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007. 살기로 했다 (2)
그릇을 급하게 받아든 아주머니를 두고 천중명은 거실로 움직였다. 그런 다음에 테이블에 올려둔 돈 가방을 들고서 서재로 들어갔다.
일본 화폐 다섯 뭉치, 달러가 또 다섯 뭉치다.
이걸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만, 당장은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후.”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거무튀튀한 고급 책상도, 천만 원이나 한다는 의자도 당최 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웃음도 나왔다.
죽었다가 눈을 떠보니 몸이 바뀌었고, 시간이 1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상황을, 그리고 돌아갈 방법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이전의 천중명이 교통사고로 죽어서 이렇게 앉아 있는 거였다.
어쩌라고?
뭘 어떻게 하라고 이러는 건데?
고개를 가로저은 천중명의 눈에 책상에 올려놓았던 휴대전화기가 들어왔다.
이놈은 어떤 추억을 가졌을까?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어 사진들을 펼쳐보았다.
‘미친 새끼.’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여자들이 눕거나, 엎드렸거나, 혹은 옆으로 누워 있었다.
이걸 뭘 전화기에까지 담아서 봤냐?
벗은 여자의 사진들 뒤로 가족사진들도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천중명을 닮은 여자의 사진도 보였다.
제법 아름다운 30대 중반 여자의 슬픈 얼굴이었다.
누굴까? 왜 이렇게 눈이 슬프지?
어라?
사진을 보던 천중명은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액정에 고개를 디밀었다.
1년 전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가장 최근에 찍은 사진의 날짜가 일주일 전이었다.
다음은 문자와 전화통화 기록도 살펴보았다.
그 또한 오늘 날짜 이후 것은 없었다.
천중명은 멍하니 책상 끝에 세워진 달력을 보았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의 1년은 어떻게 되는 걸까?
기억하는 대로 진행될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는 건가.
이럴 줄 알았다면 로또 번호라도….
“아니지.”
천중명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혼잣말을 뱉어냈다.
마음만 먹으면 로또 당첨금보다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상황이란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털썩.
머릿속이 어수선해서 천중명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나씩 짚어보자.
원래는 내일 11시에 이 집에 오는 거였다.
자주 마주칠 일이 없어서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은 없지만, 밖에 있는 아주머니의 이름은 기억한다.
맞아! 김순례였어.
딸이 오늘 취직됐다고 했는데 언젠가 말했던 직장이…?
남부증권에 다닌다고 했었다.
한 달쯤 뒤엔가 문제가 있다며 근심 가득한 얼굴을 했던 것도 떠올랐다.
그때 이전의 천중명이 김순례의 표정이 불편하다며 지랄, 지랄했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한다.
궁중음식을 전공한 덕분에 음식 맛이 죽여줬었다.
천중명은 실없이 웃었다.
궁중음식 전문가가 끓여준 라면을 먹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김순례는 크게 하던 식당이 무너지면서 남편이 몸져누웠고, 그래서 얻은 직장이 지경그룹 메이드였다.
본가의 식사를 담당하기로 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근무처가 바뀌어서 천중명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김순례에 대해 생각했었던 천중명은 그 뒤를 하나씩 짚어보았다.
의식을 잃었던 어머니는 내일 저녁에 겨우 사람을 알아보게 된다.
다음으로 첫날 면접이 끝나기 무섭게 이전의 천중명은 평택 공장을 가자고 했었다.
그곳에서 노조에 속한 직원들에게 공장을 폐쇄하겠다며 악을 써댔는데 첫날이라 당황했었던 기억도 모두 떠올랐다.
급할 것 없다.
누구라도 몸뚱이가 바뀌어 과거로 돌아오면 이 정도는 당황하고 어수선할 거다. 아니, 어쩌면 강단 있어서 그나마 이 정도로 견뎌내고 있는지 모른다.
삶을 포기할 게 아니니까 남은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고급 책상과 비싼 의자, 그리고 책상 한구석에 올라가 있는 돈 가방이 현재의 천중명이 어떤 상황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
천상기는 지경그룹의 총수 천호득의 둘째 아들이었다.
금융과 개발사업을 맡은 그는 건설과 전자제품 회사를 경영하는 큰형 천봉서의 집무실에 들어서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거기 앉아.”
“예.”
4살 터울의 형을 대한다기보다는 무척 어려운 상사를 모시는 태도로 천상기가 소파에 앉았다.
“차 할래?”
“마시고 왔습니다.”
소파의 상석에 앉은 천봉서는 쭉 찢어진 눈에 두꺼비처럼 넙데데한 볼을 지녀서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저녁 모임에서 화장품과 이천의 냉동창고를 중명이 녀석에게 맡기겠다고 할 생각인데 그전에 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불렀다.”
“저야 회장님이 결정하신 것이면 만족합니다. 혹시 총수님께는 말씀드리셨습니까?”
아직 볼이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아서 덜 큰 두꺼비처럼 보이는 천상기의 질문이었다.
“왕회장님이 제대로 된 회사를 맡기라 하셔서 결정한 일이다.”
“혹시 불편하시면 제가 반대하겠습니다.”
협탁을 향해 상체를 돌렸던 천봉서가 힐끔 시선을 주었다가 서류철을 챙겨서는 몸을 돌렸다.
“녀석이 안쓰러우신가 보다. 배다른 놈이라고 너와 내가 따돌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툭!
그러면서 천봉서는 탁자 위에 서류철을 던지듯 올려놓았다.
“화장품과 이천 냉동창고는 상장도 아니고, 겨우 본전이나 하는 회사다. 1년쯤 지켜보다가 청산하면 그만이야.”
“예.”
“거기 자료가 있으니까 당분간은 적당히 자금을 지원해 줘. 그랬다가 내가 지시하면 단숨에 숨통을 졸라.”
“알겠습니다.”
천상기의 충직한 답을 천봉서는 덤덤한 얼굴로 받았다.
“어차피 근본도 없는 놈 아니냐? 이 기회에 아예 싹을 잘라 버릴 참이니까 그렇게 알고. 대신, 왕회장님이 지켜보시는 동안은 그놈의 출신이나 배경이 오르내리지 못하도록 챙겨라.”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놈은 요즘 어떻게 지내더냐?”
천상기는 가볍게 눈가를 찌푸린 뒤에 입을 열었다.
“근본이 천박해서 그런지 계속 계집질만 하고 다닙니다.”
“어설픈 놈. 그래도 흉내는 다 내는구나.”
“오늘은 또 금고에 맡겨두었던 현금을 찾았습니다.”
“현금을?”
천봉서가 관심을 보이며 반문한 직후였다.
“개인비서로 면접을 본 놈이 열쇠를 훔쳐서 돈을 요구했다는 말에 뛰어가 아예 돈을 찾은 모양입니다.”
천봉서가 아직 궁금한 얼굴이어서 천상기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 봐야 1억 조금 넘는 돈입니다. 그리고 열쇠를 훔쳐간 놈은 도망가는 길에 트럭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참! 왕회장님도 어떻게 그리 모자란 놈을….”
이제야 궁금증이 모두 풀린 눈치로 천봉서가 탄식을 쏟아냈다.
“그렇더라도 허 의원이 중명이 놈을 선택할지 모르니 대비는 하고 있어.”
“총리의 사위가 된다면야 지금보다는 다정하게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쥐구멍에 총리 딸이 드나드는 꼴이구나.”
모처럼 농을 던진 천봉서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두꺼비 같은 볼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지켜보자. 팔자에 없는 총리 사위를 동생으로 두게 될는지 누가 알겠냐? 아무튼, 방심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천상기의 답을 들은 직후였다.
스위치를 내린 인덕션의 열기처럼 천봉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가 하는 일은?”
“말씀대로 이번 분양이 끝나는 대로 아파트에서는 잠시 손을 놓을까 합니다.”
“그래야지. 이제부터 금융이 지배하는 세상이 온다. 자동차의 가격과 부품 가격, 공임을 수입차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시대다. 무슨 뜻인지 알지?”
“예, 형님. 말씀해 주신대로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천상기의 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천봉서가 고개를 끄덕이는 꼴이 그랬다.
“할부로 차를 사서 속 썩느니 렌트를 하는 게 정답인 세상이다. 아파트 역시 분양이 아니라 월세를 내고 사는 것이 보편적인 세상.”
천상기는 고개까지 숙여 가며 천봉서의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건설을 손에 쥐고 너에게 금융을 맡게 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짓지도 않은 아파트를 분양하는 나라가 몇 개나 될 것 같으냐?”
“예, 형님.”
“언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법이 있어야 해. 그러니 당분간은 중명이 녀석을 다독여줘. 허세직, 그 양반이 4선 의원이다. 총리가 된다면 우리는 재계 3위도 넘본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이만하고 저녁에 보자.”
내내 공손하게 이야기를 듣던 천상기가 소파에서 일어나 상체를 꾸벅 숙였다.
**
황당하게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천중명은 기억에 있는 1년을 되짚었고, 그동안 평택의 화장품 공장과 이천의 냉동창고에서 있었던 일들을 메모까지 해가며 되새겼다.
다음으로 어머니를 챙길 방법을 고민했는데, 당최 어떤 형태로든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치겠네!’
내일이면 의식을 차릴 테고, 그러면 바로 성창욱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최소한의 보상금이 생기겠다만, 그런 것보다는 아들을 잃었다는 충격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그건 또 내일이라고 치자.
당장은 저녁에 있을 본가의 식사 모임이 문제였다.
가서 뭐라 할 것이며, 누군가 질문을 던지면 또 뭐라 답변해야 하는지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전의 천중명은 여자 문제만큼은 더럽게 주절거렸는데 집안과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었다.
기억 속의 1년을 복기하는 천중명의 주변에서 시간은 시원시원하게 움직였다.
메모한 것들을 천천히 읽어본 천중명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면 때문인지 목이 말랐고, 일어선 김에 커피도 한잔 마시고 싶었다.
천중명은 휴대전화기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청소가 끝난 모양인지 김순례는 사복 차림으로 거실에 있었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눈이 마주친 직후에 김순례가 꺼낸 질문이었다.
문득, 천중명은 이참에 기억 속의 일들을 확인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잔 마시려고요. 참. 따님은 어디 취직된 거지요?”
그래서 천중명은 주방으로 걸어가며 별것 아니란 투로 질문을 던졌다.
“남부증권입니다. 대표님, 커피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놔두세요.”
천중명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그러나 속은 그게 아니었다.
남부증권이란다.
그럼 한 달 뒤에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길 거고, 그 바람에 수습 기간을 채우지도 못하고 직장을 잃을 처지에 놓인다.
생수병을 들고 몸을 돌리며 천중명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기억 속의 일들이 현실과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아까 메모한 순서대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생수를 포트에 부은 천중명은 습관처럼 포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달칵.
그 순간이었다.
찌르르!
‘끄으!’
기억조차 끔찍한 전기가 천중명의 몸을 타고 돌았다.
그 직후였다.
이건 또 뭐야?
세상이 온통 시커멓게 변했다.
죽은 거야?
이렇게 간단하게?
천중명의 생각을 무시하는 것처럼 눈앞이 천천히 밝아졌다.
그리고는 조명을 받은 것처럼 처음 보는 식탁과 그 주변이 어슴푸레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뒤섞은 것처럼 앉은 이들의 형태가 일그러져 있었다.
“중명이에게 이천의 냉동창고와 평택의 공장을 맡겨 볼 생각입니다.”
굵직한 음성이었다.
“그 회사들은 사정이 어렵지 않으냐?”
노인의 음성이 들렸고,
“상기가 자금을 지원하고, 제가 일감을 몰아주겠습니다. 지금 맡은 회사와는 다르게 그룹 전면에 나서는 거라서 어려운 회사를 일으킨 것이 보기에도 좋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형태와 음성이 선명해지면서 알았다.
지금 말하는 사람은 큰 형인 천봉서였다.
“네 생각은 어떠냐?”
노인이 꼬장꼬장한 음성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내게 물은 거야?
천중명은 그곳에 있었다.
다들 골프복처럼 편안한 차림이었는데 천중명만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부터 가족들 모임은 좀 더 편안하게 차려입도록 해. 그렇게 격식을 갖추니까 형들과 너의 관계에 대해서 말들이 많지.”
근엄한 노인의 음성이었는데 천중명은 이상하게 따듯하게 느껴졌다.
“형들에게 많이 배워.”
“예.”
천중명이 답을 한 직후였다.
“잘할 겁니다. 영특하잖습니까.”
힐끔 시선을 준 천봉서의 눈길이 몹시도 매서웠다.
거기까지였다.
날카로운 눈빛이 어둠에 휩싸였고, 곧바로 싱크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커피포트 속에서는 물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고, 천중명은 싱크대를 짚고 있었으며, 김순례는 현관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