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006. 살기로 했다 (1)
운전석에서 트럭 기사가 뛰어내렸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표님. 일단 몸을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멍하니 있는 성창욱에게 깡패 새끼 하나가 다가왔다.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사람을 어찌할 생각으로 몰려온 건지, 평택 공장에서 달려들던 놈들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감정이 더 올라왔는지도 모른다.
“대표님!”
소란스러운 상황에 나왔던 모양이었다.
김도정 부장이 성창욱의 양팔을 감싸듯 잡고는 저축은행 안으로 안내했다.
“뒷일은 저희가 처리겠습니다.”
뒤로 물러나는 성창욱을 향해 깡패 새끼가 마치 법관처럼 말을 건네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지은은 독일산 승용차 운전석에 있었다.
“이리로.”
김도정을 따라 아까 그 지점장실로 들어간 다음이었다.
소파에 앉기 무섭게 여직원이 봉지 커피를 담은 종이컵을 가지고 들어왔다.
여직원이 나간 것을 확인한 김도정이 충직한 신하라도 되는 양 입을 열었다.
“혹시 금고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까?”
“저 친구가 들고 나갔는데요.”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냉정한 현실이 지점장실 주변에서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러시다면 제가 금고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 그 금고에는 5백만 원 정도 넣어두는 것으로 하시지요. 이름이….”
“성창욱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성창욱. 그 친구가 우리 은행에 금고를 이용하려고 찾아와 돈을 맡긴 것으로 하겠습니다.”
“나랑 이곳에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나간 것이 CCTV에 다 찍혔을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소와 주민번호도 모르잖아요?”
“알아서 하겠습니다.”
성창욱은…, 도대체 누가 죽은 건지 헛갈리기 시작했는데 아무튼, 성창욱은 잠자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셨다.
“경찰 조사야 어차피 우리 관할에서 합니다. 적당하게 금고를 이용하러 방문했다는 선에서 진술해서 우리 대표님께 절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행정상, 기록상,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 있던 성창욱이 죽었다.
아니지. 사람 목숨 그렇게 쉽게 끊어지는 건 아니니까 우선 확실히 확인하는 게 먼저 아닐까?
“밖에 그 친구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잖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김도정이 몸을 일으키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세상 참!
돈이란 게 참 무섭다.
지금 커피를 마시는 성창욱이 저렇게 죽었어도 이 꼴로 끝났을 거 아닌가 말이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성창욱은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못 먹어서 그런지 이런 순간에도 속없이 양이 좀 많았으면 싶었다.
하여간 봉지커피 한 봉은 누가 뭐래도 부족한 양이다.
성창욱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김도정이 가로로 긴 철제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유감스럽게도 현장에서 즉사했답니다.”
염병할! 젠장!
그러게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서!
“대표님은 성창욱과 상관없이 개인 금고를 찾기 위해 방문하신 겁니다. 열쇠를 분실하신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여기 비밀번호를 누르시면 됩니다.”
사람이 죽은 것이 김도정에게는 들고 온 금고의 비밀번호만큼도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성창욱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김도정은 키패드가 있는 방향을 돌려준 놓은 뒤에 맞은편에 앉았다.
“사고 때문인지 멍한 게 비밀번호가 생각나질 않네요.”
“저런!”
세상에 가장 마음 여린 사람을 보았다는 얼굴로 김도정이 과장된 탄성을 쏟아냈다.
“그러시면 제가 열어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부탁합니다.”
답을 하면서도 솔직히 좀 황당했다.
이럴 거면 개인금고를 왜 가지고 있는 건지, 원.
“여기에 검지를 대주십시오.”
그러나 저축은행은 그렇게 허술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김도정이 말한 키패드 옆의 작은 칸에 성창욱은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럼 해제번호를 누르겠습니다.”
상자를 돌린 김도정이 꽤 많은 숫자를 눌렀고, 이어서 저축은행이 보관한 듯한 열쇠를 넣고 돌렸다.
철컥.
마침내 상자가 열렸다.
김도정은 내용물을 확인하란 듯이 기다란 윗면을 세워서 완전히 연 뒤에 상자를 밀어주었다.
뭐가 있기에 이걸 가져가려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을까?
그것도 오지은의 그곳에 있는 점에 대해 떠들었다가….
성창욱은 상체를 숙여서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라, 이 등신아!’
욕이 절로 나왔다.
안에 있는 것은 만 엔짜리 일본 지폐 다발과 백 달러짜리 미국 지폐 다발이 전부였다.
이따위 돈? 달라고만 했으면 바로 찾아줬을 돈 때문에?
고작 이것 때문에 그 지랄로 죽어?
“가방을 준비해 드릴까요?”
“그러시죠.”
김도정은 또 충직한 신하처럼 몸을 일으켜서 방을 나섰다.
하여간 서류상으로는 성창욱이 사망했다.
성창욱은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뒤에도 견딜 수 있을까?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냉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
오상구는 휴대전화기를 귀에서 살짝 뗀 채로 통화를 시작했다.
“예, 서장님. 오상구입니다.”
오지은이 그의 소파 왼쪽에서 상체를 기울여 통화 내용을 듣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 사건은 확인했습니다. 단순 교통 사망사고더군요. 화물조합에 가입되어 있구요. 기사가 술을 먹었거나 과속, 과적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자는 확인해 보셨습니까? 왜 그렇게 급하게 건넜을까요? 우리 아이가 그걸 보고 좀 놀랐던 모양입니다.”
- 대학 졸업예정자인데, 저축은행에 들렀다가 나와서 무단으로 길을 건너려 했던 모양입니다. 현장의 CCTV 영상들을 확인해 보았는데 무단횡단을 왜 했는지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오상구가 비릿하게 웃었고, 그런 그를 오지은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운전기사가 뭔가 보지 않았겠습니까?”
- 회장님. 통상 사망사고를 일으킨 운전자들은 차 앞으로 뛰어들었던가 하는 식으로 피해자의 과실을 떠들곤 합니다.
“그렇군요.”
- 그런데 사망자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지요. 이 건은 그저 단순 교통사고입니다. 그게 저와 우리 경찰서 교통과 직원들의 한결같은 판단입니다.
확실히 마음이 놓였다는 것처럼 오지은은 상체를 가져가 몸을 똑바로 세웠다.
“우리 서장님께서 번거로운 일에 직접 신경 쓰셨습니다.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얼굴 뵌 지가 좀 되는데 공 한번 치셔야지요.”
그렇게 서너 마디를 더 주고받은 뒤에 오상구는 통화를 마쳤다.
“아빠, 멋져!”
“그러게 좀 조심하지!”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은 오상구가 안쓰럽고 한편으로는 애틋한 눈으로 오지은을 바라보았다.
“천 대표는?”
“은행에서 안으로 모셔갔어요.”
“그쪽에서도 경찰에 손을 썼나 보더라. 너 안 가 봐도 되겠냐? 이럴 땐 여자가 옆에 있으면서 식사도 챙겨주고 해야지?”
“그런 거야?”
“아이고, 녀석아. 이 녀석이 다 좋은데 사랑받고만 커서 남자 마음을 몰라요.”
타박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오상구는 헤벌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차 마셔.”
“응. 아빠.”
둘이서 차를 한 모금씩 마신 다음이었다.
“그런데 뒈진 놈이 어떻게 우리 딸의 몸을 봤을까?”
“소문 들었겠지, 뭐. 그런데 아빠. 그 인간이 좀 이상하긴 했었어.”
오상구는 힐끔 시선을 준 채로 답을 기다렸다.
“자기가 진짜 천 대표라고 하고, 몸이 바뀌었다고, 나더러 천 대표가 이상한 거 모르겠냐고 하더라고.”
“그래?”
“기분이 이상했어, 아빠. 그런데 거기에서 덜컥 몸에 있는 점 이야기가 나온 거야.”
“흠.”
뭔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오상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원래 남들 시선을 받는 타입이라 너를 모함하는 것들이 많았잖아? 대학교 때도 친구라는 그년이 소문내는 바람에 힘들었었고.”
“조심할게요, 아빠.”
“아효. 이 예쁜 것을 시샘할 게 어디 있다고.”
오상구가 솥뚜껑만 한 손을 뻗어 오지은의 어깨를 다독일 때였다.
띠루루루. 띠루루루. 띠루루루.
왼편의 협탁 위에서 구내전화가 울었다.
“여보세요?”
잠시 뒤에 그는 수화기를 든 채 인상을 찌푸렸다.
“공사 하루 이틀 해? 하도급 직원의 안전사고를 왜 원청인 당신이 끼어들어서 일을 크게 만들어? 그러다가 하자 잡히면 상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어!”
오지은이 입을 샐쭉하며 바라보는 앞에서 오상구는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건 하도급 업체에서 처리하는 게 정답이지. 그리고 거! 양심적인 업체로 좀 선정해! 제 놈들 직원이 잘못해서 떨어진 걸 왜 원청인 우리가 물어줘야 하냐고!”
통화가 끝났다.
“우리 아빠 이렇게 힘드셔서 어떻게 해?”
오지은이 상체를 기울여 오상구를 안았고,
“아빠는 하나도 안 힘들어. 우리 딸이 이렇게 알아주는 데 힘들 게 뭐 있어?”
오상구가 만족한 얼굴로 어딘가에 점이 있는 딸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
천중명으로 살아야 한다.
빌라로 돌아오는 길에서 천중명이라는 이름을 주문처럼 계속 외운 이유였다.
이 몸뚱이로 계속 살아야 한다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야 어머니를 지킨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우선 점심을 해결하고, 어머니를 챙긴 뒤에 본가의 저녁 모임에 간다.
“준비했습니다.”
청소를 위해 온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라면도 하나 끓였다. 뭔 집구석에 그 흔한 라면 하나가 없어서는 그걸 사오게 만드는 건지 원.
거실 테이블에 돈이 든 가방을 올려놓은 천중명은 홈바에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산다는 건 참 잔인한 일인지 모른다.
사람이 죽은 걸 확인하고 돌아온 길에서 이렇게 라면을 먹는 게 그렇다.
이 와중에 국물에 말아 먹을 밥이 아쉬운 건 또 뭔지.
군대를 독하게 다녀온 덕분에 어지간한 일에는 흥분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릇을 양손에 든 천중명이 빨아들이듯 국물을 마실 때였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띠리리링.
현관 앞에서 처음 듣는 벨 소리가 울렸고, 그 직후에 욕실 앞을 치우던 아주머니가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현관 구석에 가방을 두었던 모양이었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낸 아주머니는 다급하게 버튼을 눌러 벨소리를 잘라버렸다.
“죄송합니다.”
그래놓고 전화기를 든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뭐가요?”
“무음으로 하라는 규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별!”
고개를 든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천중명을 살폈다.
“전화 좀 받는 거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누구예요?”
“예?”
“전화한 사람이 누구냐고요?”
“죄송합니다.”
“아, 참.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보시라고요.”
당황한 게 역력한 얼굴로 아주머니는 급하게 전화기의 액정을 확인했다.
“누군데요?”
“딸아이입니다.”
“얼른 전화해 보세요.”
“문자가 와 있습니다.”
접었다 폈다 하는 전화기 안쪽을 확인한 아주머니가 시선을 들었다가.
“이번에 면접 본 곳에 취직되었다는 연락입니다.”
“오! 잘됐네요.”
“죄송합니다.”
천중명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등신 같은 놈이 휴대전화기를 관리하는 요령까지 지랄을 떨어댔던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전화 오면 편안하게 받으시구요.”
“네?”
“다섯 시에 퇴근하는 거였죠?”
“예, 대표님.”
“중간에 좀 쉬기도 하고 그러세요.”
지금의 천중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주머니는 적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천중명이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후다닥.
그때야 정신을 차린 듯 아주머니가 바쁘게 다가왔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릇만 옮기는 건데요.”
“대표님. 전화벨은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아주머니를 보며 천중명은 또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재벌집 후계자, 이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