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018. 이제 우리 뭐하지? (2)
세상이 훅 밝아졌다.
하늘, 바람, 산, 그리고 그것들만큼이나 변함없이 험상궂은 곽대출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뭘 본 거지?
휴대전화기에서도 감전이 되나?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천중명은 얼른 곽대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궁금한 얼굴로 ‘왜? 뭐?’ 하는 표정을 보일 뿐, 천중명이 과거를 보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 그날 잠자리를 안 해서 그런 건가요?
그 직후에 허선영의 질문이 건너왔다.
천중명은 둘이서 육체관계가 없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허선영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과거를 본 것도 어리둥절한 판에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대꾸를 하겠나.
- 지금 갈게요. 오늘 중명 씨랑 있을게요.
“후.”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천중명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뭐가 이렇게 절박할까?
4선 국회의원의 딸이 몸을 던지겠다고 할 정도로.
허선영의 입장에서야 치욕을 삼킨 제안을 던진 꼴이겠다만, 천중명이 전혀 내키지 않는 데 문제가 있었다.
- 어디세요?
“그만합시다.”
천중명은 차가운 음성으로 그녀의 울음 묻은 제안을 밀쳐냈다.
허선영은 말없이 버텼고, 천중명은 그 시간이 지겨웠다.
-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지겹던 통화가 끝났다.
“뭐야? 뭐가 그렇게 심각해?”
“통화가 문제가 아냐.”
“왜? 돈 빌린 거라도 있었데?”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더 펼치기 전에 천중명은 통화 중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감전돼야 보인다면서?”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감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하는 곽대출의 어깨를 천중명이 툭 쳤다.
“야, 이씨!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잖아!”
“지금 생각한다고 나오는 것도 없을 테니까 우선 내려가서 생각하자.”
천중명의 말에 곽대출이 순순히 몸을 돌렸다.
“거, 그런 순간에 로또 번호라도….”
“쓸데없는 소리 할래?”
곽대출이 킬킬거리는 순간이었다.
우우웅.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곽대출의 휴대전화기가 짧게 몸을 떨었다.
문자 좀 확인하는 거 일 아니다.
[삼촌. 진희인데요. 시간 되세요?]
그런데 곽대출이 들이민 문자 내용은 전혀 무시할 게 아니었다.
“전화해 봐.”
“응.”
곽대출이 곧장 문자를 보낸 번호를 눌렀다.
**
천상기는 양손을 비벼가며 솟구치는 흥분을 눌렀다.
“윤 실장, 이 너구리. 우리 이제 꼬리를 찾았으니 조만간 얼굴 한 번 봐야지?”
그의 책상 위에는 A4 용지 크기의 사진들이 놓여있었다.
산을 올라가는 천중명과 곽대출의 모습이 댓 장, 그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들의 사진이 또 그만큼 됐다.
사진을 뒤로 넘겨 가며 확인한 천상기는 마침내 휴대전화기를 들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회장님. 접니다. 드디어 윤 실장의 꼬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 흐음.
천봉서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신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중명이 놈을 감시하는 놈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놈들을 타고 올라가면 윤 실장이 나올 거라 확신합니다. 확인되는 대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 수고했다.
“저는 회장님께서 알아주시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보상을 받은 느낌입니다.”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넘어왔다.
- 결국, 왕회장님이 윤 실장을 통해서 그 녀석을 싸고돌았던 모양이구나. 그 녀석은 아직 산에 있느냐?
“그렇습니다.”
-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우리 눈을 피해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만, 그 상황에서 온갖 한량 짓을 하다가 느닷없이 산에 들어간 건 또 뭔지. 그 점에 대해서도 알아봐.
“예,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액정을 확인하는 꼼꼼함을 발휘한 뒤에야 천상기는 휴대전화기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자! 우리 천봉서 회장님께 뭘 준비해 드려야 총수님께 이빨을 드러낼 각오가 생길까?”
사진을 다시 손에 든 천상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에서 총수님이 지분을 네게 넘기려고 한다면 분위기가 제법 살겠지? 그렇지 않니, 막내야?”
마치 천중명이 실제로 듣고 있다는 것처럼 천상기의 표정은 진지했다.
**
곽대출이 해결사 한답시고 괴롭혔던 사람이 유대섭, 그의 딸 이름이 유진희였다.
치료를 위한 병원 빚을 독촉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해결사가 유대섭이 빚진 돈 1억을 갚아주었고, 거기에 병원비까지 보태주었다.
유대섭과 그의 딸 유진희는 천중명도 한 번 봤다.
산에 오기 전에 병원비 하라며 돈을 더 전달해줄 때 말이다.
병원에 있느라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그녀가 곽대출에게 혹시 내일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이유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곽대출의 걸음이 몹시도 빨랐다.
“급한 목소리는 아니었다면서?”
“그래도.”
약속은 내일이었다.
느긋하게 내려가도 자정 전에는 서울에 도착할 텐데 곽대출은 어지간히 마음이 바쁜 모양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미끄러지듯 내려온 두 사람은 높이 솟은 바위산을 보며 손을 털었다.
이쪽은 전문 산악인이 아니고는 올라갈 방법이 없는 코스여서 주변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곽대출이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트는 순간이었다.
엄지만 편 오른손 주먹을 배 앞에 감춘 천중명이 그걸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근처?’
천중명은 짧게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신발 끈 좀 다시 맬 테니까 물이나 마셔.”
그리고는 오른쪽 무릎을 구부려 신발의 끈을 부여잡았다.
이 정도로 가까이 온 적은 없었다.
어쩌면 곽대출이 너무 서두른 바람에 물러날 시간을 뺏긴 건지도 몰랐다.
실제로 신발 끈을 고쳐 매면서 천중명은 고민했다.
이대로 모른 척 갈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저놈들에게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경고할 것인지를 말이다.
몸을 일으킨 천중명은 마음을 굳혔다.
이대로 유진희를 만나면 아픈 여자아이까지 애꿎게 엉켜 들 수 있었다. 이미 한번 돈을 건네줘서 가뜩이나 눈에 띄었을 여자아이여서 가능성은 그만큼 높았다.
“물 좀 줘.”
곽대출에게서 물병을 건네받은 천중명은 눈짓으로 의심 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끄덕.
둘만 알아볼 수준의 빠른 방향지시였고, 확실한 답이었다.
“소변 좀 보고 갈게.”
“기껏 물 처먹으랬더니 무슨 닭이냐?”
“아, 거! 우리 대표님 너무 야박하시네.”
곽대출이 물병을 가방에 담은 뒤에 등에 짊어졌다. 그러고는 천중명이 가리킨 방향에서 비스듬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놈들에게 일직선으로 달려가기 가장 좋은 방향이었다.
“후회하지 말고 대표님도 얼른 와.”
“내가 왜 후회를 해?”
천중명이 곽대출의 옆으로 걸었다.
“후회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천중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와락! 와락!
천중명과 기다리던 곽대출이 사람 키 높이의 바위를 휙 타고 올랐다.
휘이익!
곽대출이 원숭이처럼 몸뚱이를 날려 건너편 바위로 날았고,
파바바바박!
천중명은 아래쪽 바위 방향으로 뛰었다.
후다닥! 후다다닥!
걸렸다! 그것도 다섯 놈이나!
산자락의 끝을 타고 뛰는 다섯이 보였다.
날렵한 데다, 절제된 동작이긴 했지만, 이쪽은 특작부대 출신 도깨비다.
휘이익! 철퍼덕!
바위를 뛰어넘은 곽대출이 가장 뒤에서 달리던 놈을 덮쳤고,
퍽! 퍼벅!
천중명이 중간에 뛰어들어 두 놈을 들이받았다.
“잠깐! 커흑! 잠깐만!”
구부린 엄지로 눈알을 파내려는 곽대출을 밑에 깔린 놈이 악착같이 만류하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들아! 정체를 말해! 아니면 진짜 눈알을 파버릴 거니까!”
깔린 놈이 반항하는 거?
목줄을 잡혀 숨도 못 쉬는 상태에서 엄지를 구부린 곽대출의 오른손목을 겨우 붙잡은 꼴이어서 그런 거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보냈어! 누구냐고!”
나직한 울부짖음처럼 들렸다.
상대의 눈알에 엄지를 디민 채 독하게 변해버린 곽대출의 표정은 천중명이 보아도 섬뜩했다.
달려들려던 네 놈의 앞을 천중명이 막아서 있었다.
놈들은 천중명과 곽대출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은 명령이라면 사람도 죽이는 놈들이라는 것을 천중명은 분명히 안다.
“대출아. 그 새끼 눈알 파버려.”
“그렇게 하지요. 대표님.”
지켜보던 넷이 움찔한 순간이었다.
“끄아-아!”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간을 더 끌 것 같아?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서 그런 생각하는 거야.
“총수님이 보내셨습니다.”
“대출아!”
답이 나온 순간에 천중명이 불렀고, 곽대출이 눈알을 찍던 엄지를 다시 꺼냈다.
“총수님이 왜?”
“그 말씀은 조용한 곳에서 드리겠습니다.”
“여기도 조용한 거 같은데?”
“제가 아니라 다른 분이 말씀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차피 최종 보스와의 담판쯤 있어야 하겠지.
천중명은 앞장서라는 의미로 내려가는 길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부스슥.
곽대출이 몸을 세웠을 때, 깔렸던 남자는 왼쪽 눈 안쪽에서 눈물처럼 피를 흘리고 있었다.
‘벌써 팠어?’
‘아냐. 눈 안쪽 살을 찢어서 그래.’
곽대출이 엄지를 밖으로 두 번 움직이는 것으로 답을 주었다.
멋진 새끼,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바로 파내지는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둘이 올랐던 산을 일곱이서 내려간다.
곽대출의 앞에서 걷는 남자는 왼쪽 눈을 헝겊으로 누르고 있었는데 피가 시뻘겋게 배어 나와 있었다.
30분쯤 걸었다.
그리고 그동안 천중명은 이들이 그저 그런 깡패가 아니란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날렵하고 절제된 동작도 그렇지만, 훈련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특유의 동선 때문이었다.
하긴, 천호득이 퇴역한 군인쯤이야 어디에서들 못 구하겠나.
산길을 걸으면서 천중명의 머리에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허선영과의 전화통화였다.
그 여자 역시 천중명이 모르는 정치인 집안 특유의 부담과 의무를 짊어지고 살겠지 싶었다.
그래도 아무튼 잠자리 안 한 건 다행이지?
엉뚱한 생각에 천중명이 픽 웃었을 때였다.
가장 앞에서 걷던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산과 산 사이로 난 비포장길에 승합차 두 대가 숨어 있었다.
위쪽에 나무를 깔아서 제법 위장도 했다.
드르륵.
이쪽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기다렸다는 것처럼 승합차의 뒤쪽 문이 열렸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다부진 몸매를 가진 50대 중반의 남자가 허리를 구부린 자세로 승합차에서 내렸다.
키가 천중명과 비슷해 보일 정도로 체격도 좋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그런 중년 남자가 짧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혹시 아는 사이였을까?
사과한 후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고 천중명의 반응을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왕회장님의 지시였습니다.”
“그건 들었어요.”
“차에 오르시죠. 보고를 드리자 통화를 바라셨습니다.”
염병, 정말 아는 얼굴이었나 보구나.
50대 중반의 남자가 승합차 방향으로 몸을 튼 다음이었다.
‘들어간다.’
‘알았어.’
곽대출을 힐끔 돌아본 천중명은 그가 가리키는 승합차를 향해 걸었다.
의자가 화려한 VIP용 승합차였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문을 닫더니 좌석 사이에서 휴대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회장님. 셋째 아드님이 도착했습니다. 예.”
짧은 보고를 마친 남자가 휴대전화기를 천중명에게 내밀었다.
미래를 보여주려면 이런 때 뭔 소리를 할지나 알려주지.
천중명은 전화기를 받았다.
어차피 그만둘 재벌 후계자 싸움, 이렇게 매듭짓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른다.
“여보세요?”
- 윤 실장을 잡아내다니 어떻게 된 거냐?
건너온 천호득의 음성에서 눈앞의 남자를 윤 실장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건졌다.
- 건방진 놈.
대꾸가 없어서 그런지 천호득의 음성이 바뀌어 날아왔다.
- 사람을 구해 놨다. 윤 실장에게 소개받아.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해 봐.
“저는 후계자에 관심 없습니다.”
코로 웃는 듯한 소리가 단박에 건너왔다.
- 내가 감싸주지 않는 세상에서 네놈이 살아 있을 것 같으냐? 허세직 의원까지 연결해서 살려두었더니 뭘 믿고 그렇게 나대?
“제가 나서면 지옥문 열리는 겁니다.”
- 흐흐. 흐허허. 흐허허허허.
사람이 기껏 경고를 던졌더니 미친 사람이 터트린 듯한 웃음으로 답이 돌아왔다.
- 지옥문이라니? 표현 한번 다부지구나. 어디 한번 기대해 보마. 내일부터 화장품과 냉동창고를 맡아서 그 문을 열어봐. 허세직 의원 딸도 만나보고.
무언가 확실한 약점을 잡은 듯한 음성이었다.
- 그렇지 않다면 그 불쌍한 환자 아이가 죽은 꼴을 보게 될 거다. 이름이…? 유진희라고 했던가? 그리고 또 한 명이 있지. 곽대출이라고.
천중명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