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003. 내가 원하는 건 (2)
정적이 또다시 찾아왔다.
그 조용함 속에서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는 천중명을 보는 것조차 싫었다.
“가서 씻고 와.”
비참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던 놈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프겠지. 더럽게.
절뚝이는 걸음으로 샤워실로 가는 천중명의 복장이 성창욱의 눈에 들어왔다.
모자란 놈이 그나마 면접을 위해 사놓은 하나뿐인 정장을 입었던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그때 드레스룸의 중간 세면대에서 물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숨죽여 토해내는 천중명의 울음소리가 성창욱을 향해 달려왔다.
사람을 비참하게 죽여서 태우려다가 이런 일이 생겼는데 저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성창욱이 고개를 흔들 때였다.
들려오던 흐느낌이 분을 이기지 못한 억울한 울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조용히 해! 열심히 살던 사람을 죽인 새끼가 뭐가 억울해서 지랄이야, 지랄이!”
울음이 뚝 그쳤는데 성창욱은 느닷없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성큼성큼 드레스룸을 향해 걸었다.
재벌집 후계자?
저놈은 그냥 사람의 탈을 쓴 살인마였다.
“끅!”
불쑥 나타난 성창욱을 보고 놀란 천중명이 희한한 소리를 내며 세면대 안쪽으로 밀려났다.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아니라도 죽을 정도로 두들겨버릴 정도로 화가 났었다.
그런데 말이다.
아직 닦지 못한 얼굴에서 눈물과 물이 뒤엉겨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확 가라앉고 말았다.
저 얼굴이 어제까지 성창욱 자신의 얼굴이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
“후-!”
감정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천중명.”
“예….”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나는 너처럼 사는 거, 손톱 끝만큼도 부럽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지금에라도 몸을 바꿀 텐데.”
“예.”
“대신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네놈의 허벅지와 무릎을 완전히 부숴 버릴 거다.”
천중명이 소리가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마른침을 삼켰다.
성창욱의 의지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놈의 눈에 담긴 공포와 놀라움, 그리고 그만큼 꺾여버린 눈빛이 그랬다.
“닦고 나와. 방법을 찾아보자.”
몸을 돌려 드레스룸을 나서던 성창욱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나 더.”
화들짝 놀라는 천중명을 향해 성창욱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헛된 생각하지 마. 만약 나를 노리는 꼴을 보게 되면 그 즉시 죽여 버릴 테니까. 그렇게 해도 난 이 몸뚱이로 살면 끝이야. 알았어?”
천중명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주둥이는 뒀다 뭐에 쓸래?”
“예?”
“앞으로는 꼭 주둥이로 답하라고.”
“예!”
한숨을 푹 내쉰 성창욱은 고개를 저으며 거실로 나왔다.
“담배 있냐!”
그리고는 드레스룸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거기요!”
웃긴다.
절뚝이는 걸음으로 급하게 나오는 천중명의 모습이.
놈이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홈바를 돌아가 주방 쪽에서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재떨이를 꺼내놓았다.
“내가 이걸 왜 한 번도 못 봤지? 담배 심부름 시킨 적도 없잖아?”
“이건 여자애들 왔을 때만….”
“에효. 이…!”
말해 뭐하겠나.
성창욱은 담배를 입에 물고는 라이터를 들었다.
때앵.
금색 라이터가 청명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후우.”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나자 그나마 뒤엉켰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그때, 홈바의 건너편에 있던 천중명이 묻지도 않았는데 답변 같은 말을 꺼내놓았다.
“뭘?”
“내가 해치려고 한다거나 그런 거 말입니다.”
성창욱의 눈빛이 매서웠는지 천중명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사고가 나면 나는 평생 이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몸이 바뀔 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지한 천중명의 말이었는데 다 듣고 난 성창욱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몸이 바뀔 때까지 걱정하지 말라는 건, 몸이 바뀌면 죽일 거니까 그때 걱정하란 거냐?”
“예?”
정말 그렇게 생각했었던지 성창욱은 고개를 뚝 떨궜다.
“에라, 이…. 솔직한 거냐, 모자란 거냐?”
어이가 없는 심정으로 성창욱은 다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답답한 심정을 담배 연기에 실어 길게 뱉어낼 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거실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천중명의 휴대전화기가 요란하게 울어댔다.
성창욱이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돌린 다음이었다.
“오늘 가족 모임이 있습니다. 저녁에요.”
뒤에서 천중명의 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안 받아도 되지?”
“작은 형 전화일 텐데 우선 받는 게….”
“안 갈 거잖아.”
천중명을 바라본 뒤에도 전화기는 계속 울어댔다.
“저걸 안 받으면 곤란해집니다.”
“왜?”
“몸을 돌릴 방법을 찾으려면 아무래도 돈도 필요할 거고, 부릴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형제간에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아랫사람의 지원이 끊깁니다.”
전화기의 진동이 뚝 끊겼다.
아쉽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천중명이 소파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돌렸을 때,
지이이잉. 지이이잉. 지이이잉.
전화기가 또다시 울어댔다.
그래! 일단 받아보자.
소파로 걸어간 성창욱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액정에 올라온 발신인은 ‘작은형님’이었다.
“여보세요?”
- 뭐하느라 전화를 늦게 받아?
“샤워하느라 그랬습니다. 운동 좀 했거든요.”
전에 개인비서를 하며 들었을 때보다는 좀 더 퉁명스러운 음성이었는데 둘째 형인 천상기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 오늘 약속 알지? 평창동 본가로 오라신다. 저녁 7시.
“예.”
답을 하기가 무섭게 전화기 뚝 끊겼다.
홈바로 걸어간 성창욱은 전화기를 올려놓고 담배를 비벼 껐다.
“집으로 모이라는 거지…?”
성창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요!”
짧아지려던 천중명의 말투가 단박에 예의를 갖췄다.
“오늘 본가에 가시면 이천 냉동창고하고, 평택의 화장품 공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불을 지를 계획을 1년 전부터 세웠었냐?”
대꾸할 말이 없는 것처럼 천중명이 고개를 떨궜다.
“에라, 이 모지라!”
대가리 숙인 놈의 꼴을 보기 싫어서 성창욱은 아예 거실 창을 향해 의자를 빙글 돌렸다.
답답한 심정을 털어내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려는 참이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천중명이 눈알을 하얗게 뜨고는 성창욱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것이 유리를 통해 눈에 들어왔다.
지친다, 진짜.
다른 사람을 죽이려다가 이 꼴이 되었는데도 등 뒤에서 또 저렇게 눈을 뒤집는 꼴을 보자 한숨과 동시에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하긴, 사람을 죽이라고 지시하고 그걸 독촉하던 인성이 한순간에 바뀔 거라고 기대하는 게 잘못이겠다.
저놈은 기회가 된다면, 돈만 되찾을 수 있다면 몸뚱이가 바뀐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등 뒤에 칼을 박을 놈이었다.
‘오냐. 그렇다면.’
성창욱은 독한 생각을 떠올렸다.
아직 거실 창은 하얗게 변한 눈으로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는 천중명을 보여주고 있었다.
스윽.
성창욱은 거실을 향해 돌린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흠칫.
얼른 표정을 바꾸는 천중명이 거실 유리창을 통해 보였다.
몸을 돌린 성창욱의 앞에서 천중명은 그사이 풀이 죽은 얼굴을 태연하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천중명.”
“예.”
대답마저 고분고분하게 나왔다.
“네가 뒤에서 날 노려보던 게 저걸로 다 보였어.”
설마 하는 눈으로 거실 유리를 보았던 천중명의 얼굴에 아차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성창욱은 천천히 걸어갔고, 천중명은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저 새끼, 저거! 야, 뭐해? 얼른 치워! 저 새끼 특수부대 출신이라니까!”
“전기에 지져지는 거라 몸이 비틀리는 겁니다. 불 위에 올려진 오징어처럼요.”
“끄아아…!”
“어후, 무서워! 어후, 개새끼가 진짜 무섭게 지랄이네.”
잔인했던 놈의 고함이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성창욱의 귓가를 떠돌았다.
“저, 저, 저 새끼! 보라고! 저런다니까! 저럴 것 같았다니까! 얼른 대가리를 부숴!”
그래, 그런 지시를 눈도 깜짝 않고 내렸던 놈이었지.
그런데도 곁에 두었다가 또 죽게 된다면 그건 저놈이 나쁜 게 아니라 성창욱이 미련한 거다.
“현금이 든 통장이나 하다못해 귀금속 정도는 감춰 놓았을 테고, 아니면 가족들만 아는 비밀 이야기로 형들을 설득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
“그게 무슨….”
뒷걸음질 치던 천중명의 허리가 주방에 걸렸다.
“언제고 날 죽일 수 있을 거란 뜻 아니겠냐? 후계자 싸움에 도움 될 정보가 있다고 큰형이나 작은형을 꼬드길 수도 있을 테고.”
놈의 손이 뒤를 뒤지는 것이 보였다.
날까지 쇠로 된 칼을 집으려는 모양이었다.
나무틀에 세트로 꽂혀 있는 주방 칼 중 하나를 말이다.
“얼른 뽑아. 마음에 드는 거로.”
천중명의 손이 딱 멈췄다.
“그거로 날 한 번이라도 벨 수 있으면 목숨은 살려주마.”
놈의 목젖이 커다랗게 움직였다.
“다섯을 센다. 그 안에 칼을 안 집으면 목을 부러트릴 거고, 공장에 불렀던 애들 시켜서 파묻을 거니까 알아서 해.”
“교수가…. 교수가 알고 있어! 여기 온 거 안다고!”
“까불지 마. 교수는 아직 너에게 여기 주소를 못 전해줬어. 그리고 이곳 CCTV 기록이야 없애 버리면 그만이지. 안 그래?”
천중명이 다시 마른침을 삼킨 직후였다.
“하나.”
“하지 마! 그러지 마!”
성창욱이 나직하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둘.”
“살려줘! 제발! 아니, 살려주세요! 제발요!”
“셋.”
털썩.
놈이 무릎을 꿇은 채 파리보다 강렬하게 손을 비벼댔다.
“넷.”
죽인다.
뒤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또 당하느니 영악하게 사는 게 낫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성창욱이 다섯을 뱉으려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 거 같아!”
손을 비비던 놈이 엉뚱한 말을 불쑥 쏟아냈다.
“6개월 뒤에 이천 냉동창고! 평택 공장에 새로운 기계가 들어와!”
“무슨 기계?”
놈의 말에 말려들었다.
하지만, 일단 들어보고 별거 아니면 다섯을 뱉어내면 그만이었다.
“이 개새끼가 끝까지 사람을 가지고 놀아?”
다섯도 필요 없이 성창욱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띵동댕동. 띵동댕동.
누군가 빌라의 벨을 눌렀다.
힐끔 현관을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천중명은 지옥 문턱에서 돌아온 얼굴이었다.
“지은이가 오기로 했어! 맞아! 벨을 눌러도 안 열어주면 바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온다고!”
사람이 기가 막히면 웃음이 나온다.
성창욱이 지금 꼭 그랬다.
“대교건설 오지은 알잖아! 오늘 집에서 그거 하기로 했거든! 봤지? 기억하지?”
놈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낸 직후였다.
삑삑삑삑삑삑.
실제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봐! 보라고!”
띠루룩.
그리고 문이 열렸다.
이를 한번 깨문 성창욱이 거실로 움직일 때였다.
“자기는! 왜 매번 답을 안 줘?”
오지은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어? 손님이 있었어?”
갈색 머리와 원피스, 핸드백을 든 오지은이 주방에 있는 천중명을 바라본 다음이었다.
“그럼 전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놈이 잽싸게 인사를 던지고는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현관으로 걸었다. 그리고는 손아귀에서 뛰쳐나간 물고기처럼 빠르게 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욕을 처먹고 살면 명줄이 길어진다더니 놈이 그런 모양이었다.
“누구…?”
나가는 놈의 모습을 돌아보던 오지은이 시선을 가져오며 던진 질문이었다.
“개인비서로 쓸까 했던 놈. 그건 그렇고.”
오늘은 이만 가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오지은이 말릴 틈도 없이 원피스에서 어깨를 빼냈다.
천중명이 사주었다는 바로 그 원피스였다.
처음 출근한 성창욱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원피스 입은 여자는 뭔가 더 섹시하다고 지랄을 떨었었고, 그래서 오지은에게 사주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그게 아니라.”
“급해?”
오지은은 말릴 틈도 없이 고무줄 바지 내리듯 원피스를 아래로 내렸다.
염병할!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봐! 자기가 말한 대로 속에 아무것도 안 입고 왔어. 그래서 아까 좀 놀랐어.”
뭔가 확실히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해?”
밉지 않은 얼굴이었다.
대신 눈부시게 예쁜 인물 또한 아니었다.
아버지를 위한다는 핑계로 몸을 대면서 지경그룹의 식구가 될 꿈을 꾸는 그런 여자였다.
“그렇게 빤히 보니까 부끄럽잖아.”
왼손으로 아래를, 오른손으로 입술을 가린 오지은이 눈웃음을 흘렸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려야 하는 게 아닐까?
성창욱이 엉뚱한 생각을 할 때,
“아이, 얼르-은!”
홀랑 벗은 오지은이 애교를 떨며 다가왔다.
참, 염병한다.
성창욱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