 전에는 어떤 것도 입에 넣지 않을 정도의 조심성이 있어서 그렇다.

후루룩.

그런데 곽대출이 기분 좋은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 저런 판단은 곽대출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지.

솔직히 이런 저녁의 산속에서 봉지 커피의 유혹을 이길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이미 긴장감은 풀린 상태였다.

“대출아. 담배 하나 주라.”

종이컵을 든 곽대출이 다가와 담배를 건네주었고, 둘이서 불을 붙였다.

“윤 실장님. 전화번호 주세요.”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꺼내서 윤 실장에게 건넸다.

“윤 실장이라고 입력하지 마시고, 이름 찍어 넣으세요.”

“연락은 총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걸 누가 몰라요? 오늘 일로 의논할 게 있을지 몰라 그러니 일단 이름하고 번호 찍어놓으세요.”

짧게 망설였던 윤 실장이 마지못한 얼굴로 천중명의 휴대전화기에 번호와 이름을 찍어 넣었다.

“여기 있습니다.”

담배를 입에 문 상태로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받아 ‘윤만석’이라고 찍힌 이름을 확인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차 세워둔 곳으로 바로 갈 테니까 먼저 출발하세요.”

지시를 들은 윤만석이 지고 싶지 않다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빌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총수님의 지시로 명의를 빌려서 사 두었습니다.”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돈이 많으니 별짓들을 다 하는구나 싶었다.

**

지경갤러리 이사장 강승애는 반짝이는 브로치를 매단 화려한 투피스에 부풀린 머리 모양을 하고 천봉서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어서 와. 회의가 많이 힘들었지?”

“나야 회장님처럼 숨 막히는 일이 아닌데요, 뭘.”

두 사람은 널따란 집무실의 한쪽에 자리했다.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유리 앞의 이 테이블은 의자가 달랑 두 개여서 천봉서 부부의 고정석이었다.

“회장님. 도련님이 좀 이상해요.”

다리를 꼬고 앉은 천봉서가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강승애를 바라보았다.

“친정 쪽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사조직을 운영하는 모양이에요. 나도 최근에는 이상하게 도련님의 눈빛과 웃음이 걸리구요.”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그렇지 않아도 오늘 윤 실장의 꼬리를 잡았다며 전화까지 했더구만.”

천봉서의 말에 강승애는 눈초리를 순종적인 느낌으로 바꾸었다.

“회장님.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조심은 하세요.”

“알았어. 그렇더라도 상기가 아니면 당장 누구에게 아쉬운 일을 맡길 건지도 생각해야지. 녀석이 맡은 업체가 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믿을 땐 확실히 믿어주자고.”

“우리 회장님의 너그러운 성품을 이용하려는 인간들밖에 없으니 내가 자꾸 의심만 느나 봐요.”

멋쩍었던 모양인지 천봉서가 나직한 웃음을 먼저 흘렸다.

“기다려 봐. 상기가 윤 실장만 잡아내면 지겨운 이 기다림도 끝이니까. 총수님이 모든 것을 털어내고 은퇴하시면 되는 거잖아.”

무언가를 말하려던 강승애가 눈치를 살피며 꿀꺽 삼켰다.

“총수님이 마음을 바꾸는 것은 염려하지 마. 계획도 있고, 내가 또 그렇게 밋밋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 강승애의 속을 읽은 것처럼 천봉서는 또 넉넉한 말을 꺼내놓았다.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거 아니죠?”

“상기가 있잖은가, 상기가. 그러니 지금은 우선 녀석을 다독여줄 필요가 있지.”

“공을 내세우면 어떡해요?”

“흐허허.”

강승애의 질문이 귀엽다는 투로 천봉서는 여유로운 웃음을 쏟아냈다.

“계속 손안에 있으면 지금 운영하는 회사로 여유롭게 사는 거고, 고개를 쳐들면 막내 놈처럼 되는 게 아니겠나.”

“이럴 때 보면 회장님은 사업을 위해 태어나신 분 같아요.”

낯간지러운 말이 건너간 다음이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날게요.”

강승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배웅을 위해 천봉서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 늦으세요?”

“저녁에 모임이 하나 있어.”

“네. 건강 상하지 않게 신경 쓰세요.”

“그러지.”

강승애의 당부를 천봉서가 어색하게 받았다.

오늘 저녁의 약속이 최근에 새롭게 만난 병아리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어서였다.

**

윤만석과 헤어진 천중명은 그 길로 자동차를 향해 걸었다.

꼬박 30분쯤 걸어서 승용차 앞에 도착했을 때는 기다림에 지쳤던 어둠이 빠르게 주변에 퍼지는 시간이었다.

“결국,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거구만.”

오는 동안 통화 내용을 들었던 곽대출이 조수석에 올라가며 탄식처럼 말을 뱉었다.

“대표님. 가는 길에 좋은 식당 있으면 저녁이나 먹자.”

“이젠 그럴 여유가 생겼어?”

“산에서 내려오는 게 문제여서 그랬지, 내일까지 서울에 도착하는 것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잖아. 밥은 먹어주고 부려야지.”

천중명은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는 차를 몰았다.

라이트 앞으로 계절과 시간을 앞선 부지런한 벌레들이 기운차게 달려들고 있었다.

“70억짜리 빌라를 원룸 사듯 살 정도면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지?”

양손의 손가락을 펼쳐보았던 곽대출이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무튼, 지금까지 우리를 감시했었다는 건데?”

흙길이 끝나고 시멘트로 포장한 길이 나타났다.

“나야 그렇다 치고 정말 진희를 노릴까?”

곽대출이 진지한 얼굴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사표 쓴다고 나를 죽이려던 놈들 아니냐? 내가 왜 몸이 바뀌었는지 잊었어?”

“아! 그랬지? 그렇다는 건 진희를 진짜로 노린다는 뜻이네. 그럼 혹시 내일 갑자기 보자는 것도 이것 때문인가?”

표정만 본 곽대출은 칼 하나 차고 유진희 옆에 붙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저녁 먹고 서울 가는 길에 천천히 생각하자.”

“그러자, 대표님.”

20분쯤 어두운 길을 달려서 마침내 아스팔트 도로를 만났고, 거기에서 또 20분쯤 달린 뒤에 백숙집을 찾았다.

대략 저녁 8시쯤 된 시간이었다.

“할머니! 여기 백숙 두 마리요. 죽 끓이지 말고 공깃밥만 두 개 주세요.”

“예? 두 마리요? 그걸 다 자시겠어요?”

“그건 걱정 마시고, 죽 대신 말아먹을 공깃밥 주시는 것 잊지 마세요.”

둘이서 오래된 시골집의 방 하나를 차지한 뒤에 벽에 기대앉았다.

방구들에서 올라오는 뜨끈뜨끈한 온기가 백숙을 먹기 전에 한숨 자는 건 어떠냐며 천중명의 상체를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길게 잘라놓은 오이와 풋고추, 양파, 고추장, 김치가 올려진 낡은 쟁반이 들어왔다.

쟁반을 디민 꼬부랑 할머니가 궁금한 눈으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술은요?”

“운전해야 돼서요.”

할머니가 나가기 무섭게 둘이서 오이 하나씩을 들고 버적거리며 먹었다.

“구례는 오이가 죽여!”

입가에 흥건하게 물기를 묻혀가며 곽대출은 오이를 시원하게 씹어댔다.

“궁금한 게 있다.”

그러면서 생각난 것이 있다는 투로 천중명을 바라보았다.

“전에 훈련받을 때. 절벽에서 뛰어내릴 것도 계산했던 거냐?”

“그건 갑자기 왜?”

“늘 궁금했었거든. 나중에 따로 묻기는 또 좀 그랬고.”

“네가 다치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끌려서 그렇지, 절벽에서 뛸 계산은 없었다.”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곽대출은.

“그럼 그때 잘못됐으면 불구나 죽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뛰기 직전에 확인은 했었지. 저기로 구르면 최소한 불구나 죽지는 않겠구나 싶은 곳.”

“하아. 역시 나는 네 적수가 아니다.”

말을 마친 곽대출이 오이 하나를 또 집어서 베어 물었다.

“그건 왜 물어봤어? 지금 우리가 그때랑 비슷하다는 뜻이냐?”

“그냥 궁금했다니까요, 대표님.”

“나도 하나 묻자. 내가 또 비슷하게 절벽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하면 이번에도 못하겠다고 버틸 거냐?”

씹던 속도를 천천히 줄이던 곽대출이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들었다.

“내가 없이 살았어도 집을 날리면 날렸지 비굴하게 살지는 않았다. 지금껏 네 옆에 있었던 건 네가 가진 돈 때문이 아니라 봉천동에서 부탁하던 눈빛을 믿었기 때문이고. 사람을 뭐로 보고?”

버적.

곽대출이 보란 듯이 오이를 물었다.

“결국, 지옥문을 열어야겠지?”

“대표님이 천국문을 여는 건 이상하잖아?”

“오이나 처먹어.”

“흐흐흐.”

곽대출이 징그럽게 웃고 났을 때 가랑이를 쩍 벌린 닭 두 마리가 뽀얀 자태를 뽐내며 들어섰다.

백숙의 참맛은 역시 결로 찢어먹는 다리에 있지 않을까.

둘이서 산적처럼 뜨거운 닭다리 하나씩을 들고 가로로 뜯어내 입에 욱여넣었다.

이후의 대화는 ‘죽인다’거나 ‘역시 뛰어다니던 놈들이라 맛이 다르다’라는 등의 생존본능에 입각한 감상평이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대략 40분이 지난 뒤에 닭은 뼈다귀와 가슴살, 그리고 국물만 남겼다.

천중명과 곽대출은 가슴살을 잘게 찢어 넣은 국물에 공깃밥을 부어서 기분 좋게 다 먹었다.

“그럼 내일부터 출근합니까?”

식사를 마친 곽대출이 물수건을 집으며 던진 질문이었다.

“그래야지, 뭐.”

“이왕 할 거면 무섭게 좀 합시다, 대표님.”

“무슨 소리인지 정확하게 말해.”

“도깨비 때처럼 대드는 놈들을 전부 울부짖게 만들어 달라는 거다.”

“야! 정신 사나우니까 존댓말을 할지, 반말을 할 건지 한 줄로만 해라.”

물수건에 손을 닦던 곽대출이 시선을 들었다.

“대표님의 모습이 지금 내 눈에 그렇게 보여서 그렇다.“

“내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

“똑똑하십니다.”

곽대출의 답에 천중명은 실없이 웃고 말았다.

“뭔지 모를 때면 한 줄로 가라며? 목표까지 직선으로. 어차피 빠져나가기는 틀린 싸움 같은데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지 않나?”

“돈에 욕심 없었는데 상황 참 엿 같다.”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이왕 살기 위해 달려들 거라면 제대로 손에 넣는 게 좋지 않을까. 움켜쥔 뒤에 하는 꼴 봐서 나눠주면 반항도 못 할 테니까.”

토를 달기조차 어려운 곽대출의 조언이었다.

이런 면이 있었어?

새삼스럽다는 표정의 천중명을 향해 곽대출은 별거 아니란 듯 어깨를 삐죽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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