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004. 지금까지의 나와 좀 다르게 (1)
성창욱은 오지은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밥 먹자.”
오지은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배고프니까 밥 먹으러 가자고.”
“지금?”
“그래.”
오지은의 표정이 복잡했다.
왜 이러는 건가 하는 눈빛에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이 옅게 깔려 있었다.
“뭐해, 옷 입어.”
“알았어.”
뱀의 허물처럼 놓인 원피스를 향해 돌아선 오지은이 그걸 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천중명과 얽히지 않았다면 젊은 혈기에 넘어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자극적인 모습이긴 했다.
아후! 참….
성창욱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담배와 라이터가 있는 홈바를 향해 움직였다.
때앵.
그리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 얼른 불을 붙였다.
“자기, 이상해.”
“뭐가?”
굴곡이 다 드러나는 원피스 차림의 오지은이 홈바의 의자로 다가와 담배를 들었다.
“아침까지 속옷 입지 말고 오라고 해놓고 이게 뭐야?”
“배고프니까 밥 먹자는 거잖아.”
때앵.
“후.”
오지은은 짧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훅 뱉어냈다.
“선영이 때문이야?”
성창욱은 시선을 던지는 것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집안 어른들이 자꾸 걔랑 엮으려고 한다며?”
그제야 성창욱은 선영이란 여자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4선 국회의원의 딸이자, 다음번 대선에 나서거나 아니면 총리 후보로 점쳐지는 허세직의 외동딸이었다.
“그래서 이러는 거야?”
성창욱은 답을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본가에 간다고 했었잖아?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선영이 만나는 건 나도 뭐라 안 할게. 우리 집이 달리니까. 대신 만나는 동안은 내게 최선을 다해줘.”
상한 자존심을 꾹꾹 눌러 담은 얼굴로 오지은이 바라는 것들을 던졌다.
오지은 정도만 해도 사는 데 걸릴 게 전혀 없다.
독일제 승용차에 중소업체에 다니는 회사원 한 달 급여쯤 하루 유흥비로 거리낌 없이 쓰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더 많은 부를 위해 이 지랄로 몸을 던지고, 제 또래 친구들에게 천중명을 소개하는 것에 자부심 느끼며 지냈다.
“기분 상했어?”
말 없는 성창욱이 걸렸는지 오지은의 음성이 바뀌어 있었다.
“배고프다.”
“알았어. 가. 내가 맛있는 거 살게. 뭐 먹을 거야?”
성창욱은 바로 답을 꺼내지 못했다.
이 상황에 함께 밥 먹는 것도 그렇지만, 뒤에 또 끈적일 게 분명한 오지은의 눈빛이 걸리기도 했다.
“밥도 같이 안 먹어?”
아니나 다를까.
질문을 던진 오지은이 묘한 눈길로 성창욱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냥 가.”
“너무한다! 나도 뭔가 먹어야….”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끈적이는 오지은의 표정과 말을 휴대전화기가 뚝 잘랐다.
성창욱은 얼른 홈바 위에 올려놓았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 대표님? 안녕하세요? 한알저축은행 김도정입니다.
“예. 그런데요?”
- 저기 실례지만, 혹시 성창욱이라는 직원이 있습니까?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했던 성창욱은 바로 픽 하고 웃었다.
애새끼가 어쩌면 예상한 범위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지, 단순함 하나는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혹시 제 심부름이라고 돈이나 뭐 그런 거 찾아가겠다고 하던가요?”
- 예. 대여 금고를 열겠다고 왔습니다. 열쇠를 가져왔고, 도어록 비밀번호도 알긴 하는데 처음 보는 직원이라서요. 걸음걸이나 행색도 그렇구요.
아! 멋진 새끼.
“열쇠를 준 적이 없는데 어디서 났을까요?”
- 그러시죠? 어쩐지 좀 수상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붙들어 두시겠어요?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성창욱은 픽 웃으며 홈바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열쇠를 준 적은 없다.
그러면 분명 담배를 꺼낼 때 아니면 세수할 때 챙겼다는 의미인데 하얗게 뒤집혔던 눈빛으로 봐서는 홈바 아래에서 꺼냈을 확률이 높았다.
돈을 찾아서 성창욱을 제거할 방법을 찾으려고 했을까?
“무슨 일이야?”
오지은의 질문을 무시한 채 성창욱은 홈바 아래를 살폈다.
문 안쪽 선반에는 열쇠가 두 개 더 있었는데 이것들의 용도는 알지 못했다.
“개새끼가….”
“누구? 아까 그 직원?”
“여기에서 열쇠를 훔쳐서 내 금고를 열겠다고 했나 본데?”
“어머? 무슨 그런 인간이 다 있어? 같이 갈까?”
홈바 위로 고개를 들었던 성창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알저축은행이야 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장 자동차 키를 찾는 일이 번거로웠고, 혹시나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오지은이 도움 될까 싶었다.
“얼른 가자. 그러게 자기는 사람을 쓸 때 조심할 필요가 있어.”
속옷도 안 입고 다니는 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홈바를 다시 돌아 나오며 성창욱은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왜?”
“너 위에 뭐 하나 걸칠 것 없나 해서.”
현관 앞에 선 오지은이 시선을 떨궈 제 몸을 살폈다.
몸에 붙는 소재인 데다 타이트한 원피스여서 가슴의 중심이 어디인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다리 사이의 굴곡과 모양이 거실로 들어온 볕에 의해 어슴푸레 보일 정도였다.
“좀 심하지?”
“많이 심하다.”
“자기가 이렇게 입고 오라고 하고선….”
에효! 말해 뭐하겠나.
성창욱의 표정을 읽은 오지은이 문 오른쪽의 방으로 당당하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아이보리색 카디건을 걸치고 나왔다.
“이거면 됐지?”
“그래.”
성창욱은 전화기를 들고 현관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구두를 신을 때였다.
“참! 자기야. 혹시 모르니까 현관 비밀번호부터 바꿔.”
오지은이 조언을 건넸는데 나름 받아들일 만했다.
성창욱은 안쪽에 적힌 글씨대로 비밀번호를….
“고개 좀 돌려.”
“나는 왜?”
잠시 시선이 마주친 다음이었다.
“너무해.”
오지은이 서운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앞으로 움직였다.
삑삑삑삑삑삑삑삑. 삐빅삐빅.
비밀번호를 바꾼 성창욱은 현관문을 닫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움직였다.
아직 열리지 않은 엘리베이터의 문에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오지은이 담겨 있었다.
“서운해 하지 마. 오늘 좀 황당한 일이 많아서 그래.”
오지은이 삐뚜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아까 그놈이 다른 걸 훔쳐갔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 지금 번호를 바꾼 걸 너도 몰라야 내가 너를 의심하지 않지.”
“번호를 안다고 쳐도 어떻게 날 의심해? 나, 자기 물건에 손댈 정도로 살지는 않아.”
“그걸 누가 모르냐? 그냥 깔끔한 게 좋아서 그런 거지. 앞으로 계속 이럴 거고.”
삐뚜름했던 오지은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눈에서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 여자가 또 왜 이러지?
“나랑 미래를 생각한다는 거야? 아니면 의심하는 범주에 나도 포함된다는 거야?”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성창욱은 당장 답을 하지 못했다.
“나도 귀가 있으니까 자기가 스폰하는 애들 알고 선영이 만나는 것도 알아. 그래도 이러는 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마.”
띠잉.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내려갑니다.]
기계음이 성창욱과 오지은을 재촉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간 성창욱은 ‘LOBBY’라는 버튼을 눌렀다.
[1층.]
기계음이 성창욱이 누른 버튼을 알려준 직후였다.
와락.
몸을 돌린 오지은이 성창욱을 훅 덮쳤다.
움찔.
하마터면 오른쪽 팔꿈치로 오지은의 턱을 제대로 갈길 뻔했다.
그래서 움찔한 건데 속 모르는 오지은은 그 반쯤 들어 올린 팔 사이를 파고들었다.
훅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달달한 입술이 느껴졌으며, 이어서 혀가 성창욱의 입술로 넘어왔다.
얇은 원피스만 걸친 오지은의 몸이 성창욱의 가슴에 불을 활활 지펴댔다.
“잠깐만.”
성창욱은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오지은의 겨드랑이를 붙들어 떼어낸 거였다.
가슴의 감촉이 악착같이 매달렸지만 성창욱은 오지은을 붙들었던 손을 내렸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할까?
네가 싫다? 아니면 이따가 하자?
뭐라고 하든 궁지에 몰릴 게 분명해 보였다.
띠잉.
[1층입니다.]
성창욱과 오지은의 꼴을 보기 싫다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고는 기계음을 토해냈다.
“우선 저축은행 건부터 해결하자. 밥 먹고.”
눈빛을 속이기는 어렵다.
“자기 정말 내가 아는 자기 맞아?”
눈을 똑바로 바라본 상태에서 오지은이 던진 질문이었다.
“내려.”
성창욱은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오지은의 차를 향해 걸었다.
1년을 천중명과 함께 지냈는데 차를 모를까.
“뭐해?”
조수석 앞에서 고갯짓을 하자 오지은이 운전석으로 움직였다.
철컥.
그녀가 손잡이를 잡아서 문을 열었고, 기다렸던 성창욱은 조수석을 열고 몸을 실었다.
부르릉.
“한알저축은행 알지?”
부으으응. 끼이이익.
대답 대신 엔진 소리와 타이어 소리가 거칠게 울려 나왔다.
빌라의 정문을 빠져나온 다음이었다.
짧은 원피스가 위로 말려 올라가 그 어딘가가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오기 같은 오지은의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왜 내 다리를 그런 눈으로 봐?”
“응?”
고개를 든 성창욱을 오지은이 힐끔 쳐다보았다.
“이상해, 자기.”
“내가 뭘?”
“나 버릴 생각인 거야?”
앞을 바라본 오지은은 독한 얼굴이었다.
“욕심은 나는데 건드리는 건 싫은 눈이잖아. 왜 그래? 내가 언제 결혼을 바랐어? 아니면….”
오지은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할 말이 뭐가 있겠나.
끼이이익!
염병할.
운전에 좀 집중하면 안 되겠냐?
감정이 올라와서인지 오지은은 앞차를 처박기 직전에야 겨우 차를 세웠다.
부으으응.
차가 다시 출발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리고 그때 전화기가 다시 울었다.
“여보세요?”
- 한알저축은행 김도정입니다. 혹시 출발하셨나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직원분이 흥분한 상태라서요.
“10분이면 도착합니다. 난동이라도 피우는 건가요?”
- 개인 금고에 왜 못 들어가게 하냐고 고함을 지르셔서요. 금고를 꺼내오겠다고 핑계 대고 있는데 아무래도 다른 고객들 뵙기가 곤란해서….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통화를 마친 성창욱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까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데 그럴 여유조차 없이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부으응! 끼이이익!
오지은은 여전히 거칠게 차를 몰고 있었다.
차라리 택시를 타고 가면 갔지, 이 꼴을 더 견디기는 어려웠다.
성창욱이 막 차를 세우라고 할 참이었다.
“자기, 오늘 나한테 속옷 입지 말고 오라고 하고, 하나 더 부탁한 게 있어. 그게 뭔지 말해 봐.”
핸들 앞을 노려본 채로 오지은이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무슨 뜻이야?”
“자기가 오늘 너무 이상하잖아. 말해 봐. 설마 잊었다고 할 건 아니지?”
이건 정말 들은 적 없다.
원래는 내일 면접이라서 정작 성창욱이 천중명을 처음 본 것은 내일 오전 11시였었다.
“말 못하겠어?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앞유리를 바라보던 오지은이 설마 하는 눈으로 성창욱을 보았다.
“너 오늘 왜 그래?”
“자기야말로 왜 그러는 건데? 기껏 불러놓고! 그리고 왜 자기가 한 말을 몰라? 그게 말이 돼?”
신호가 바뀌었는지 뒤차가 빵빵거렸다.
“출발해.”
“답부터 해.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그거 말하기 전에 난 못 움직여.”
빵빵! 빠앙!
작정한 사람처럼 오지은은 꼼짝도 않은 채 성창욱의 답을 강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