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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지금까지의 나와 좀 다르게 (2)
클랙슨 소리에 이어 뒤차가 연달아 상향등을 번쩍였다.
“하늘을 불사르던 용의 노여움도 잊혀지고, 왕자들의 석비도 사토 속에 묻혀 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생존이 천박한 농담이 된 시대에, 한 남자가 사막을 걷고 있었다.”
성창욱은 언젠가 읽고 기억에 남았던 소설의 한 구절을 나직하게 토해냈다.
“출발해. 나머지는 가면서 설명할게.”
그리고는 다부진 눈으로 오지은을 바라보았다.
뭔가 켕기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던 오지은이 거칠게 차를 내달렸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나와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아까 그 말은 자기가 생각한 거야?”
질문이 터무니없어서 성창욱은 먼저 픽 웃고 말았다.
“이영도 님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
“난 뇌가 섹시한 남자가 그렇게 매력 있더라.”
아까의 질문을 깡그리 잊어버린 줄 알았다.
“그렇다고 내가 멍청하게 넘어갔다고는 생각하지 마. 자기는 아직 내게 요구했던 것이 뭔지 답을 못했어.”
그러나 오지은은 성창욱을 향해 던졌던 질문을 잊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할 수 있어?”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다행히 오지은은 차를 세우지는 않았다.
“아까 했던 소설의 한 구절이 그 답이라니까. 지금까지와 다르게 살고 싶다는 거. 너도 이제 그렇게 대할 거고. 그러니까 내가 자꾸 변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받아들이는 게 좋아.”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선릉역 사거리를 지난 오지은이 유턴을 위해 가장 왼쪽의 차선에 차를 세웠다.
“후계자가 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싫어하는 책을 읽어서라도?”
성창욱은 고개만 끄덕였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를 운전하는 동안, 그리고 유턴해서 5백 미터쯤 되는 한알저축은행에 도착하는 사이에도 오지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인도를 가로질러 한알저축은행 앞에 차가 멈춘 다음이었다.
차에 있었으면 싶었던 오지은이 마치 부인이라도 된다는 태도로 운전석에서 내렸다.
지난 1년 동안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들렀던 곳이다.
저축은행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얼굴을 아는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 나왔다.
“지점장실에 있습니다.”
마치 떠든 사람을 일러바치는 충직한 학생의 모습으로 남자직원이 지점장실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성창욱이 들어서자 소파에 있던 천중명과 김도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은 무척이나 놀라고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무렴, 이곳에서 이 난동을 피우면서 연락할 거란 생각을 정말 못했을까?
뒤에 들어선 오지은을 바라본 천중명의 얼굴에 시기와 분노, 억울함이 뒤엉키고 있었다.
“시끄럽게 하기 싫으니까 일단 밖으로 가자.”
놈은 먼저 볼을 씰룩였다.
“너는 이곳의 비밀번호를 몰라.”
그러면서 무언가를 각오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너는 장소도 비밀번호도 모르는 이런 금고가 세 개나 더 있어. 나 아니면 못 찾는 거. 그러니까 이건 나 줘. 그럼 나머지 두 개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김 부장님. 잠시만 자리를 피해주시겠어요?”
“예? 아, 예.”
서둘러 김도정이 방을 나선 다음이었다.
“너도 좀 나가 있어.”
“그러지 마! 넌 속고 있는 거야, 오지은! 저놈은 내가…. 아니 천중명이 아니야. 함께 있었으니까 눈치챘을 거 아냐? 수상하지 않았어? 그랬지?”
천중명이 느닷없이 던진 말에 오지은은 당황한 얼굴로 성창욱을 보았다.
“너 같은 애가 그걸 몰라? 지난주에 그거하고 나서 어디 갔었는지 물어봐. 나는 알아. 저놈은 모르고.”
성창욱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오지은과 관계하느라 시간이 필요할 거라 여겼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여유가 있으리라고 계산했었던 눈치였다.
“옆에 있으니까 어디 갔었는지 지금 당장 물어봐. 여기 금고의 비밀번호도 나만 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오늘 너에게 속옷을 입지 말라고도 했어. 아니야? 내가 사 준 그 원피스를 입고 오라고 했고. 도착하면 바로 옷을 벗고….”
“그래서?”
천중명의 말을 자른 성창욱은 빌라에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오지은은 도착하기 무섭게 옷을 벗었고, 곧바로 다가왔으며, “얼르-은.”하고 재촉했었다.
“지은이 앞에서 입으로 어쩌고 하는 말을 꼭 뱉으라고?”
어떻게 알았지?
천중명의 눈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더 버티면 경찰서 가는 거고, 조용히 따라오면 나도 지은이 지켜주기 위해서 이대로 묻는다. 어떻게 할래?”
“지난주에 그거 끝내고 어디 갔었는지 대답해 봐!”
천중명은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인상을 버럭 찌푸리는 성창욱 앞에서 이 기회를 어떡해서든 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내가 정말 죽여 버릴 거라고 했었지?”
“그래? 지난주에 지은이 데리고 어디 갔었는지 대답하면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천중명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이보리색 카디건 속의 원피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결단, 타이밍, 그리고 성창욱을 궁지에 몰아넣는 질문까지 다 좋았다.
그런데 정말 불행하게도 시선이 좋지 않았다.
카디건의 앞자락을 여미지 않은 것도 한몫했을 거다.
“지금 어딜 보는 거야? 그리고 뭐 지은이? 이게 어디에다 대고!”
정말 엉뚱하게도 카디건의 앞자락을 여민 오지은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옷 사러 백화점 갔었다, 왜? 그건 또 어떻게 알아냈데? 그럼 지난주부터 우릴 뒤쫓아 다녔던 거야? 아후, 징그러.”
이야기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풀리고 있었다.
“잠깐 나가 있어.”
“그래, 자기야.”
천중명의 낯빛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애처로웠다.
“가지 마, 지은아!”
“아니 근데 저 인간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해?”
“너 거기에 사마귀 같은 까만 점 있잖아!”
몸을 돌리던 오지은이 그 말 한마디에 멈칫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천중명을 향해 몸을 틀었다.
“다시 말해 봐.”
“너 거기에 사마귀 같은 까만 점. 그리고….”
“너, 이 새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닷없고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대학교에서도 그 소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미친 새끼가 어디에서 그걸 주워들어서?”
독이 잔뜩 오른 오지은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속옷마저 입지 않은 가슴을 들썩였다.
“너, 이 새끼. 우리 자기가 용서해도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뒷조사했다니까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겠네? 너 각오해, 이 나쁜 새끼야!”
시원하게 욕을 뱉어낸 오지은은 찬바람을 흩뿌리며 문을 나섰다.
“적당히 좀 하자. 여기에서 이야기할래? 아니면 밖으로 나갈까?”
“마음대로 해.”
인생을 포기한 놈처럼 놈의 음성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허벅지에 걸친 팔과 의도적으로 움츠린 어깨를 성창욱은 분명하게 보았다.
해군첩보부대 UDU 훈련에서 저런 자세에 담긴 의도를 놓치면 밤새 꽁꽁 묶인 채로 해변에 던져지곤 했었다.
파도가 몰려올 때마다 고개를 들어야 했고, 파도가 물러가면 체온을 지키느라 발을 구르며 해 뜨기만을 기다리는 형벌이었다.
지금의 천중명은 그때 기회를 노리던 놈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자꾸 말하는데 난 재벌집 아들이 안 부럽다니까. 조용하게 있어. 그리고 네가 말하려던 방법을 이용해서 어떡해서든 몸을 되찾자.”
천중명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네가 나를 죽이면?”
“후-. 적당히 좀 해라.”
“죽이려고 했었잖아? 지은이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었을 테고.”
성창욱은 천중명을 똑바로 보았다.
의심하지 말라고, 눈을 읽으라고 일부러 그랬다.
“네가 눈을 하얗게 뜨고 날 노린 건 잊었어?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너는 이 금고 열쇠를 챙겼잖아.”
“이건 내 거야!”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 몸을 찾을 수 있는지를 먼저 설명하고, 네가 필요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나씩 가져가. 그러면 되지?”
최대한 양보했다.
이 어수선한 삶에서 최대한 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그렇다면 이 금고에 있는 걸 먼저 가져가게 해.”
“이 소란을 피워놓고? 밖에 여자애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기다리는데 네가 그걸 가져가면 일이 조용하게 끝날 것 같아?”
입술에 힘을 꾹 준 채로 천중명은 잠시 말이 없었다.
“좋아. 그럼 나가서 내가 이 맞은편 커피전문점에 있을 테니까 지은이 보내고 네가 이걸 찾아서 가져와. 그러면 나도 너 믿지.”
“비밀번호는?”
“내가 커피전문점에 있을 테니까 전화해. 그때 알려줄게. 통화 내용을 녹취할 거다. 그걸 이용하면 나름 살 방법이 있을 것 같으니까.”
이해는 한다만, 이 정도면 아주 병이다, 병.
픽 웃은 성창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렇게 하자.”
“지은이가 날 엮지 않게 말 잘하고.”
“그러게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
“자기가 먼저 보여준 거야! 허벅지 안쪽에 반점까지.”
아차하는 얼굴로 성창욱이 입을 다물었다.
이 판국에 뭔 점 이야기를 더 듣고 싶겠나.
“일어나.”
성창욱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하여간 의심 많은 놈은 다르다.
그 와중에도 천중명은 테이블 위의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지점장실을 나서자 김도정 부장이 달려왔고, 직원들은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분위기 참!
“함께 오신 분은 차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알았어요. 조금 뒤에 다시 올게요. 점심시간인데 괜찮겠어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김도정의 답을 들은 성창욱은 저축은행의 유리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천중명이 고개를 숙인 채 따랐다.
얼른 끝내고 밥 먹자.
그런 뒤에 천중명과 몸을 되찾을 방법을 찾는 거다.
성창욱이 희망을 품고 문을 나선 다음이었다.
차에서 기다리던 오지은이 운전석에서 빠져나왔다.
“자기야! 저 인간이 빌라에 몰래카메라 설치한 거 맞지? 그렇지?”
“일단 가 있어.”
“내가 아빠에게 전화했어. 지금 사람 올 거야.”
“뭐?”
성창욱과 천중명이 비슷한 표정으로 보는 앞에서 오지은은 기세등등한 얼굴이었다.
“저 인간이 몰래카메라로 아까 내가 옷 벗은 거 다 봤을 거 아냐? 거기에 내가 가장 수치스러워하는 이야기도 알고 있고! 나도 다시는 그 말이 돌지 않게 최소한의 다짐은 받아야지.”
하마터면 “대학에서도 이미 소문났던 거라면서?”하는 말을 뱉을 뻔했다.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기만 하는 건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지금은 그냥 가 있어. 입단속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지은의 표정이 조금은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일단락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뒤틀린 운명의 바퀴는 이대로 멈추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릉역 방향에서 ‘우리 조폭이요.’하는 몸짓의 덩치들이 우르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천중명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냥 있어.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할게.”
놈은 확답을 얻고 싶은 것처럼 오지은을 바라보았다.
“여기! 여기요!”
그런데 오지은이 팔을 높이 들어 흔든 뒤에 손가락으로 천중명을 가리켰다.
우르르.
덩치들이 다급하게 다가오고,
후다닥!
말릴 틈도 없이 천중명이 뛰었다.
“야! 멈춰!”
성창욱의 고함을 무시한 천중명은 선릉역과 삼성역 중간의 8차선 도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안 돼!”
붙잡을 틈도, 말릴 틈도 없었다.
끄드드등!
몸이 바뀐 첫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날 점심시간, 가로수의 이파리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는 도로에서 천중명이 높다랗게 날고 있었다.
“꺄아아악!”
오지은의 비명은 확실히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세상이 천천히 돌아가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목과 팔다리를 아래로 늘어트린 천중명은 잠든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레미콘 트럭에서 15미터는 족히 날아갔지 싶었다.
철퍼덕!
성창욱은 분명하게 봤다.
놈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히며 완벽하게 꺾이는 모습을 말이다.
저렇게 되고 나서도 살아날 수 있을까?
염병할.
이제 어떻게 몸을 되돌리지?
맹세컨대 태어나서 지금처럼 멍하니 무언가를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성창욱은 그렇게 도로에 널브러진 천중명을 보았다.
꼼짝없이 지경그룹 망나니 후계자의 몸뚱이로 살아야 한다는 암담함이 성창욱의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