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드 오브 머니-12화 (12/315)

# 12

012. 다시는 방심하지 않는다 (2)

소음 하나 없이 열린 현관문을 지난 천중명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왼쪽의 홈바에서부터 반대편의 드레스룸 앞까지를 단숨에 살폈다.

회칼 들고 설치는 깡패 따위 안 무섭다.

그렇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평택공장에서도 여유 부리다가 전기에 타고, 쇠파이프와 회칼을 맞은 채 죽었던 거 아니겠나.

달칵. 띠루룩.

현관을 닫은 천중명은 커다랗게 원을 그리듯 소파를 돌아서 홈바를 향해 걸었다.

홈바의 건너편 아래쪽에 누군가 숨어 있을까 싶었는데 정작 싱크대와 홈바 사이의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달각.

홈바에 휴대전화기와 차 키, 지갑을 내려놓은 천중명은 나무틀에 꽂힌 작은 주방용 칼을 뽑았다.

특수부대에 따라 사용하는 칼은 그 규격이 다르다.

그중 UDU는 날이 짧고 좁은 칼을 사용했다.

그래서 베는 훈련을 주로하고, 혹여 목 아래나 심장을 찌를 때면 서너 번을 연달아 쑤셔 박아서 적을 제거한다.

휘릭.

천중명은 손잡이까지 쇠로 된 독일제 주방 칼을 거꾸로 들었다.

청소를 도와주는 김순례는 과일 깎는 데 썼지만, 정작 이 칼의 용도는 작은 생선의 뼈를 바를 때 쓰는 거여서 목줄을 따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스슥.

거실을 지나 드레스룸으로 움직인 천중명은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살폈고, 이어서 고개를 기울여 안쪽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재킷과 셔츠가 걸린 붙박이장, 침실, 건너편의 서재, 다시 밖으로 나와 손님방, 다용도실을 다 뒤져보았는데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엉뚱하게 30분만 날린 셈이었다.

“뭐야, 씨발.”

달그락.

홈바에 칼을 올려놓은 천중명이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을 때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느닷없이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휘이익! 꽈등!

천중명은 반사적으로 홈바 위를 구르듯 건너편으로 몸을 던진 것과 동시에 주방 칼을 잡아 거꾸로 들었다.

[현재 주문 가능한 음식은 햄버거와 치킨과 족발이 있습니다. 원하는 메뉴가 있으신가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싱크대와 선반의 중간에서 태블릿만 한 화면이 켜지고 주문할 수 있는 음식과 가격, 거리가 올라와 있었다.

“안 먹어!”

어처구니가 없어서 혼잣말처럼 던진 답이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그런데도 화면은 천중명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서 또다시 말을 걸었다.

“안 먹는다고. 주문 안 해.”

[그럼 필요하신 것이 있을 때 알려주세요.]

화면이 싹 사라졌다.

기억 속에서는 1년 동안 이 집을 꽤 드나들었는데 이런 장치가 있는 걸 왜 몰랐을까?

혹시?

주방 칼을 나무틀에 넣으며 천중명은 싱크대 위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거실 불을 꺼.”

대꾸는 없었다.

뭐야, 나타나는 것도 제 맘대로인 거야?

당최 이 집은 뭐가 이렇게 복잡해.

“뭐 이런 씨발.”

[주문하시겠습니까?]

욕을 뱉기 무섭게 태블릿이 다시 켜져서 천중명은 고개를 디밀었다.

혹시 호출을 욕으로 정해놓은 건가.

그건 그렇고 확인할 것이 먼저 있었다.

“거실 조명 조절.”

[거실 조명의 설정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화면에 올라온 조작 방법을 보며 천중명은 맥이 쭉 빠졌다.

소등한 상태에서 천중명이 빌라의 현관에 들어서면 자동으로 거실 불이 켜지도록 정해져 있었다.

“에효.”

이건 뭐, 없이 살아서 이런 걸 모르는 게 죄다.

마음을 놓은 천중명은 시원하게 물을 마신 뒤에 드레스룸을 향해 움직였다.

옷을 벗고는 샤워실에 들어가 물줄기를 틀자, 지겹게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길었던 하루가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푸-!”

물줄기 아래에서 벽을 짚은 채 선 천중명은 그 자세에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짚었다.

적응해야 할 일이 많았다.

거실의 조명과 같이 사소한 것들도 있고, 평택의 화장품 회사와 이천의 냉동창고처럼 커다란 일들도 있었다.

샤워를 끝내자 무거웠던 몸과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간편한 바지와 면 티셔츠 차림으로 거실로 나온 천중명은 현관의 안쪽 안전 고리를 걸고서는 소파에 털썩 누웠다.

이렇게 잠들었다가 깨었을 때 원래의 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1년 전이서 이 빌어먹을 개인비서 하기 전이었으면 더 좋겠고.

피곤해서 몸이 소파 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데 신경이 날카로워서인지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마음대로 해라.

1년 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도 좋고, 이대로 깨도 좋다.

죽는 것보다야 그게 백 번 낫겠지.

거기까지였다.

천중명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퍼뜩 잠에서 깨어난 천중명이 고개를 좌우로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100평이나 되는 호화 빌라였다.

“젠장!”

어떤 이는 더럽게 부러워할 환경에서 천중명은 대뜸 욕을 뱉었다.

휴대전화기에 찍힌 시간은 오전 6시 30분이었다.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그럴 거다.

대신 내키지 않는 것까지는 다른 소리 하지 마라.

소파에 앉아 잠시 빌라를 받아들였던 천중명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뭔 집에 쌀과 김치도 없는지.

주방을 이리저리 뒤진 천중명은 어제 김순례가 사다 놓은 라면 두 개와 달걀 두 개를 꺼낸 다음, 번쩍번쩍 윤이 나는 냄비에 물을 부어 인덕션에 올렸다.

먼저 라면을 기운차게 먹어준다.

그런 뒤에 감전을 위한 도구를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이어서 천봉서와 천상기의 통보에 맞춰 하루를 보낸다.

곽대출이 와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몸뚱이가 바뀌었다는 황당한 사연을 듣고도 놈이 곧바로 나서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몸뚱이가 바뀐 걸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걸릴까?

받아들일 수나 있으려나?

홈바에 기댄 천중명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띵동댕동. 띵동댕동.

느닷없이 벨이 울렸다.

밤에 지랄 맞게 야식 주문할 거냐고 묻던 태블릿은 이럴 때 왜 입을 다물고 있지?

태블릿이 있던 자리를 노려본 천중명은 인터폰이 매달린 현관을 향해 움직였다.

“부지런도 하다. 이 시간에 누구냐? 도대체?”

천봉서거나 천상기, 또는 그들이 보낸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면 천중명의 아침을 이토록 당당하게 방해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띵동댕동. 띵동댕동.

“갑니다. 가요. 어디 한번 해봅시다. 누가 이기나.”

독기를 뿜어내며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던 천중명은 맥이 탁 풀리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곽대출이 고약한 눈으로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어서였다.

“밥은 먹었냐?”

천중명의 질문에 곽대출의 목이 짧게 뒤로 빠졌다.

[문이나 열어.]

놈이 던지는 불편한 답으로 봐서는 아침을 안 먹은 게 분명했다.

모니터에 정문을 들어선 곽대출이 빌라의 현관에 도착하는 과정이 계속 나왔다. 놈을 위해 빌라 현관의 버튼까지 눌러준 천중명은 곧장 주방으로 움직였다.

냄비에 물을 더 부었고, 라면도 두 개 더 꺼냈다.

아차차, 달걀을 빠트릴 뻔했다.

그런 다음에 현관으로 가서 도어록의 버튼을 눌렀다.

띠루룩.

문을 연 직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허름한 보스턴백을 들고 있는 곽대출은 마치 교도소를 막 출소한 놈처럼 보였다.

아직 떨쳐내지 못한 어색함을 각오로 단단하게 누른 얼굴을 하고서 놈은 복도를 살피며 다가왔다.

“라면 끓인다. 두 개면 되지?”

“이렇게 살면서 라면으로 아침을 먹어?”

“그렇게 됐어. 오늘만 이해해.”

곽대출이 신발을 벗고 들어와 안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몇 평이냐?”

“한 백 평 되지 싶다.”

“혼자 있으면 안 외롭냐?”

“어제가 첫날이라서.”

소파 옆에 가방을 놓은 곽대출이 주방을 바라보았다.

“나는 세 개.”

“뭐?”

“라면 세 개. 왜 없어?”

천중명은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섯 봉짜리 라면에서 어제 하나 먹은 참이라 네 개가 전부라 그랬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잠시라도 근심을 내려놓고 유쾌해질 수 있었던 것은.

천중명과 곽대출은 달걀 네 개가 들어간 라면을 기운차게 먹었다.

“에이! 아쉽게!”

마지막에 바닥에 고인 알짜배기까지 훌렁 처마신 곽대출이 입맛을 다셨다.

“커피?”

“담배 펴도 되냐?”

고개를 끄덕인 천중명은 홈바의 아래에서 라이터와 재떨이, 그리고 담배를 꺼내주고는 커피포트에 물을 부었다.

이게 어제는 스위치를 누르는데 전기가 올랐었다.

오늘도 그러면?

뭐, 지금은 곽대출이 함께 있으니까.

커피포트를 노려보던 천중명은 스위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칵.

맥 빠지게 아무 일도 없이 빨간 불빛만 들어왔다.

아무래도 전기충격기를 주문해야 할 모양이었다.

물은 바로 끓었다.

맛나게 만든 봉지 커피와 담배를 앞에 두고 천중명은 곽대출이 던지는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해주었다.

“네 말이 진짜라면 화장품 회사에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거네?”

“라면 잘 처먹고 이제 와서 뭔 소리야?”

“몸뚱이가 바뀌었다는 말을 믿었으니까, 네 눈빛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인정했으니까 온 거야. 그렇더라도 완전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시간은 좀 주라.”

모처럼 곽대출이 진지한 얼굴이어서 천중명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내가 깍듯이 널 모셔야 하는 거지?”

“그래야 의심을 덜 받겠지.”

“팔자에 없는 종노릇하게 생겼네.”

픽 웃은 천중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더 마셔?”

“물 좀 덜 뜨겁게 해.”

“시끄러워. 그냥 주는 대로 마셔.”

둘이서 다시 두 봉짜리 커피를 놓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어떻게 고용했다고 할래?”

“내가 경호원 겸 개인비서를 알아보다가 소개받은 거로 하자. 새벽같이 오랬더니 정말 네가 이 시간에 온 거고. 경력 듣고서 채용했다는 게 가장 적당하지 않겠냐?”

“소개한 사람은?”

“누가 소개해줬다고 할지는 아직 못 정했다. 알아보면 바로 들통 날 수도 있어서.”

커피를 마신 곽대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부르라고?”

“대표님.”

“어느 회사?”

“지금은 지경그룹에서 사용하는 포장지 박스를 생산하는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어. 지경디자인. 그러니까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아.”

곽대출이 회사명을 외우는 것처럼 눈알을 굴렸다.

“지경디자인, 천중명 대표님.”

그리고는 천중명을 바라본 채 회사 이름과 이름, 직함을 불렀다.

“대표님?”

“둘이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하자.”

“당분간은 이게 좋겠다. 행여나 사람들 있는 곳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욕을 하면 서로 곤란하니까.”

천중명은 잠자코 곽대출을 바라보았다.

“왜? 뭐?”

“와줘서 고맙다.”

“지랄하십니다. 대표님.”

진지한 분위기가 싫은 곽대출이 엉뚱한 답을 꺼내놓았다.

“이제 회사에 가냐?”

“대강 그럴 시간이다. 안에 들어가서 당장 입을 만한 옷을 찾아봐. 깔끔한 거로. 나는 그동안 씻고 나올게.”

말을 마친 천중명은 욕실로 향했다.

지경그룹의 셋째 아들이 돼서 맞이한 둘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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