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013.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1)
출근 전에 할 일이 많았다.
곽대출의 지문을 등록했고, 다음으로 홈바의 사물함에 있던 출입증 카드도 건네주었다.
이제 정문이고 빌라 현관이고 곽대출이 다가서기만 하면 자동으로 문이 열린다.
마지막으로 천중명은 주방을 향해 욕을 뱉었다.
“씨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우악스럽게 생긴 곽대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앞이었다.
“호출을 다른 말로 교환.”
[다시 말씀해주세요.]
“설정.”
[설정화면을 보여드립니다.]
천중명은 먼저 늦게 집에 들어올 때도 불을 못 켜게 바꾼 뒤에 호출 음성어 버튼을 눌렀다.
[새롭게 호출할 이름을 불러주세요.]
“도깨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도깨비.”
천중명의 음성을 파장으로 기억한 화면이,
[입력되었습니다.]
하고는 설정화면으로 바뀌었다.
“뭐냐? 아니지! 연습해야지. 뭡니까, 대표님?”
“집에 들어왔더니 이게 혼자서 거실 불을 켜놓았더라구. 그래서 한 30분 빈집을 온통 뒤졌다.”
말을 마친 천중명은 곽대출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적당하게 골라 입으라고 했는데 체형이야 그렇다고 쳐도 바짓단과 재킷의 소매가 헐겁고 길어서 영 아쉬웠다.
“대출아. 그러지 말고 카드 줄 테니까 백화점에 들러서 옷을 몇 벌 사라. 그런 뒤에 합류하자.”
시선을 떨군 곽대출이 먼저 양팔을 쭉 펴 보았고, 다음으로 오른쪽 다리를 들어 보였다.
“그게 낫겠지…요?”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대하지?”
“연습한다니까!”
발끈했던 곽대출이 한숨을 푹 내쉬며 ‘요!’ 자를 뒤늦게 토해냈다.
“일단 나는 수원에 있는 지경디자인에 들를 거니까 너는 옷 사서 여기로 와 있어. 아니면 전화하든가. 오늘은 올 사람이 없으니까 누가 벨 누르더라도 모른 척해.”
마지막으로 전화번호를 찍어주었고, 이어서 도어록의 비밀번호까지 전해주었다.
“나가는 건 같이 나가시죠, 대표님.”
“백화점 아직 안 열었어.”
“남은 시간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뭔가 대화가 갑갑한 느낌이었지만, 천중명은 잠자코 곽대출과 함께 100평 빌라를 나섰다.
승용차로 함께 정문을 나선 다음이었다.
탄천에 곽대출을 내려준 천중명은 곧장 수원의 지경디자인을 향해 차를 몰았다.
직원이 대략 70명 정도 되는 공장이었다.
상무인 고상득이 도맡다시피 해서 이전의 천중명은 간략한 보고를 듣거나 결재란에 사인 몇 개 하는 게 업무의 전부였다.
운이 좋은 건지, 시절을 잘 타고 난 건지는 모른다.
수원이 점점 발전한 덕분에 지경디자인의 공장 터는 솔직히 천중명이 보기에도 저렇게 두기에 아까웠다.
돈이 돈을 번다.
정부지원금으로 공장 짓고, 그룹이 소모하는 종이박스를 생산하는 것으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다가 지금처럼 주변이 개발되면 그곳에 아파트를 짓는다.
공장용지를 대지로 바꾸는 거?
그 정도를 해결 못 하고서 오늘날의 지경그룹이 있었겠나?
해당 국회의원과 공무원들이 지역 발전을 외치고, 아파트가 들어선 뒤에 땅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는 주민들이 나서주면 막힐 것은 없었다.
오래된 저층 아파트와 높다랗게 새로 지은 아파트 사이의 도로를 달리면서 천중명은 씁쓸하게 웃었다.
저런 아파트 하나 갖는 것을 목표로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염병할 몸뚱이가 바뀌면서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도대체 왜 그랬냐?”
트럭에 치여 사망한 놈이 답을 줄 것은 아니었지만, 답답해서 던져본 질문이었다.
**
탄천의 건너편으로 종합운동장의 옆구리가 보이고, 그 아래 주차장에는 노천극장의 스크린과 드문드문 주차한 차들이 있었다.
천중명과 헤어진 곽대출은 탄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위쪽에 웅크려 앉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
100평 빌라에 처음 들어가 봤다.
천중명이 출근한 뒤에 그 넓고 고급스러우며 화려한 빌라에 혼자 있을 생각을 하니까 이상하게 숨이 턱턱 막혀서 무작정 따라나선 거였다.
찰칵.
“후우.”
곽대출은 허벅지에 상체를 기댄 자세로 깔깔하게 떨어지는 햇살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뱉었다.
“씨발.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혼잣말을 털어낸 곽대출이 손가락 깊숙이 꽂아 넣은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천중명의 말이 진짜라면 억울하기는 하겠다.
그런데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억울하기만 할까?
돈이 엄청나게 많은 재벌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탄천 건너편의 종합운동장을 보며 곽대출은 바보처럼 히죽 웃었다.
3억이면, 3억만 있다면….
곽대출은 고개를 숙여 천중명의 신용카드를 넣어둔 바지 주머니를 보았다.
마음 놓고 백화점에서 양복이랑 옷 사라고 할 정도면, 거기에 재벌집 후계자에게 3억 원은 그리 큰돈도 아닐 거다.
그가 아는 천중명이라면 빌려주고도 남을 놈이었다.
뭐, 씨발, 천중명이 저 새끼도 어차피 자기 돈 아닌 거잖아!
어쩌다 몸이 바뀌어서 재벌의 후계자가 된 거니까 3억쯤 그렇게 아까울 것도 없을 테고!
갑갑한 얼굴로 계단에 담배를 비벼 끈 곽대출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곽대출!”
그리고는 건너편의 종합운동장을 향해 엄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고작 돈 때문에 이런 모습 보이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 한 번만 더 이런 생각 하면 넌 곽대출이 아니다!”
히죽 웃은 곽대출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있어 봐. 곽대출 아니면 뭐로 하지? 박대출, 강대출?”
탄천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삼성동 방향으로 걸으며 곽대출은 넋 빠진 놈처럼 실실 웃었다.
“목숨 걸고 천중명 대표님을 지켜야 하는 것 말고는 하나도 모르겠다! 염병! 믿는다! 저 새끼가 어떤 모습이든, 그게 나와 함께 생활했던 도깨비였다는 것만 기억할 거라고!”
갓 출소한 사람 꼴로 곽대출은 혼잣말을 쏟아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커다랗게 한마디를 더 외친 뒤에 묵묵하게 걸음을 옮겼다.
**
수원의 공장에 들어선 천중명의 승용차를 향해 경비가 급하게 달려왔다.
“오셨습니까?”
나이 든 양반이 굳은 자세로 차에서 내리는 천중명을 향해 경례했다. 이전의 천중명이라면 멸시의 눈초리쯤 날려주고 공장으로 들어섰을 거였다.
어떻게 하지?
이전의 천중명처럼 거만하게 굴어야 하나,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까?
운전석에서 내린 천중명의 시선이 나이 있는 경비를 곤란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것이 그랬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네? 차복수. 차복수입니다.”
차복수가 마른 음성으로 답을 꺼냈다.
“우리 회사에 근무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11년 됐습니다.”
천중명이 넉넉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공장 안에서 작업복 점퍼를 입은 고상득 상무와 직원 넷이 급하게 달려 나왔다.
“오셨습니까?”
“아, 상무님. 지금 도착했어요.”
고상득의 뒤에서 함께 나온 직원 넷은 상체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근무한 지 얼마나 됐는지 물어봤어요.”
천중명이 대꾸한 직후였다.
고상득이 못마땅한 얼굴로 차복수를 노려보았다.
“당신 여기 근무한 지 얼마나 됐어?”
40 후반의 고상득이 70쯤 보이는 차복수에게 반말을 던지고 있었다.
“11년 됐습니다.”
말릴 틈도 없었다.
“당신 어디 소속이야?”
“은성 용역에서 나왔습니다.”
“알았어.”
“죄송합니다, 상무님.”
나이 든 차복수가 이유도 모른 채 고개를 숙였다.
“이 양반이 어디서 감히 대표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어? 대표님. 제가 이 직원은 바로 교체하겠습니다.”
고상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앞에서 차복수는 세월에 눌린 얼굴에 절망을 달고 있었다.
이 양반은 잘못한 거 하나 없다.
달려 나와 경례했었다.
그런데도 고상득의 말 한마디에 11년을 다닌 직장을 잃게 생겼다.
정규직이면 최소 3개월의 급여를 보장받을 텐데 용역 회사에서 파견한 직원은 그런 것도 없이 나가야 한다.
그냥 이전의 천중명처럼 공장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데 공연히 아는 척했다가 힘없는 노인의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직장을 빼앗은 꼴이 되었다.
‘세상에 없던 꼴통 재벌이 되라는 게 이런 겁니까?’
다른 사람 몰래 숨을 내쉰 천중명은 하늘을 힐끔 보았다.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의심받을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차복수의 직장을 뺏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렴, 꼴통 재벌이 됐으면 됐지, 비겁하게 살 것 같냐?
픽 웃은 천중명은 시선을 떨궈 고상득을 보았다.
“그냥 두세요.”
“예?”
“그냥 두시라고요. 경례해줘서 고맙다고 한 것뿐인데 그거로 이 양반을 교체하면 내가 뭐가 됩니까?”
함께 온 직원 넷을 돌아보았던 고상득의 표정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바뀌고 있었다.
“역시 우리 대표님은 직원들을 배려하시는 마음이 바다와 같으십니다. 이러니 우리 직원들이 대표님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저토록 한순간에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건지, 천중명이 다시 또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런 면에서만큼은 고상득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다.
“차복수 씨. 당신 말이야. 앞으로도 우리 대표님을 하늘처럼 모셔야 돼. 알았어?”
“예.”
천중명의 측근이라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상득이 차복수에게 충성을 강조했다.
어쩐지 고상득의 이마를 홱 밀치고 싶은 욕구를 꿀꺽 삼킨 천중명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기가 울어대며 액정에 천상기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여보세요?”
- 나다. 이사회에서 화장품과 냉동창고의 대표로 너를 선임했으니까 오후에 두 곳을 방문해서 회사 업무를 파악해.
마치 써놓은 것을 읽는 것처럼 감정 없이 쭉 건너온 말이었다.
- 알아들었어?
“예. 알았습니다. 그러면 지경디자인은 어떻게 됩니까?
- 그건 계속 네가 맡을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니 잊지 말고 오후에 두 곳 들려서 업무 파악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대표님 혹시…?”
“뭡니까?”
“혹시 그 화장품과 이천 공장을 맡으신다는…?”
“예. 오후에 두 곳의 업무를 파악하라고 하네요.”
천중명의 대답이 끝난 직후였다.
“만세! 천중명 대표님 만세! 뭣들 해? 같이 해야지! 만세!”
잠시 멈칫했던 고상득이 미친 사람처럼 함께 있던 직원들과 차복수를 윽박지르다시피 하며 두 팔을 높이 들었다.
“뭐하는 거예요?”
“우리 대표님께서 그룹의 전면에 나서시는 결정적인 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요?”
“그저 저는 우리 대표님 보필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고. 예! 그저 대표님의 회사를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서라도 대표님을 위해 뼈를 묻을 각오를 세운 바 있습니다.”
낯간지러운 말을 사명감 가득한 얼굴로 뱉어내는 재주도 지녔다. 고상득 상무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들어갑시다.”
“아! 예,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상득은 꽃가루라도 뿌릴 듯 흥분한 표정으로 공장을 향해 움직였다.
“두 곳의 업무파악은 제가 다 해놓겠습니다. 그러니 대표님께서는 아무 걱정 마십시오.”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가득한 고상득의 바람을 들었지만, 천중명은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천중명이 하려는 일을 알게 되면 저 인간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하기는 했다.
천중명이 공장 건물로 들어설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전화기가 또 몸을 떨어댔다.
“여보세요?”
- 천중명 대표님? 지경백화점 담당 매니저 주인영입니다.“
“그런데요?”
- 지금 어떤 남자분이 대표님의 신용카드로 결제를 요청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대표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면 죄송합니다.
에효!
곽대출의 행색을 떠올렸던 천중명은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 잠시 기다리라고 했는데 분실하신 것은 아닌지….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했었죠?”
- 주인영 매니저입니다, 대표님.
“내가 건네준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주인영 씨가 그 친구에게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로 정장 서너 벌과 간편한 옷들까지 전부 준비해 줘요.”
- 아, 예!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예산은 얼마나….
“카드 한도 내에서 전부 사용하세요.”
- 예에?
어쩐지 큰 실수를 했나 싶은 반응이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그러나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아시겠죠?”
천중명이 물었고,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냥한 가운데 다부진 주인영의 음성이 건너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