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5화 (15/315)

# 15

015. 너는 아무렇지도 않냐? (1)

지경백화점의 지하주차장에 들어선 천중명이 중앙을 향해 커브를 틀고 난 다음이었다.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 서 있는 곽대출이 들어왔다.

끼이익.

지하주차장 특유의 타이어 소리와 함께 멈춘 승용차에서 천중명이 내린 순간이었다.

깡패 조직을 흉내 내는 것처럼 곽대출, 그 조금 뒤에서 주인영, 그리고 더 뒤편에서 직원들이 순서대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화 음성이 그렇더니 확실히 곽대출은 평소와 다른 얼굴이었다.

혹시 직원들에게 무시당했나?

주인영을 힐끔 보았던 천중명은 그러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곽대출이 지금껏 입을 다물었다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려니 싶어서였다.

이런 건 나가서 물어봐도 될 일이었다.

“고생들 했어요. 천천히 갈 테니까 올라들 가세요.”

“트렁크를 열어주시면 실어드리고 가겠습니다.”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어서 천중명은 운전석 문에 달린 버튼을 눌러 트렁크를 열어주었다.

제법 샀다.

쇼핑백을 넣은 주인영이 직원들과 함께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유리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 입구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제법 폼 나는 복장을 한 곽대출을 향해 천중명이 질문을 던졌는데 답은 없었다.

하긴, 여기에서 말하기도 그렇겠다.

아직 엘리베이터 앞에 직원들도 있으니까.

“우선 타.”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힐끔 엘리베이터 앞을 본 천중명은 다시 시선을 가져왔다.

“그냥 타.”

천중명이 운전석으로 움직이는 동안, 정장에 셔츠, 구두를 신은 곽대출이 조수석에 올랐다.

부으응.

곽대출의 표정과 상관없이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아직 시간이 있어서 천중명은 백화점을 나오기 무섭게 잠실 방향의 한강공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백화점에서 누가 뭐라고 그랬어?”

“그런 게 아니야.”

“그럼 뭔데? 아닌데 왜 독종 중의 독종이라는 곽대출이 따귀 맞은 얼굴로 서 있었던 건데?”

신호에 차가 서 있는 동안에도 곽대출은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부으으응.

탄천의 옆을 돌아서 한강공원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곽대출이 멍하니 조수석 바깥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은 것은.

한강공원은 운동하는 이들 몇몇이 있을 뿐 한가했다.

“뭐 하나 마실래?”

“내가 가서 사올게. 네가 준 카드도 있잖아.”

말릴 틈도 없이 매점을 향해 걷는 곽대출을 보며 천중명은 근처의 적당한 벤치에 앉았다.

아직 바람이 찬 계절이었다.

겨울의 끝과 봄을 한데 뭉친 바람이 강을 타고 달려왔다가 햇살에 기분이 풀린 것처럼 주변을 맴돌 때, 양손에 1회용 컵을 든 곽대출이 돌아왔다.

“뭐냐?”

“꿀차.”

“건강에는 좋겠다.”

천중명의 옆에 앉은 곽대출이 카드를 건네주었다.

“가지고 있어. 앞으로도 필요할지 모르잖아.”

잠시 카드를 노려보던 곽대출이 지갑을 열어 안에 넣었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냐?”

“뭐? 몸이 바뀐 거?”

“아니. 재벌이 된 거랑 돈 많아진 거.”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낸 곽대출이 천중명에게 슬쩍 디밀었다.

찰칵.

금연을 강요하는 의사처럼 달려드는 바람을 이겨내고 불을 붙였다.

“후우-. 돈이 좋더라. 그렇게 예쁜 여자가 나한테 생글거리는 거 처음이었다. 커피 가져오고, 돌아다닐 것도 없이 매장의 옷이 직접 오더라고. 수선하는 사람도 달려왔고.”

허벅지에 상체를 숙인 곽대출은 어쩐지 먼 곳을 보는 느낌이었다.

“니미! 난 흔들리더라. 이렇게 된 거, 펑펑 쓰면서 살면 좋겠구나 싶었어. 네가 말 한마디 해주면 주인영이라는 여자가 나랑 밥 먹어주고, 영화도 봐줄 것도 같았고.”

천중명은 잠자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다음에 겁이 덜컥 나대. 절벽에서 네가 멱살 잡아서 당길 때 빼곤 처음인데 이러다가 내가 너까지 망치는 거 아닌가 싶었어.”

천중명의 반응이 궁금했는지 곽대출이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쪽팔리더만. 그깟 옷 몇 벌 사는 거에 흔들리는 내 모습이. 이거저거 부탁하고 싶은 욕심도 막 솟구치고. 넌 안 그러지?”

“몰라.”

“너야 당연히 안 그렇겠지. 니미.”

“욕은 왜 해?”

“부러워서 그렇다. 몸이 바뀐 거랑 그런데도 강하게 버티는 것, 또 지금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 모두 다 부러워서.”

“염병! 지랄 맞은 소리를 들으니까 귀때기가 다 먹먹하네. 담배나 하나 더 줘.”

곽대출이 내민 담배를 받은 천중명이 또 악착같이 불을 붙였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잘 차려입은 남자 둘이 한강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기에는 어색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라고 왜 안 흔들렸겠냐.”

“괜히 위로하지 말고.”

“야! 너 같으면 속에 아무것도 안 입은 여자가 원피스 쭉 내린 알몸으로 있는데 그게 아무렇지도 않겠냐? 저 빌어먹을 빌라 팔면 당장 70억쯤 생기고, 천중명이란 이름으로 은행 뒤지면 또 몇십억이 생길지 모르는데 안 흔들리겠어?”

필터에 불이 달라붙은 담배를 들고서 곽대출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백화점에서 봤지? 쭉 서서 인사하는 거? 그럴 때면 내가 진짜 천중명이 된 거 같기도 하고, 이런 생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나도 한다.”

“후-!”

한숨을 쭉 뱉어낸 곽대출이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야겠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도 전에 엿 되게 생긴 거야. 염병할 후계자 싸움에 말려들어서.”

“그냥 째. 가진 거 들고 외국 가든가.”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그거 너무 비겁하지 않냐?”

“거 봐. 역시 나랑은 다르지.”

“개새끼야. 너도 결국 그러지 못할 거니까 이런 꼴 보이는 거잖아. 네가 정말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돈 챙기려고 했겠지, 이러고 겁이 나니, 흔들렸니, 했겠냐고?”

말을 들은 곽대출이 픽 웃었다.

“이미 이전의 천중명이 죽어버려서 몸뚱이를 찾을 길은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너랑 나랑 적당하게 재벌 꼬랑지에 붙어서 사는 건 너무 비겁하고.”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럴 때 선택할 게 뭐가 있겠냐? 당연히 정면돌파지.”

“정면돌파?”

곽대출이 천중명의 손을 힐끔 보았다.

언젠가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멱살을 붙잡던 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는 이 꼴로 살아야 하잖아. 그래서 생각한 게 이걸 바탕으로 내 걸, 내 회사를 만드는 거다. 내가 번 거로 꼴통 재벌 한번 돼보는 거.”

“씨발, 말은 졸라 멋지네!”

“손해 볼 거 있냐? 그러다가 다 날려도 어차피 너랑 나랑은 개털이었는데.”

“와, 씨발! 그 말이 더 멋있다.”

둘이서 실없이 웃은 뒤에 비슷한 모습으로 꿀차를 마셨다.

강으로 뛰어들었다가 부서진 햇살이 보석처럼 빛나며 공원으로 도망치는 정오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우선 경영이라는 거, 지경그룹의 속사정, 이런 거 좀 파악하고 그 뒤에 하나씩 해 보려고.”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런 다음은?”

“돈 벌어야지. 그래야 재벌 되지.”

“에이, 씨. 그게 쉬우면 아무나 재벌 됐겠지.”

“어? 곽대출? 재벌이 싫어?”

“좋아.”

숨도 안 쉬고 나온 곽대출의 대답에 천중명은 실없는 웃음을 웃고 말았다.

“참! 내가 선물 하나 챙겼다.”

천중명의 웃음을 바라본 곽대출이 시선으로 차를 가리켰다.

“트렁크 좀 열어주라.”

어차피 천중명이 준 카드로 샀겠지만, 그래도 선물을 준비했다는데 그걸 무시할 이유가 뭐 있겠나.

천중명이 리모컨으로 트렁크를 열어주자 곽대출이 느긋하게 걸었다. 그리고는 트렁크에 상체를 들이민 다음, 쇼핑백 하나에서 시커먼 가죽 주머니를 들고 돌아섰다.

“트렁크 닫아야지!”

“그건 거기서 안 되냐?”

“위에 버튼 있어. 그거 눌러.”

하여간 저놈하고는 쉬운 게 없다.

트렁크를 닫은 곽대출이 공룡 인형을 감춘 어린애 얼굴을 하고는 천중명에게 다가왔다.

면도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곽대출이 지퍼를 연 가죽 케이스에서는 놀랍게도 전기충격기가 나왔다.

“이걸 백화점에서 팔아?”

“주인영 매니저의 사무실에 있더라고. 보안용이라는데 내가 필요할 것 같다니까 두말하지 않고 주던데?”

“흠.”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천중명은 전기충격기를 노려보았다.

“많이 지랄 같겠지?”

“글쎄.”

고개를 갸웃한 곽대출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투로 천중명을 보았다.

“해보자.”

“지금?”

“과거나 미래가 보이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대로 결론 나는 거라서 차라리 후련하지 않겠냐. 대신 짧게 찍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곽대출이 버튼을 누르자,

따다다다다다닥!

한낮인데도 섬뜩하게 보이는 파란 불꽃이 전기충격기 이빨 사이로 번득였다.

“야, 이 씨…. 좀 짧게 해 봐.”

따닥. 따닥. 따다닥.

“이 정도면 되겠지?”

천중명이 고개를 끄덕인 직후였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곽대출이 전기충격기를 디밀었다.

따닥.

전기충격기의 소리가 들린 직후였다.

살을 뜯어내는 통증과 함께 세상이 아득하게 변했다.

거기까지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빛이 느껴지더니 다시 한강공원으로 돌아왔다.

“뭐냐? 뭐 봤어?”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곽대출이 얼굴을 디밀었다.

“통증밖에 없다.”

“뭐?”

“그냥 대고 눌러 봐. 어차피 이거로 죽는 건 아니잖아.”

지랄 같았다.

몸을 향해 다가오는 전기충격기는.

따다다다다다다다다닥.

‘끄으으.’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의 고통이 팔뚝을 타고 달려들었다.

아득해졌다.

그런데 기대했던 미래는 간데없이 쏟아지는 빛줄기 속에서 험상궂은 곽대출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뭐야? 뭐가 보였길래 그래?”

질문과 동시에 답이 달려드는 느낌이었다.

“감전되고 처음 본 게 지랄 같은 네 얼굴이다.”

곽대출이 억울한 표정으로 충격기와 천중명을 번갈아 보았다.

“좀 오래 대고 있으면 어떨까?”

포기를 모르는 독종답게 곽대출은 진지했다.

그러나 이건 뭐 감이라도 잡혀서 달려들어 보는 거지, 고통만 잔뜩 얻는 짓을 뭐 하러 또 하겠나.

“아무래도 집에서 전기 코드를 이용해야지 싶다.”

“오!”

뭐가 저렇게 흥분되는 거지?

묘하게 빛나는 곽대출의 눈을 기분 나쁘게 바라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몸을 떨더니 천상기의 이름을 액정에 올려놓았다.

“천상기다. 잠깐만. 여보세요?”

- 너 지금 어디야?

정나미라고는 발가락 앞 가죽만큼도 없는 음성으로 천상기가 질문을 던졌다.

- 새로 맡게 된 회사 두 곳에 들르라고 했는데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느라고 아직 그쪽에 연락도 안 했냐고?

“점심 먹고 한강공원에 잠시 들렀습니다.”

- 하! 세상 참 넉넉하게 사는구나. 그쪽에서는 점심도 거른 채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잠시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비꼬는 듯한 웃음이 넘어왔다.

- 너, 지금 나한테 와.

“예?”

- 나한테 들렀다 가라고!

이 인간이 왜 이렇게 독이 올라서 이러지?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내려서 시간을 확인했다.

강남에 있는 천상기의 사무실에 들렀다 간다고 해도 병원에 그렇게 늦을 시간은 아니었다.

- 대답 안 해?

“알겠습니다.”

답을 한 것과 동시에 전화가 끊어졌다.

천중명은 지금의 통화 내용을 곽대출에게 알려주었다.

“대출아. 네가 먼저 병원에 가 있어. 병실에 붙어 있다가 보호자라고 하고 경찰을 만나. 아들이 사망한 거 알고 있으니까 알아서 전한다고 하면 넘어갈 거다.”

“만약 어머니가 의식을 먼저 찾으시면?”

“내가 취업과 동시에 지방 출장 갔다고 핑계 대. 병원을 옮기게 될 거라고 하고. 나는 일단 천상기를 만난 뒤에 바로 병원으로 갈게. 경찰은 아까 말한 대로 상대하고.”

“그 뒤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곽대출이 질문을 던졌다.

“병원을 옮겨드린 뒤에 어머니와 나, 둘만 아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설득해 볼 생각이다.”

이미 경험이 있는 곽대출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이야기를 마친 천중명은 곽대출과 함께 승용차로 걸었다.

“택시비는 있냐?”

“이틀은 택시 안에서 살아도 될 만큼 있다.”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온 천중명은 삼성동 사거리에서 곽대출을 내려주고, 곧장 차를 몰았다.

병원이라야 기본요금 거리여서 곽대출이 먼저 도착할 게 분명했다.

10분쯤 움직여 천상기의 건물에 들어선 천중명은 지하 1층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에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하 1층의 입구에 들어설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전화기가 울며 곽대출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무슨 일이야?”

- 중명아.

곽대출의 음성이 어쩐지 섬뜩하게 들려서 천중명은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

- 어머니, 이진미 환자, 5108호. 어제 돌아가셨단다.

“뭐?”

잘못 들었나 싶었다.

생각은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벽은 제멋대로 아득하게 밀려나고 있었다.

- 듣고 있냐? 어머니, 어제 돌아가셨단다.

“무슨 개소리야? 왜? 왜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

악착같이 정신을 붙들고서 던진 질문이었다.

- 어제 오후에 쇼크가 왔었다고. 여기 간호사들이 성창욱 사망 사실도 알고 있더라고. 연고자가 없어서 시에서 시신을 관리한다고….

돌아온 것은 여전히 곽대출의 잔인한 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천장의 형광등이 천중명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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