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008. 무조건 따른다 (1)
달칵.
커피포트의 스위치가 올라왔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싱크대를 짚고 선 천중명의 눈에 세상이 돌아왔는데 머릿속에는 아직 조금 전에 보았던 장면과 음성이 그대로 있었다.
악몽이 아니라면 저주처럼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대표님?”
뒤에서 김순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천중명은 정신을 차렸다.
우선 김순례를 먼저 보낼 필요가 있었다.
천중명은 딱딱한 표정으로 싱크대를 열었다.
“비밀번호 바꿨거든요. 알려줄 테니까 기억하세요.”
싱가포르에서 수입한 봉지 커피를 꺼낸 천중명은 두 봉을 잘라 컵에 부으며 바꾼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청소 끝났으면 가 보세요.”
“다 드시면 정리한 뒤에 가겠습니다.”
돈이 뭔지.
궁중음식을 전공하던 김순례가 양손을 앞에 모으고 얌전히 서서 기다린다.
그것도 천중명이 사용한 컵을 씻어두기 위해서 말이다.
일반 가정집에 나가는 것보다 월등히 많이 받는다.
그렇다고 해도 김순례가 행복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포트에 담긴 물을 잔에 부으며 천중명은 목소리를 좀 더 가라앉혔다.
“가 보시라니까요.”
“네, 대표님. 편히 쉬십시오.”
공손하게 인사한 김순례가 현관 입구에 놓아둔 낡은 백을 들고 도어록을 눌렀다.
웃기지?
누구든 직원은 가방을 현관에 놓고 들어서야 하고, 청소할 때면 일본 만화에서나 나오는 하녀복을 입어야 하며,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한 뒤에야 퇴근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운전기사는 빌라의 건물에 들어서면 안 되고, 개인비서는 허락이 있기 전에는 절대 앉아서도 안 된다.
이게 전부 A4 용지의 매뉴얼로 만들어져서 사전에 교육한다는 것이 가장 웃겼다.
이들에게 세상은 사람 위에 돈이 있고, 그 위에 돈을 움켜쥔 재벌이 있는 곳이었다.
현관문이 닫힌 것을 본 천중명은 홈바에 앉아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몸이 바뀐 것도 아직 적응 못 했는데 저녁에 있을 가족모임을 보았다.
“아, 씨발 진짜! 어쩌라고!”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빌라의 홈바에서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과 탄천, 그 너머에 선 종합운동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천중명은 대뜸 욕을 뱉어냈다.
“하나씩 좀 합시다! 안 그래도 미칠 것 같거든요!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데! 왜! 뭐! 어쩌라고!”
지금껏 참아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훅 터져 나왔다.
“후우-.”
너무 달아서 아직 단내가 가시지 않는 싱가포르의 봉지 커피처럼 당황스러운 무언가가 천중명에게 매달려 있었다.
“받아들이긴 합니다. 난 그런 놈이거든요. 그런데 좀 천천히 합시다. 적당히 하고요. 뭐? 제사라도 지내드려? 아니면 저 안에 있는 돈으로 헌금이라도 하라고요? 원하는 걸 알려달라고요!”
시원하게 속을 뱉어내는 모습이 미친 사람처럼 느껴져서 천중명은 또 실없이 웃고 말았다.
그 와중에 커피의 향기가 또 천중명을 꼬드겼다.
힘겨울 때는 단맛이 위로가 된다.
천천히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천중명은 조금 전에 닫힌 현관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천중명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김순례는 과연 슬프게 울어줄까?
직장이 없어질까 걱정돼서 울 수는 있겠다.
“천중명, 왜 그렇게 바보같이, 악독하게만 살았냐? 너나 나나 이게 뭔 꼴이냐고.”
혼잣말을 중얼거린 천중명은 다시 거실의 창으로 시선을 돌린 뒤에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날씨 한 번 더럽게 화창했다.
“왜 이러는 건데요? 내가 어떻게 컸는지 아시잖습니까? 혹시 세상에 없던 꼴통재벌? 뭐, 그런 게 되라는 뜻입니까?”
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말이다.
천중명이 질문을 던진 그 순간에 밝은 햇살 아래에서 여우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맥이 탁 풀려서 천중명은 픽 웃고 말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임무 참 대단하네요.”
빗방울이 매달리는 거실 유리를 바라보며 천중명은 남은 커피를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아까 감전되었을 때 보았던 대로라면 오늘 저녁 식사자리에서 이천의 냉동창고와 평택의 공장을 받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거냐?’
이전의 천중명이 평택공장에 도착하자마자 독기 가득하게 지랄을 떨어댔던 것이 떠올랐다.
그룹 회장인 아버지와 형들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썼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천상기의 그 독한 눈빛은 무엇을 의미할까?
복잡한 지경그룹의 가족사에 천중명이 모르는 것이 분명하게 있었다.
“일단 내가 본 미래가 맞는 건지 확인하고 고민하자.”
천중명은 샤워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포트를 바라보았다.
만약 아까 본 미래가 맞는다면 포트에 감전될 때마다 미래를 보는 건가 싶어서였다.
“미치겠네!”
전기뱀장어가 된 것도 아니고.
고개를 흔들며 천중명은 샤워실을 향해 걸었다.
복장만큼은 우선 모임에 어울리게 차려입을 생각이었다.
**
평창동의 본가는 평수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정문에 승용차를 세우자 정장 차림의 직원 두 명이 다가와서 주차를 맡겼다.
정문에서 대략 1분쯤 걷자 현관이 나왔다.
2층으로 지어진 본관, 어디에 사용하는지 모를 부속 건물 두 개까지는 그렇다고 친다.
감색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도우미들은 또 뭔지, 여기가 한국인지 아니면 중세 유럽의 고성인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평창동의 위쪽 라인의 주택이었다.
100억 이하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는 주택 말이다.
아래쪽은 그나마 돈이 있으면 살 수 있다만, 미술관을 넘어선 이곳은 이웃의 동의를 얻어야만 매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누군가 주택을 팔게 되면, 주변에서 돈을 걷어 대신 사놓은 뒤에 입주자를 확인하고서야 판다는 진짜 평창동이었다.
본관의 현관으로 들어서자 20미터쯤 안쪽에 소파가 있었다.
소파의 근처까지 걸어간 천중명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앉아.”
상석에 앉은 지경그룹의 총수 천호득의 지시대로 천중명은 왼편의 기다란 소파에 앉았다.
앉기 전에 맞은편의 천봉서와 그의 아내 강승애에게 고개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왼쪽 소파에 천상기가 이미 앉아 있어서 천중명은 당연하다는 태도로 천호득에게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보기 좋구나.”
기사나 TV를 통해서 본 적은 있지만 천호득을 실제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그가 천중명의 복장을 칭찬했다.
원체 고집스러운 표정인 것 같은데 감전되었을 때 느꼈던 것처럼 천호득의 시선에는 묘한 온기가 묻어있었다.
“감사합니다.”
천중명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도박하는 심정으로 드레스룸에서 가장 깔끔하고 단정한 캐주얼 느낌의 바지와 셔츠, 그리고 재킷을 골랐는데 다행히도 모인 이들과 잘 어울렸다.
“요새는 뭘 하고 지내?”
천호득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순간에 번득하고 천봉서와 강승애의 날카로운 시선이 천중명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계자 싸움 이상의 적의가 담긴 눈빛이었다.
어지간히 담 큰 사람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독기까지 묻어있었다.
감전 때 보았던 시선 그대로였다.
“물으시지 않냐?”
답이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천봉서가 꾸짖듯 말을 건넸다.
“최근에 워낙 죄송한 모습으로 지내서 차마 말씀드리기가 그랬습니다.”
천호득이 설명을 바라는 시선을 던졌고, 천봉서와 그의 부인인 강승애가 ‘뭔 수작질이야?’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확히 뭘 했는데?”
천호득의 질문이 또 나왔고,
“여자들하고 지냈습니다.”
“허! 허허! 허허허! 건방진 놈. 형들과 형수 앞에서 그런 말을 잘도 꺼내는구나.”
웃음 끝에서 천호득은 거북하지 않은 음성으로 타박을 뱉어냈다.
작정하고 왔다.
이왕 받아들이기로 한 거, 미래를 보았던 것까지 아예 현실로 나오리라 짐작하고 처신하기로 하고 왔었다.
“아셨으면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뭘?”
천봉서와 천상기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하는 것을 천중명은 분명하게 보았다.
“저는 경영에 재능이 없습니다.”
천중명의 답이 떨어진 직후였다.
소파 주변에 맴돌던 웃음의 여운을 칼날처럼 날카로운 정적이 단숨에 자르고 지나갔다.
“그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하는 소리냐?”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디 들어나 보자.”
천호득의 허락을 얻은 뒤에야 천중명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들이 저를 위해 마음 쓰는 것이 송구하고 죄송합니다. 일구신 기업을 제가 망칠 것도 염려됩니다.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살짝 떨군 천중명의 앞에서 천봉서는 연신 천상기와 시선을 나누고 있었다.
“알아듣게 설명해.”
딱딱해진 천호득의 음성이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공부를 다시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수가 되고 싶습니다.”
“흐음.”
모두가 들을 정도로 천호득의 한숨은 길었다.
“너는 막내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중명이가 경영을 하는 것이 겁이 난 모양입니다. 저와 상기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천호득이 이번엔 천상기를 바라보았고,
“저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나름 원하는 답을 얻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준비되었습니다, 회장님.”
천호득의 질문에 답을 한 사람은 뒤에 서 있던 나이 든 메이드였다.
“일어서자.”
그의 지시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과 같아서 우르르 일어나 다 함께 천호득의 뒤를 따랐다.
거실의 소파에서 다시 20미터는 안쪽으로 걸은 느낌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계단의 옆으로 들어서자 아예 건물 하나를 더 연결해 놓은 듯한 공간이 나왔다.
식탁만 있었고, 주방은 또 다른 통로를 이용하는 모양인지 그 흔한 가스레인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TV에서 흔히 보이는 대통령의 만찬장 느낌이었다.
의자 앞에 똑같이 놓인 수저와 반찬이 그랬다.
자리는 소파와 같았다.
천호득이 상석, 그의 오른편으로 천봉서와 강승애, 다시 왼편으로 천상기와 천중명의 순으로 앉았다.
밥과 국을 메이드들이 순서대로 놓아주었다.
천호득이 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드는 순서에 맞춰, 서열대로 뚜껑을 열었고 숟가락을 들었다.
굴비, 먹기 좋게 잘라놓은 갈비, 신선한 샐러드, 맑은 된장국까지 음식은 최고였는데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허름한 중국집에 앉아서 짜장면과 군만두 하나 먹는 게 훨씬 살로 가지 싶었다.
어쩌면 놋그릇에 은수저를 쓰는데 소리 하나 나지 않는지, 천중명은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밥을 중간쯤 먹었을 때였다.
“내가 말했던 것은 생각해 봤냐?”
국을 떠서 입을 개운 천호득이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예.”
질문에 대비하며 식사했던 것이 확실했다.
입을 비우고 있지 않았다면, 저렇게 질문과 동시에 천봉서의 음성이 또렷하게 나오기는 어려웠을 거다.
“중명이에게 이천의 냉동창고와 평택의 공장을 맡겨 볼 생각입니다.”
천봉서가 꺼낸 굵직한 답을 듣는 순간, 천중명은 들키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똑같다. 감전되었을 때 보았던 모습과.
그래서 교수가 되겠다고 해보았는데 현실은 보았던 모습 그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회사들은 사정이 어렵지 않으냐?’
“그 회사들은 사정이 어렵지 않으냐?”
천중명이 떠올렸던 것과 똑같은 천호득의 질문이 들렸고,
“상기가 자금을 지원하고, 제가 일감을 몰아주겠습니다. 지금 맡은 회사와는 다르게 그룹 전면에 나서는 거라서 어려운 회사를 일으킨 것이 보기에도 좋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감전에서 보았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천봉서의 대꾸가 있었다.
이다음에 질문이 날아온다.
네 생각은 어떠냐는 단순한 질문이 말이다.
어떻게 답해야 하지?
충분히 예상했었는데 막상 현실이 되자 감당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형들에게 많이 배워.”
그런데 질문 뒤에 있어야 하는 천호득의 말이 대뜸 들렸다.
천중명이 간단하게 답을 할 차례였는데,
“잘할 겁니다. 영특하잖습니까.”
멈칫하는 순간에 천봉서의 대꾸가 먼저 나왔다.
번득.
그리고 천중명을 향해 천봉서는 기억하는 그대로의 독기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대답을 해야지.”
여기부터는 못 본 장면이었다.
“예.”
천중명이 답을 하자 천봉서가 입술 끝을 꿈틀하며 웃었고, 천호득은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음식의 맛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한 식사였다.
하여간, 그렇게 힘겨운 식사가 끝났다.
차를 마시겠지 했다.
그런데 거실로 나온 천호득은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이 주방 반대편의 문으로 사라졌다.
“위에서 차를 마실까?”
“준비할게요.”
천봉서가 시선을 주자 그의 처 강승애가 냉큼 답을 꺼내놓았다.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천중명에게 시선을 던진 천봉서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고, 어쩐 일인지 천상기는 남았다.
천중명은 잠자코 뒤를 따랐다.
2층 거실은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거실 창밖에 있는 정원은 한 폭의 그림 같았고, 안쪽에는 그랜드 피아노,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 구석으로 멋지게 배치된 조각들이 미술관이나 고급스러운 호텔의 로비를 연상시켰다.
“앉아.”
천봉서는 거실 창의 근처에 놓인 이탈리아풍의 탁자에 앉았다.
천중명이 맞은편에 앉은 직후였다.
“내가 본가 모임에는 반드시 노타이에 정장을 착용하라고 정해주었는데도 감히 그런 복장으로 나타나다니 이제는 아예 대들겠다는 뜻이냐.”
천중명의 눈과 귀에 얼음을 이겨 넣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봉서의 시선과 음성은 차가웠고 서늘했다.
염병, 복장에 관해 이런 지시가 있는 줄은 몰랐다.
천중명이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인 순간이었다.
“얌전히 지내. 그래야 병원에 있는 네 에미가 계속 살아 있지.”
이어진 천봉서의 말이 천중명의 가슴을 서늘하게 찌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