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017. 이제 우리 뭐하지? (1)
이진미는 한 줌의 가루로 남양주의 납골묘에 자리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마감된 그 사흘 동안 날씨는 신기할 정도로 연달아 좋았다.
화장터까지 동행한 변호사가 법적인 문제까지 모두 처리해 준 덕분에, 모든 것을 마친 천중명은 풍광 좋은 납골 공원의 한쪽에 앉아 곽대출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물 수 있었다.
“후우.”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사람의 인생보다 좀 빠른 것 말고는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살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지만, 언젠가는 저 파란 하늘과 황토빛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사람의 인생일 테니까.
다들 그렇다.
한 새끼도 빠짐없이 그렇게 된다.
그런데 뭘 그렇게 아등바등 지랄들을 떨어대며 쥐고 또 쥐려고 염병들을 떠는 건지.
“이제 우리 뭐하지?”
“대표님이 원하는 대로 하자.”
천중명의 질문에 곽대출이 답을 했고, 이어서 둘이 비슷한 표정으로 웃었다.
“하고 싶은 거 없어?”
“나야 뭐 알겠냐? 그냥 대표님이 결정해라. 사람을 잡자면 잡고, 실컷 노는 것도 좋고.”
거침없는 곽대출의 답이었다.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 봄의 목덜미를 코앞으로 들이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씨발! 너무 좋다.”
“대표님, 욕이 시원, 시원하십니다.”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는데 곽대출의 반응에 맥없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맨날 바닥에서 구르다가 대표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생겼으니 나도 이럴 때 아부하는 연습 좀 해둬야지.”
이제부터 뭔가를 하긴 해야 했다.
놀던, 늘어져 있던, 격렬하게 방구석에 누워 있든,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
“너 전에 하던 일은 어땠냐?”
“해결사? 그거 사장 새끼 개 패듯 두들기고 때려치웠다.”
“뭐가 문제였는데?”
“그 새끼! 억울한 사람을 돕는 일이라고 구라쳐 놓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채 자금 독촉이었더라고. 하마터면 불쌍한 사람 잡을 뻔했었다. 그것도 딸 병원비였는데.”
천중명의 재촉하는 듯한 시선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곽대출이 다시 말을 이었다.
“대출받았어. 3억. 그거로 내가 독촉하느라 괴롭혔던 사람들 빚 싹 갚아주고 끝냈다. 차용증 회수해서 가져다줬고, 생활비랑 병원비 좀 보태주고, 뭐 그랬다.”
“뭔 해결사가 한 일이 그렇게 일방적이야?”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하여간 이상한 해결사 업무에 관해 들었다.
“그래서 3억은 어디에서 났어?”
“아버지가 물려주신 집으로 담보 받았다. 아버지도 이게 옳다고 생각하셨을 거야. 뭐든 꼭 이자 쳐서 갚으라고 내 이름도 대출이라고 지으셨던 분이잖냐.”
“대출은?”
“내 꼬라지에 그걸 어떻게 갚아? 그냥 둬. 이미 마음 굳혔다. 내 잘못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천중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어딜?”
“대출 갚으러.”
뭔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몸을 일으킨 곽대출이 급하게 천중명의 앞을 막아섰다.
“내 은행 빚 갚으려는 거면 그만둬.”
“우리 돈 생겨서 룸살롱 다니며 퍼붓는 게 낫겠냐? 아니면 의미 있는 곳에 쓰는 게 낫겠냐?”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대표님아. 그럼 우리 룸살롱은 한 번도 안 가냐?”
곽대출이 아쉬운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에라 이 새끼야!”
천중명은 그런 놈의 목을 팔에 꽉 끼워 넣고는 차를 향해 걸었다.
**
휴대전화를 받은 지경그룹의 총수 천호득은 지루하게 기다렸던 지난 이틀을 보상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 현재 살던 빌라도 매물로 내놓았습니다.
“미친놈.”
욕을 뱉고는 있었지만, 천호득의 음성에는 궁금함과 그가 느끼는 흥미가 잔뜩 담겨 있었다.
- 그 외는 은행을 돌아다니며 현금을 찾고 있습니다.
“으하하하!”
결국, 천호득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하면 현금을 얼마나 손에 쥘 수 있지?”
- 대략 10억 근처일 겁니다.
“생각보다는 별로 없구만.”
입술을 내민 천호득이 주름과 검버섯 피어난 얼굴을 서재의 창밖으로 돌렸다.
“녀석이 팔려는 빌라의 현재 시세는?”
- 정상적인 매매라면 대략 70억 근처로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내가 돈을 보낼 테니 자네가 적당한 사람을 내세워서 그걸 사줘. 큰놈이나 둘째가 눈치채지 않도록 주의하고.”
- 알겠습니다.
원룸 하나를 구하는 것보다 더 쉽게 천중명의 빌라 거래가 결정된 다음이었다.
“그렇게 하면 대략 80억쯤을 손에 쥐겠군.”
답이 필요 없는 말을 뱉어낸 천호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휴대전화기를 귀에 댄 채였다.
같은 정원인데도 2층의 거실에서 보는 것과 아래층 서재에서 보는 모습이 다르다.
햇살과 바람이 그 정원에서 한참을 뛰어놀도록 천호득은 무언가 계산하느라 입을 다물었고, 윤 실장은 또 침묵으로 대꾸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큰놈은?”
- 건설과 전자의 임원진들을 완벽하게 교체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룹 기획실 말고는 내 말을 들을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군.”
- 원하셨던 일이 아니었습니까?
어쩐지 건방진 대꾸였는데도 천호득의 표정과 눈빛은 태연하기만 했다.
“둘째 놈은 뭘 하고 지내나?”
- 저를 추적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네가 잡히면 내 인생도 끝날 테니 집중할 만은 하겠군.”
윤 실장의 대꾸는 없었다.
“그거 참. 둘 중 한 녀석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려던 순간에 막내 놈이 이렇게 날뛰니. 지켜보는 재미가 워낙 쏠쏠해서 포기할 수가 있어야지.”
혼잣말을 뱉어낸 천호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지켜보세. 아, 참. 내가 먹는 것들은 안전한 건가?
- 그건 믿으셔도 됩니다.
“세상에 아비에게 그토록 꾸준하게 독극물을 처먹이는 아들놈들을 두다니. 천호득이도 인생을 헛살았어.”
말을 던진 천호득이 픽 하는 웃음을 그려냈다.
“독해지라고 가르쳤었지. 그게 자신에게 독해지라는 의미였는데 이놈들은 타인에게만 악독해지더군. 그리더니 아비와 에미를 살해하려는 괴물들이 되었어.”
이틀만의 대화여서 그런지 천호득은 분명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이제 그만 끊지.”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천호득은 대뜸 통화를 마쳤다.
**
장례를 치르고 보름이 흐른 날이었다.
“에이, 미친 대표님 새끼.”
절벽에 기대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던 곽대출이 욕을 쏟아냈다.
“왜 또?”
“현찰을 70억 넘게 가진 새끼가 한다는 짓이 낑낑대고 이런 절벽에 올라와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게 말이 되냐? 그것도 사흘을 연속해서!”
“그럼 70억을 가진 사람은 뭘 해야 하는데?”
“그야…!”
뭔가를 쏟아내려던 곽대출이 고개를 갸웃했다.
“3억 갚았고, 그 불쌍한 여자애 가족도 챙겨 줬고. 어디에 돈 쓸 곳 있냐?”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우리 뭐 못 먹어본 거 없을까?”
곽대출의 반응에 천중명은 픽 웃으며 아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출아. 너 한우 갈비도 지겹다고 했었다.”
“룸살롱은?”
“돈을 보며 웃는 여자애들에게 구역질이 났다며? 주인영이 자꾸 생각나서 오히려 비참했다면서?”
“스테이크는?”
“두 번 못 먹을 거라던 말을 기억한다.”
“호텔에서 룸서비스?”
“라면 끓이다가 또 망신당할래?”
“에이! 뭔 말을 못 하게 해.”
곽대출이 뾰로통한 얼굴로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하고 싶은 걸 말해.”
“그러게. 뭐 해골이 쪼개질 정도로 재미있는 일 없을까?”
곽대출의 혼잣말 같은 질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진 다음이었다.
“누군가 우릴 추적하고 있어.”
천중명이 나직하게 건넨 말에 곽대출이 홱 고개를 돌렸다.
“서너 명이 교대로 따라온다. 산에 올라온 게 아니었으면 못 알아차릴 뻔했다.”
“누군지는 모르는 거구나?”
천중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개새끼들, 복도 지지리 없지. 하필이면 도깨비 중에서도 상도깨비를 따라붙어?”
“내가 욕심 없는 걸 알면 포기하겠지 싶은데 하여간 지켜보자.”
“만약 또 널 노리면?”
천중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곽대출을 보았다.
지난 사흘 내내 혼자서 고민했었던 질문이었다.
답은 얻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날 노리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안 끝내겠다는 뜻 아니냐? 그때는 지옥문 열리는 거지.”
섬뜩한 답을 들었는데도 곽대출은 만족한 듯 웃었다.
“이제 내려가자.”
곽대출이 편의점에서 산 도시락 쓰레기들을 봉투에 담아 작은 배낭에 쑤셔 넣었다.
해가 이마쯤 있어서 내려갈 시간은 넉넉했다.
“좀 사람답게 산책로로 내려가면 안 되냐?”
“누가 따라온다니까.”
“아, 염병! 내가 다 해결할게! 응? 이 대표님아?”
천중명은 픽 웃으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에 곽대출이 힘들어서 불평을 털어놓는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놈은 뒤따라온다는 사람들을 잡아서 정체를 밝히는 한편, 시원하게 두들겨주고 싶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자, 헛소리 말고 내려가자.”
곽대출이 입을 쭉 내민 채 불만에 가득 찬 눈빛을 쏟아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참으로 오랜만에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액정에 허선영이라고 올라와 있었다.
몸이 바뀐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받지? 대표님?”
“그 국회의원 딸인가 하는 애인데 어차피 만날 것도 아니고 뭐 하러 그래?”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오지은에 허선영까지. 우리 대표님은 참 여복이 많으셔. 여복이.”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잠시 끊겼던 진동이 다시 살아났다.
자기 전화를 안 받으면 심리적인 불안을 느끼는 건지 이 사람들은 전화할 때마다 참 악착같은 면이 있었다.
인상을 찌푸렸던 천중명은 마음을 굳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저기, 저 허선영이에요.
두 번이나 연속 전화를 걸었던 것과는 달리 다소곳한 음성이 건너왔다.
- 혹시 이번 주에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지방에 내려와 있어서요.”
- 그럼 다음 주에는….
“그때도 지방에 있습니다. 그다음 주에는 외국에 있을 거고요.”
이 정도면 알아들었을 거다.
바로 앞에서 외국에 있을 거란 말을 들은 곽대출이 궁금한 눈으로 천중명을 들여다보았다.
- 저, 그러면 지금 제가 계신 곳으로 갈게요. 그러면 잠시 시간은 내줄 수 있나요?
공손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꺼내놓은 청이었다.
하지만 이런 거 지금의 천중명에게는 정말이지 중요하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건데요? 그 정도로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전화로 하세요.”
어차피 인연이 아닌 사람이라 생각해서 청중명은 냉정하게 더 다가올 여지를 잘랐다.
바로 답은 건너오지 않았다.
그래, 이 정도면 4선 국회의원의 딸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마음 접겠지.
전화를 막 끊으려는 순간이었다.
참지 못해 나온 서러운 울음이 전화기를 타고 천중명의 귀를 파고들었다.
혹시 결혼을 핑계로 잠자리를 가졌나?
생각만 해도 골이 흔들리는 느낌이어서 천중명은 아예 고개를 저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절벽도, 하늘도, 바람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천중명이 전화를 끊는 거.
-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그런 천중명의 마음을 붙잡는 듯 울음을 삼킨 허선영 특유의 다소곳한 음성이 건너왔다.
- 존댓말까지 하는 이유가 그날 약속은 없었던 거로 생각하라는 의미인가요?
말문이 턱 막혔다.
약속은 또 뭔지, 원.
- 오지은을 받아들이면 도와준다면서요?
무리하게 용기를 낸 것처럼 떨리는 음성이 또다시 건너온 직후였다.
훅 날아든 주먹처럼 천중명의 주변이 느닷없는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전기에 감전된 게 아닌데?
왜, 지금?
생각은 길지 못했다.
물에 젖은 유리 너머로 보는 것처럼 일그러진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거면 전 만족해요.”
깔끔한 단색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친 여자가 결심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천중명은 저런 취향인 건가? 원피스?
홈바? 빌라?
천중명이 팔아버린 빌라의 홈바였다.
“내가 오지은 만나는 건 상관하지 마.”
“알았어요.”
이전의 천중명이 만족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오지은과는 다른 미모였다.
어깨에서 둥글게 안쪽으로 말린 머리칼, 커다란 눈, 도톰한 입술의 미모에 다소곳한 자세였는데 그런 모습이 또 이상하게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외모였다.
“나랑 자는 것도 할 수 있겠어?”
입술에 힘을 꾹 주었던 여자가 역시나 각오했던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
“결혼하면요.”
“아니. 지금. 그래야 나도 허선영을 믿지.”
허선영?
저 여자가 허선영이야?
고개를 든 허선영은 놀라고 당황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