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4화 (14/315)

# 14

014.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2)

100평이 넘는 빌라도 태어나서 처음 보았지만, 백화점의 개장 시간에 맞춰 들어선 것도 곽대출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지경그룹이 보유한 지경백화점은 특유의 화려함을 충분히 갖춘 소위 특급이었다.

개장과 동시에 들어선 곽대출은 정장 한 벌을 주문한 뒤에 매장의 간이 소파에 앉아 계산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참 안 어울린다. 이런 모습은.

매장 탈의실의 전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곽대출은 눈살을 찌푸렸다.

맨밥에 뿌려진 마요네즈처럼 더럽게 안 어울리는 꼴이었다.

70만 원짜리 정장을 골랐다.

천중명은 이런 양복을 서너 벌, 거기에 맞춰 셔츠도 비슷하게 사라고 했었다.

그것뿐인가?

편안하게 입을 외출복에 운동복과 티셔츠도 사라고 했으며, 구두와 깔끔한 운동화도 필요하다고 했었다.

곽대출은 손가락을 접어가며 오늘 옷을 사는 데 얼마나 써야 할지를 계산해 보았다.

에이, 진짜!

사람이 양복 한 벌, 편안한 옷 한 벌이면 충분한 거지 그걸 또 언제 다 고르고 다니라고.

같은 양복으로 세 벌을 짜르륵 사 버려?

손가락을 접던 곽대출이 한숨을 푹 내쉴 때였다.

검정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를 깔끔하게 받쳐 입은 여자가 매장의 직원과 또 다른 직원을 대동하고 다가왔다.

“고객님. 여기 계산 끝났습니다.”

곽대출은 얼결에 여자가 건네주는 카드와 영수증을 받았다.

세련되고 매력적인 인상이었다.

“VIP 담당 주인영입니다. 오늘 정장 몇 벌과 편안한 일상복, 운동복을 구입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모셔도 될까요?”

윤기 나는 피부, 반질거리는 음성, 시선을 붙드는 다정한 눈웃음에 세련된 태도까지, 밖에서 누군가 곽대출을 이렇게 대했다면 간을 빼가려는 줄 알고 욕을 퍼부었을 거다.

“제가 모시는 것이 불편하시면 다른 직원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제가 모셔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럼요. 그럼요.”

얼빠진 표정으로 곽대출은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기 양복 수선 끝나면 내 방으로 보내주세요.”

매장에 지시를 내린 주인영은 미소와 함께 매장 밖을 가리켰다.

개장한 지 고작 20분 지났다.

가장 기본적인 정장 한 벌을 산 것만으로도 곽대출은 남성복 전문 매장 직원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1년 매출 1억 이상의 고객만 상대하는 주인영이 나섰으니 4층의 분위기는 더 말할 필요 없었다.

그냥 VIP 고객만 상대하는 직원이 아니다. 주인영은.

그녀에게 찍힌 매장은 구석으로 밀려나야 할 정도로 힘을 가져서, 각 브랜드의 매니저와 직원들은 행여 그녀의 눈 밖에 날세라 양손을 모은 공손한 태도로 매장 앞에 서 있었다.

“이 정장은 어떠신가요?”

곽대출은 이미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적군이 총을 쏴대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전쟁터라면 아마 정반대의 모습이지 싶었는데 아무튼, 지금의 곽대출은 주인영의 전쟁터인 백화점에 있는 거였다.

“여기 디스플레이 된 셔츠하고, 피트가 돋보이는 감청색 계열의 바지, 그리고 베이지색의 카디건을 준비해 주세요.”

주문을 마친 주인영은 다시 곽대출의 혼을 뽑아낼 것 같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커피 괜찮으세요? 괜찮으시면 제가 이리로 준비하겠습니다.”

“예? 아, 좋죠.”

곽대출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내 뒤따르던 직원이 알아서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잠시 계시면 제가 구두와 운동화를 준비해보겠습니다.”

장 보러 가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드는 아이의 심정이 이럴까?

함께 가자고 주인영을 붙들고 싶었던 곽대출은 다른 매장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돈 정말 좋네!”

“네?”

“아니요. 혼자 한 말입니다.”

“옷을 한 번 입어보시겠어요?”

“그럽시다.”

무릎을 짚으며 일어서는 곽대출의 모습이 전신 거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신 차려. 재벌 후계자가 된 천중명도 멀쩡하게 버티는데 고작 여자 따위에 혼이 팔려서…!’

매니저가 준비해 준 옷을 받아들고 탈의실로 들어서는 곽대출은 정말 몰랐다.

그가 낑낑대며 옷을 갈아입는 동안, 수선실의 책임자가 줄자와 옷핀을 들고 달려오고, 주인영이 가리킨 구두와 운동화가 사이즈, 색상별로 매장을 향하고 있었으며, 차가운 커피와 뜨거운 커피를 모두 챙긴 직원이 경보선수 같은 걸음으로 최선을 다해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천중명의 사무실에는 뒤편으로 읽지도 않는 고전이 잔뜩 꽂힌 책장과 거대한 책상, 그 앞으로 비싸 보이는 소파가 있었다.

천중명은 책상에 앉았고, 그 앞에 고상득이 섰다.

보고라고 놓아준 서류에는 별거 없었다.

지난달의 매출과 주문량이 숫자만 읽을 줄 알면 알아볼 수 있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무님. 이게 확정된 다음 달 주문이라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제가 납품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이 시선을 들었다.

“여기 비용 말인데요. 비용 명세를 좀 보고 싶은데요?”

“예?”

“비용 명세를 보고 싶다는 데 뭘 그렇게 놀라세요?”

“지금 말씀이십니까?”

“오늘은 됐고요. 이제부터 확인할 테니까 매주 월요일에 지난주 매출과 매입, 소요 비용, 그리고 잔고를 전부 보고해 주세요. 그리고.”

“예.”

당황한 얼굴의 고상득이 이번엔 또 뭔가 하는 눈으로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인사고과 서류 말인데요.”

“예? 예.”

“그거 내가 볼 수 있죠?”

“아! 은성 용역에서 파견한 직원은 그쪽에서 일괄 관리해서 우리는 기본 자료만 받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요. 그 기본 자료를 보고 싶다고요. 파견 직원이든, 계약직원이든, 우리 회사가 비용을 부담하는데 누구에게 얼마가 나가는지 나도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고상득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얼굴이었다.

“우리 직원이 70명쯤 되죠?”

“전부 76명입니다.”

“그중에서 유류대, 전기요금, 기타 잡비 제외하면 도대체 직원 급여는 얼마가 나가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고상득이 뜬금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뭐가요?”

“직원들에게 너무 많은 급여가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대표님의 지적을 통해 새롭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아.”

이거야 정말, <노인과 바다>를 읽으라고 했더니 상어의 처절한 사투기가 감동적이었다는 독후감을 내놓는 꼴이었다.

“상무님.”

“예.”

“직장 생활을 잘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쯤 아시죠?”

“그럼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대표님은 모르실 겁니다.”

천중명은 몇 번이나 “그만해!”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을 꾹 누르며 고상득의 최선을 다한 발언을 모두 들어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나면 상무님은 어떻게 되실 거 같습니까?”

“예에?”

“잘리지 않으면 어디 지방 끝에 가서 홀로 버텨야 할 겁니다. 안 그래요?”

고상득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상무님도 잘 아시겠지만, 나는 막내여서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회사 두 개를 맡겼습니다. 왜 그런 것 같습니까?”

“후계자로 내세우시려고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지경그룹의 후계자 후보로 세우려는 거겠죠. 만약 내가 정말 지경그룹의 후계자가 되면 상무님은 어디 계실까?”

독주를 단숨에 들이켠 사람처럼 고상득의 볼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우리 솔직합시다. 이럴 때 내가 왕회장님의 눈에 들려고 하면 형님들이 가만둘까요? 그렇다고 형님들이 시키는 대로 해서 후계자가 되겠습니까? 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포기하느냐, 아니면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서 후계자가 되느냐?”

“그야….”

“어떻게 하실래요? 원하시면 내 라인이 아니라고 인정받을 자리로 보내드리죠. 그렇게 남은 직장 생활 편안하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끝까지 후계자 싸움에 달려들겠습니까?”

아까보다 더 크게 고상득의 목젖이 움직였다.

“당장 내게 급한 것은 세력입니다. 언제고 나를 지지해줄 사람들. 그렇다면 우선 기본에 충실해야겠지요.”

“기본이라 하시면…?”

“그룹 내에서 누구도 못했던 일들을 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출을 늘릴 방법과 비용을 절감해서 이익을 늘릴 방법을 찾아야죠.”

“그런 말씀이라면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여간 태도 변화 하나는 최고여서 고상득은 불씨만 당겨도 금방 사명감으로 활활 타오를 듯한 태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앞으로 변화가 많을 겁니다. 자신 없으면 다음 주 월요일까지 말씀하세요. 아까 말했던 곳으로 보내드릴 테니까. 아시겠습니까?”

“예.”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회계 장부 전체를 이 컴퓨터에 모두 연결해 놓으세요.”

천중명의 시선을 확인한 고상득이 한 박자 늦게 “예.”하는 답을 꺼내놓았다.

“나는 이미 쫓겨날 각오도 했습니다. 이 싸움은 어차피 그런 싸움입니다. 내가 밀려나면 당연히 상무님도 마찬가지 모습이 되겠지요.”

고상득은 답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형님들에게 오늘 내가 한 말을 전해도 됩니다. 그런다고 해서 상무님이 그쪽에 줄서기는 어렵겠지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세요.”

“저야….”

고상득은 어쩐지 슬픈 얼굴이었다.

“가 볼 테니까 월요일에는 자료를 볼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혹시 그전에라도 마음의 결정이 서면 바로 알려주시고요.”

말을 마친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고상득과 대화를 하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차복수라는 나이 든 직원과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얻었고, 그때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생각이 굳었는지 모른다.

어차피 원했던 것도 아닌 재벌 후계자가 되었으니 눈치 보며 악독한 짓에 가담하기보다는 시원하게 꼴통 재벌 한 번 돼보고 마는 거지 뭐가 더 있겠나.

물론 쉽게 물러날 생각은 아니었다.

그 지독한 도깨비 생활을 하면서까지 살아보려고 애썼던 천중명이니까.

목표가 생겨서 그런 모양이었다.

몸이 바뀐 이후 처음으로 천중명은 속이 후련할 정도로 숨을 들이켤 수 있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고상득과 직원 넷, 그리고 차복수의 인사를 받으며 천중명은 공장을 나섰다.

이제 남은 일은 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다독이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놈은 옷을 다 샀나?

공장을 빠져나온 천중명은 한적한 길에 차를 세우고 휴대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곽대출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 예, 대표님.

웃음이 나올 정도로 공손한 대꾸가 있었다.

“아직 멀었어?”

- 이곳의 주인영 매니저분이 권해주는 대로 다 샀습니다. 지금은 매니저님의 방에서 수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뭔가 어색한 곽대출의 음성이었다.

하긴, 느닷없이 존댓말을 사용하려면 그렇기도 하겠다.

“이쪽 일이 일찍 끝나서 데리러 갈 테니까 수선이 끝나더라도 잠깐 기다려.”

- 여기 오십니까?

“아니면 나는 병원에 들러야 하니까 집에 가 있든지.”

- 아닙니다. 오시면 제가 병원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지금 출발할게. 한 40분 걸릴 거야.”

- 알겠습니다, 대표님.

뭔가 이상한데?

어쩐지 곽대출은 천중명의 방문이 내키지 않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갸웃했던 천중명은 백화점을 향해 차를 몰았다.

가서 보면 알 일인데 뭐 깊이 고민할 게 있겠나.

백화점에 들러서 곽대출을 태운 뒤에 병원에 들렀다가 함께 평택과 이천을 돌고 나면 오늘 하루가 끝난다.

오른팔을 핸들에 걸친 채 천중명은 앞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혹시 보고 있냐? 그렇다면 계속 지켜봐라. 천중명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바뀌는지. 적어도 이전의 너와는 확실히 다를 거다.”

지경디자인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게 된 느낌이었고, 마주쳐야 할 어려움과 고난이 얼마나 클지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절대 쉽지 않을 거다.

죽고 사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전의 천중명이 했던 짓을 감안하면 말이다.

비참한 꼴로 쫓겨날 수도 있을 테고.

“내가 가진 게 있어서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걸!”

앞으로 펼쳐질 1년의 일들을 대강 짐작한다.

그곳에서 다시 돌아왔으니까 그렇다.

거기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지만, 전기 감전을 통해서 다른 곳의 일들을 볼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재벌 후계자를 거쳐 총수가 되는 일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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