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009. 무조건 따른다 (2)
어머니란 말과 병원, 그리고 살해 위협에 가까운 협박을 듣는 순간 천중명은 반사적으로 볼을 씰룩하고 말았다.
“건방진 놈.”
그 모습을 보았는지 천봉서의 한 마디가 떨어졌고,
“차 준비해 왔어요.”
계단에서 강승애의 말이 들렸다.
차를 준비했다는 여자는 홀가분하게 걸어오고, 그 뒤에서 하녀 복을 입은 메이드가 가로로 기다란 쟁반을 들고 따라와 차를 놓아주었다.
“대화 나누세요.”
강승애는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베이지색 치마와 셔츠, 왼쪽 가슴에 반짝이는 장식이 수놓아진 재킷을 입었다.
태도와 행동 역시 세련돼 보였다.
그러나 테이블에서 돌아서며 보여준 눈빛만큼은 표독하기 그지없었다.
강승애와 메이드가 아래로 내려갔다.
“분명하게 알려줄 테니 다시는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해라.”
하얀 자기 찻잔에 담긴 브라운색의 홍차가 관심을 끌기 위해 향을 뿜어내는 앞이었다.
“복장은 말할 것도 없고, 내게 허락받지 않은 말은 절대 왕회장님 앞에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답을 기다리는 모양인지 천봉서는 말을 잇지 않고 있었다.
순순히 “예.”라고 할까, 아니면 묵묵하게 버텨볼까?
누군가가 뒤에서 코와 입을 꽉 막은 것처럼 뻑뻑한 시간이 흘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만, 건방이 묻었구나.”
천봉서의 비웃음이 찻잔을 향해 시선을 떨군 천중명의 이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회장님의 씨를 받았다고 다 핏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경고했었다. 천박하게 몸을 굴린 네놈의 에미처럼 너 역시 더럽고 천박할 뿐이라는 것을 명심해.”
그냥 참으면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픽 웃음이 올라왔다.
제 놈들은 뭐 잘나서 재벌 후계자란 타이틀을 달았나?
고작 재벌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거 말고 뭐 내세울 게 있어서 이토록 지랄 같은 자부심을 떨어대는 건지.
“웃어?”
천봉서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홰액!
그의 오른손이 천중명의 왼쪽 뺨을 노리고 날아왔다.
꽈악!
천중명은 천봉서의 오른손 손목을 왼손으로 붙잡고서 시선을 똑바로 들었다.
어차피 좋게 끝나긴 이미 틀렸으니 이참에 관계 설정을 다시 하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너…. 너, 이놈…?”
“적당히 합시다.”
놀란 두꺼비의 몰골로 천봉서는 멍하니 있었다.
“이러다가 내가 후계자로 정해지면 서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천봉서는 당황한 게 분명했다.
권력과 돈에 의지해 다른 사람을 누르다가 정작 제 힘으로 무언가를 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어쩔 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알아들었습니까?”
천봉서는 놀라움과 당혹, 그리고 그가 느끼는 치욕을 뒤엉켜 바른 얼굴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천중명은 천봉서의 팔을 테이블 옆으로 끌었고, 그 뒤에야 놓아주었다.
“기업을 맡겨 준다니 내 방식대로 경영은 해보겠습니다. 싫다면 다시 가져가시고.”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천봉서의 눈 끝이 꿈틀했다.
“경고라고 하셨으니 나도 하나 돌려드리죠.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손 놀리면 그 손목 확 부러트려 드릴 테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그리고 복장 말인데요.”
천중명은 시선을 잠시 떨궈 입고 있는 옷들을 바라보았다.
“내 복장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결국, 천봉서가 볼을 씰룩였다.
이왕 내친걸음인데 여기서 뭐 비겁하게 꼬리를 내리겠나.
픽 웃어준 천중명은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건드리는 순간, 조금 전에 이 홍차를 주고 가신 부인을 똑같이 해드립니다. 필요하다면 조카들에게까지 덤으로 은혜를 갚아드릴 마음도 있습니다.”
천중명의 날카로운 눈빛과 전혀 기죽지 않은 태도를 보며 천봉서는 아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차 드시고 천천히 내려오세요.”
그를 뒤로 한 채 천중명은 느긋하니 계단을 내려갔다.
커다랗게 원을 그리는 계단을 내려서자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천상기와 강승애가 시선을 돌렸다.
“가도 됩니까?”
천상기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고, 눈을 껌벅이던 강승애가 위층과 천중명을 번갈아 보았다.
“다른 말씀 없으시면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준 천중명은 그 길로 본관의 현관을 향해 걸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도심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상쾌한 풀과 나무의 향기가 코를 파고들었다.
어둑하게 내려앉은 어둠을 밀어낸 하얗고 파란 조명들 틈에서 천중명은 잔디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을 나서기 전이었다.
천중명은 고개를 돌려 본관 건물을 바라보았다.
가족 간에 유산 더 받겠다고 싸우는 거 인정한다.
욕심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재벌 아버지를 둔 게 자신의 능력인 양 살지는 말자.
가난하게 태어난 게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는 아닌 거니까.
본관 건물을 향해 피식 웃어준 천중명은 현관을 나섰다.
정문 앞에 있던 직원이 천중명이 타고 왔던 독일 승용차를 준비해 놓고 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본관의 1층 서재에서는 정문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둥그렇게 등을 받쳐주는 의자에 앉은 천호득은 정문을 나서는 천중명을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무슨 일이에요? 회장님, 왜 그러고 계세요?]
그때 책상 위의 스피커에서 강승애의 음성이 나왔다.
[저놈이 이상해.]
[당당하던데요? 그래서 나는 우리 회장님이 뭔가 든든한 것을 쥐어주었나 싶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천봉서는 아직 얼이 빠진 음성이었다.
“모자란 놈들….”
그 음성을 들은 천호득은 고개를 짧게 저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저놈이 해보겠다며 대들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아니! 감히 제깟 놈이 어디에서? 그래서요? 저 근본 없는 인간이 우리 회장님께 대들었다는 말씀이세요?]
[제 놈의 에미를 건드리면 당신과 우리 애들까지 어찌하겠다고 나섰어.]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있어요?]
세 사람 모두 말을 잃은 모양인지 대화가 뚝 잘렸다.
“허! 허허! 허허허!”
소파에서처럼 웃음을 길게 터트린 천호득은 정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천중명은 이미 출발한 뒤였다.
그는 책상 위 기계 장치의 버튼을 내린 뒤에 휴대전화기를 들었고,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날세. 지금부터 중명이의 움직임을 저녁마다 보고해 주겠나?”
상대방의 대꾸가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웃음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놈이 나를 당장 어찌하기에는 자네의 존재가 부담스럽겠지. 그러니 지금은 막내 녀석을 좀 살펴 주게. 혹여 위험한 꼴에 빠지면 슬쩍 도움도 주고.”
힐끔 책상 위의 기계를 노려보았던 천호득은 넉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장자를 선택하지 않아 망한 역사의 인물들을 나도 잘 알고 있지. 그런데 말일세. 어차피 이대로 넘겨줘도 망할 거라면 한 번쯤 지켜보는 것까지는 괜찮지 않겠나?”
다시 시선을 돌린 천호득이 무언가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으로만 웃었다.
“나야 돈만 벌었지 자식 농사는 틀려먹은 인간 아닌가. 자네가 없었다면 벌써 세상에 없었을 테고.”
깊은 회한을 그려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지금껏 저런 모습을 감췄는지를 알 때까지라고 하세. 그때까지만 지켜봐 주게.”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종료 버튼을 누른 천호득은 휴대전화기를 책상에 올려놓고는 깊어진 눈으로 정문을 바라보았다.
천봉서와 강승애, 천상기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문을 나서고 있었다.
**
가난한 집구석에서 태어나 몸이 아픈 모친을 챙기며 살았다고 천중명이 멍청하거나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거기에 엉뚱한 몸뚱이를 뒤집어쓴 처지가 되었다고 해서 대학을 나온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작부대 하사로 제대한 경력이 없어지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평창동을 나선 시간은 밤 8시 30분쯤 되었다.
퇴근의 혼잡함을 갓 벗은 도로를 천중명은 넉넉하게 달렸다.
천봉서는 절대 얌전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막말로 이전의 천중명조차 사람 죽이는 걸 일로도 여기지 않았는데 그 위에 더 독한 두 인간의 심성이 착하리라 여기는 건 금치산자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천중명은 봉천동을 향해 차를 몰았다.
혹시 몰라 짬짬이 룸미러로 뒤도 살폈다.
염병할, 그 비싼 커피포트가 감전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감전과 관련된 일을 떠올리던 천중명은 불쑥 솟구치는 화를 가라앉혔다.
내일까지 다른 연락이 없다면 평택의 공장과 이천 냉동창고에 들러야 했다. 거기에 지금 맡고 있는 포장지 회사에도 나가봐야 한다.
지경그룹이 소비하는 포장과 관련된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여서 솔직히 정화조를 치우는 환경회사만큼이나 일감이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생각을 대강 마친 천중명은 봉천 중앙 시장을 지나 연립주택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고급 차가 드나들 일 별로 없는 곳이고, 연립주택과 고만고만한 단독 주택의 골목이 워낙 좁아서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을 한껏 받았다.
이게 또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는 효과적이어서 불평할 일만은 아니었다.
막다른 골목 안에 차를 세운 천중명은 가장 안쪽의 녹이 가득 달라붙은 문을 향해 움직였다.
녹색인지 파란색이었는지를 모를 정도로 낡은 대문은 발로 밀기만 해도 떨어져 나갈 정도로 낡아 있었다.
마당 너머의 창에서 형광등과 TV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대문은 잠겨있었다.
여기는 벨이 없다.
쾅쾅쾅. 쾅쾅쾅.
천중명은 발끝으로 대문의 오른쪽 구석을 걷어찼다.
쾅쾅쾅. 쾅쾅쾅.
“누구야!”
거친 대꾸가 들린 순간에 천중명은 픽 웃었다.
“누구냐고!”
드르륵.
거실의 유리문을 연 인상 지랄 같이 생긴 남자가 대문을 향해 거친 시선을 던졌다.
“뭐야?”
“문부터 좀 열어.”
“당신 뭐야?”
“곽대출. 문부터 열라고.”
천중명이 이름을 부른 순간이었다.
눈빛을 빛냈던 곽대출이 거실 앞의 댓돌에 놓인 신발을 직직 끌며 걸어왔다.
안다. 저 걸음과 삐딱하게 어깨를 세운 동작의 의미를.
신발을 끌고 있다고, 어깨를 늘어트렸다고 방심했다간 저놈의 주먹에 이쪽은 몸뚱이를 축 늘어트린 채 쓰러져야 한다.
딸캉.
문의 안쪽에 달린 고리가 열렸고, 대충 잠겼던 문이 틈을 빼꼼히 만들었다.
기껏 문을 열어달라던 천중명이 빤히 곽대출을 바라보고 서 있자 팽팽한 긴장이 낡은 대문 사이를 넘실거린 직후였다.
“받을 것이 있어서 왔다.”
“씨발, 영화를 너무 보셨네? 그래. 처음 보는 분이 내게 뭐 받을 게 있어서 이 밤에 문을 차고 지랄을 떠셨을까?”
“내가 이 은혜는 무조건 갚는다. 만약 내 도움이 필요하면 그게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고 해도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대출의 눈이 꿈틀했다.
“무조건 따른다.”
천중명이 마지막 말을 뱉어낸 다음이었다.
“일단 들어오지.”
열린 문 옆으로 몸을 비스듬하게 비켜선 곽대출이 고갯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끼이익.
천중명이 상체를 숙인 자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휙!
곽대출의 웅크린 왼손이 눈을 파고들었고,
휘익! 휙!
오른손 팔꿈치가 목덜미를, 무릎이 턱을 향해 연달아 달려들었다.
이럴 줄 알았지!
터덕! 턱! 퍼억!
천중명은 오른손으로 놈의 왼손과 무릎을 밀쳐내며 좁디좁은 마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에이, 개새끼!”
대신 등을 놈의 오른손 팔꿈치에 얻어맞아서 허리를 비틀어야 했다.
“창욱이 어디 있어?”
곽대출은 독이 잔뜩 오른 표범 같은 눈으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을 토해냈다.
설명할 틈도 없었다.
“창욱이 어디 있냐고!”
발악 같은 고함과 함께 독수리의 발톱처럼 웅크린 곽대출의 양손이 목과 눈을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