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016. 너는 아무렇지도 않냐? (2)
천중명은 엘리베이터의 옆으로 움직여 벽에 등을 기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아들의 몸뚱이가 죽은 날에, 그토록 기다리던 아버지라는 인간도 못 본 채 말이다.
서류로만 살아 있는 아버지 때문에 군대도 다녀왔는데, 이제부터 1인실에서 지내며 그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 중명아.
“내가 지금 갈게.”
- 와도 어머니를 뵙기가 어려워. 친족도 뭣도 아니어서 어머니를 확인하겠다고 주장할 방법이 없더라고.
지하주차장으로 차가 한 대 들어오고 있었다.
“1분만 있다 통화하자.”
통화를 마친 천중명은 세워둔 차를 향해 걸었다.
침착하자.
지금은 늦었더라도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는 게 먼저다.
억지로 감정을 누르자, 복잡한 심정이 가슴 저 아래에서 단단하게 똬리를 트는 느낌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천중명은 숨을 한 번 크게 쉬고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출아. 지금 갈 테니까 병원 입구에서 보자.”
- 운전해도 되겠냐?
“알아서 할게.”
답을 마친 천중명은 그대로 차를 몰아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강남은 한낮에도 수시로 차가 막힌다.
하늘을 독하게 노려본 천중명은 운전에 집중하기 위해 다시금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듯한 상실감과 황당함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죽음 역시 몸뚱이가 바뀐 일만큼이나 실감 나지 않았다.
“꼴통 재벌까지 하겠다니까! 하늘이면 다야? 하늘이면 이렇게 꼴린 대로 다 해도 되는 거냐고!”
느닷없이 앞유리를 통해 보이는 하늘을 향해 고함을 버럭 질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기어 박스에 넣어둔 휴대전화기가 울었다.
천상기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금은 전화를 받을 상황도, 심정도 아니었다.
던지듯 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중명은 운전에 집중했다.
병원이 저 앞에 있었다.
막히는 길을 이겨낸 천중명이 주차장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전화기가 또다시 몸을 떨어댔다.
역시나 천상기였다.
안 받으면 병원에 들어선 뒤에도 계속 전화질을 할 게 분명했다.
천중명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너, 이 자식!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대뜸 귀가 따가울 정도로 높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 죽고 싶어? 죽고 싶으냐고?
뭐, 좀 오라고 한 곳에 못 간 게 죽을 일인가?
이 빌어먹을 놈들은 고작 돈이 많다는 이유로 사람 목숨이 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 야, 이 새끼야! 대답 안 해?
“후-. 적당히 합시다, 진짜.”
주차장의 안쪽에 들어선 천중명은 안간힘을 쓰며 터져 나오려는 욕을 삼켰다.
- 너,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적당히 좀 하라고 그랬다. 내가 이 씨발…. 후우. 할 일이 있어서 지금 못 가. 그러니까 전화 그만해.”
- 이 개자식이! 너 정말 뒈질래?
그래도 천상기는 천봉서와 달리 밀리지 않는 강단쯤 있었다.
그런데 그 대꾸를 듣는 순간에 내내 잘 눌러놓았던 가슴 속의 분노와 불만이 불쑥 고개를 쳐들고 말았다.
“죽고 싶냐고? 누가 죽는지 정말 해볼래?”
- 아, 이 새끼가? 이런 근본 없는 새끼! 이래서 에미가 더러운 새끼는 집안에 들이면 안 되는 거야!
사람 일이 이렇다.
한 번 안 되려면 이상하게 치솟는 불길에도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 나온다.
“말조심해, 이 개새끼야! 너희가 공부를 잘했어? 그렇다고 대가리가 좋아? 아니면 일대일로 나를 죽일 능력이 있어? 어? 아버지 잘 만난 것 말고 내세울 게 뭐가 있냐고? 이, 벌레만큼도 쓸모없는 새끼들아!”
- 너, 너 이 새끼…!
“미친 새끼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너희 잡아먹고 만다. 그래서 너희도 땀 흘리지 않으면 절대 못 먹고 살게 만들고 만다! 알았어?”
- 이 쥐새끼가 고작 회사 두 개 얻었다고 이빨을 들이대? 왕회장님이 관심 좀 주니까 세상이 다 네 뜻대로 돌아갈 것 같아?
이런 입씨름 따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에라, 이 불쌍한 새끼야. 끝까지 그놈의 왕회장 꼬리에 붙어 힘쓸 생각밖에 안 나냐? 끊어, 이 기생충 같은 새끼야.”
천중명은 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눈이 이글거리는 천중명에게는 잔인할 정도로 햇살은 여전히 찬란했다.
주차구역에 차를 꽂아 넣은 천중명은 운전석에서 내려 병원으로 향했다.
**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은 천상기는 의자를 빙글 돌려 창을 향해 앉았다.
5분쯤 걸렸다.
눈에 올라왔던 분노가 궁금함으로 바뀌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형님에게 대들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이런 놈이 그동안 겁에 질린 눈을 하고서 나와 형님을 속였다?”
혼잣말을 뱉어낸 그가 고개를 갸웃한 뒤에 휴대전화기를 힐끔 보았다.
“도대체 왜 지금이냐? 모습을 감췄던 놈이 느닷없이 이빨을 들이댄 이유는 또 뭐고?”
잠시 창밖에 시선을 두었던 천상기는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는 왕회장 천호득이든, 큰아들인 천봉서든, 둘 중 한 사람이 천중명에게 힘을 실어줬다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분석이었다.
왕회장이 그랬다면 천봉서와 자신의 계획을 눈치챘다는 뜻이겠고, 천봉서가 그랬다면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도 결국 천상기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의미가 된다.
계산을 마친 천상기는 의자를 돌려 휴대전화기를 집었다.
그리고는 입력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장님. 상기입니다.”
- 무슨 일이냐? 내가 지금 회의가 있어서 시간이 많지 않다.
“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중명이 놈이 제게 욕을 하며 달려들었습니다.”
분이 가득한 음성과 달리 천상기의 눈빛은 천봉서의 반응을 알아채기 위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그놈이 네게도? 무슨 일로?
“오늘 임명한 회사에 안 갔길래 전화로 나무라고 제 사무실로 오라고 했더니 느닷없이 달려들었습니다.”
- 흐음.
천봉서의 신음 같은 한숨이 먼저 들렸다.
“회장님. 혹시 총수님이 놈에게 따로 언질을 주신 게 아닐까요?”
- 왕회장님이 따로 녀석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니 그건 지나친 생각 아니겠냐.
요거 봐? 결국, 따로 왕회장을 살피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천상기는 반짝하고 빛나는 눈빛을 하고 입을 열었다.
“윤 실장을 통해서 연락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 그 인간이 계속 문제가 되는군. 아직도 흔적을 못 찾았지?
“죄송합니다.”
- 네 잘못이 아니다. 그 정도 되니까 총수님도 여태 윤 실장 그 인간에게 의지하는 걸 테고. 회의 끝내고 다시 통화하자. 할 수 있으면 중명이 놈이 어디 있는지, 무얼 하는지를 한번 알아봐.
“알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천봉서는 분명 왕회장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게 연극인지, 진심인지는 단언하기 어려웠다.
“미친 들소처럼 날뛰는 놈의 뿔을 굳이 내가 붙잡을 필요가 있나? 방향만 잘 틀어주면 오히려 내게 득이 될 텐데.”
야비한 미소를 그려낸 천상기가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평택과 이천 공장에 방문이 없을 것 같다고 연락해.”
[알겠습니다.]
인터폰을 통해 지시를 마친 천상기는 어쩐지 기대되는 일을 발견한 듯한 눈치였다.
**
지경그룹의 총수이자 왕회장인 천호득은 전에 천봉서와 천중명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2층의 거실에 있었다.
- 현재 신사동의 병원 측에 이진미라는 50대 여자 사망자의 시신 인수와 장례를 맡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누구?”
- 이진미라는 사망자인데 제가 아는 바로는 셋째 아드님과 연결고리가 전혀 없습니다.
“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쏟아냈지만, 천호득의 눈은 흥미로운 소식을 들은 이후로 확실히 빛나고 있었다.
- 연결고리는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드님의 움직임이나 동선이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 같습니다.
“동선이야 그렇다 치고, 움직임은 또 뭐야?”
- 걸음걸이, 동작을 포함한 몸놀림이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느낌입니다. 자신감, 주변을 습관적으로 경계하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반사 신경이 굉장해 보입니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할 때야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아무래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으니까 내가 알아듣게 한 마디로 설명해 봐.”
생각을 정리하는지 짧은 침묵이 먼저 건너왔다.
- 어쩐지 싸움 잘하는 사람의 움직임입니다.
“싸움?”
- 그렇습니다.
천호득의 예상 밖에 있던 답이 건너왔다.
“하여간 신기한 일이구만. 그래서? 병원에 들러 전혀 생면부지인 50줄 여자의 시신을 달라며 오늘 대표로 임명된 회사에조차 안 가고 있다?”
- 그렇습니다.
거실 창밖의 멋진 정원을 바라보며 천호득은 어려운 수수께끼를 풀려 애쓰는 얼굴이었다.
“함께 다니는 인간의 정체는?”
- 해군 불명예제대 이후에 노동일과 해결사 일을 했습니다. 주임상사로 전역한 부친이 남겨준 집을 담보로 3억 원을 대출을 받았는데 이자를 제때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3억 원을 설마 노름하느라 사용한 건 아니겠지?”
-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대답은 천호득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그런 쓸데없는 일에 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 그건 그냥 두고 막내 놈을 좀 더 확실하게 살펴 봐.”
- 알겠습니다.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그는 잠시 창밖을 보다가 퍼뜩 생각난 것이 있는지 다시 휴대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예, 회장님.
“그 시신 말일세. 내가 드러나지 않게 녀석의 뜻대로 해줄 수 있겠나?”
- 무연고자 시신을 제3자에게 넘겨주는 일은 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큰 아드님과 둘째 아드님이 저를 찾을 단서가 될지도 모릅니다.
“흐음. 그렇더라도 반응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 셋째 아드님이 원하는 대로 처리해 놓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두 번째 통화를 마친 천호득은 턱을 손으로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느닷없이 세상에 뛰쳐나온 놈처럼 굴더니 시신이라?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그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관심이 달려있었다.
**
변호사가 좋은 건지, 불쌍한 한 여자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겠다는 소망이 통한 건지, 그도 아니면 재벌가의 이름이 먹혔던 건지는 모른다.
아무튼, 천중명은 영안실의 특실 한 칸을 차지한 채 그곳에 어머니를 모실 수 있었다.
연락 따위 할 곳도 없었다.
장례 전문 업체에서 달려와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동안, 천중명은 영정 사진 앞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있었다.
“저, 죄송한데 음식은 몇 인분을 준비하면 될까요?”
이 와중에 저들에겐 또 이런 결정이 중요한 일일 거다.
“올 사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적당히 주문해서 버리지 말고 힘든 사람들 먹게 하세요.”
“예?”
“100인분이든, 200인분이든, 주문해서 이리 가져오지 말고 서울역 앞 같은 데서 드시게 하라고요.”
멍하니 있는 장례업체 사람을 곽대출이 눈치껏 데려갔다.
천중명은 시선을 돌려 영정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이제 편해?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몸뚱이 죽은 걸 알아서 그렇게 가버린 거야?
곱게, 예쁘게 웃는 얼굴의 눈 끝이 슬퍼 보여서 천중명은 세운 무릎 위로 고개를 떨궜다.
“후-.”
솟구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쉬었을 때였다.
“대표님. 담배 피우자.”
곽대출이 담배를 디밀었다.
문상객 없는 특실에서 장례업체에서 나온 사람들이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찰칵.
“후우.”
눈치 빠른 아주머니 한 명이 종이컵에 물을 담아 가져다주었다.
둘이서 먹먹하게 마주 앉아 담배를 피웠다.
사람 참 눈물은 왜 자꾸 나는 건지, 원.
“대출아.”
곽대출은 시선만 주었다.
“날 죽인 거야 몸뚱이 바뀐 거로 용서한다고 치자. 그런데 성창욱이 몸뚱이가 죽은 시각과 어머니 사망시간이 같은 걸 어떻게 이해해야 되냐? 우리 어머니 저 새끼들이 죽인 거지? 그렇지?”
대답 대신 곽대출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나, 돈 바란 적 없거든.”
“알아.”
“이제 복수고 뭐고 다 귀찮다. 네 말대로 적당히 정리해서 외국을 가든, 지방을 가든 가자. 미안하다. 너 불러서 이틀 만에 이런 소리해서.”
“같이 가자면서? 뭘 하든 원하는 걸 해. 세상천지에 믿을 사람이라고는 나도 너밖에 없다.”
아파 보이는 미소와 함께 곽대출이 건넨 말이 천중명은 그 어떤 위로보다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