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사탄의 생명력 게이지가 회색으로 변하며, 녀석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언젠가 나를 찾아온다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건 이 녀석도 마찬가지군.
지군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게 말했다.
“맞지?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 그래.”
사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우리는 그대로 사자의 탑 지하의 끝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사탄 녀석 외에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었다. 오히려 탑의 주인이 우리를 맞아주려 하는 것인지 장애물이 사라져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
[‘백색의 방’에 도착하셨습니다.]
지하의 끝에 도착하자 덩그러니 놓여있는 의자가 보였다. 그때와 같은 모습이다. 내가 다녀간 이후로 아무도 오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의자의 앞으로 다가가자 모두가 진을 치듯 흩어져 주변을 확인했다.
“…… 끝나면 바로 대답할 테니까 모두 걱정하지 말고.”
정우가 코끝을 훔치며 대답했다.
“걱정은 안 하고. 최대한 빠르게 끝내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으니까.”
“그래.”
대화를 마친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겉보기에는 딱딱하지만, 막상 앉으면 회장님의자에 앉은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자 온 세상이 검게 물들며 혼돈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혼돈의 영역’에 다시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탑의 주인 ‘티아마트’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치 우주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공간, 그 어둠의 끝에서 공간이 갈라지며 티아마트가 튀어나왔다. 너무나도 거대하여 본 드래곤은 아기라고 생각될 정도의 크기.
압도적인 오라가 주변에 퍼지며 내 몸을 떨게 했다.
-왔는가.
전율이 오는 목소리.
“…… 나를 기억해?”
내 대답에 녀석이 고개를 천천히 내려 눈을 마주쳤다.
-역사의 도표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간인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는가.
“오…. 기억해주니 고맙네.”
[‘티아마트’가 당신이 가지고 온 물건에 흥미를 보입니다.]
[네 마왕에게서 얻은 ‘악마의 정수’를 그에게 건네어 주십시오.]
내가 싱긋 미소를 지은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알고 있지?”
-그래, 이미 혼돈 속 빛과 이야기를 끝내었다.
“혼돈 속 빛? 그럼 당신은 혼돈 속 어둠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뭐…. 그렇다고 하자. 어차피 그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나는 챙겨 온 악마의 정수를 전부 꺼네어 티아마트에게 보였다. 티아마트가 날카로운 손톱을 살짝 흔들자 정수 네 개가 날아올라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티아마트가 크게 입을 벌린다.
그러곤 정수를 한 입에 꿀꺽 삼켰다.
우우우우우웅-.
갑자기 주변이 크게 흔들리며 강한 오라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티아마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트름을 하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동시에 네 마왕의 모습이 그 연기 속으로 보였다.
‘녀석들의 영혼을 소화시킨 건가?’
[‘티아마트’의 분신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본래의 힘을 되찾은 ‘혼돈 속 어둠’이 시간의 흐름을 안정화하기 시작합니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녀석의 오라가 일렁이며 치솟아 오른다. 내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녀석에게 물었다.
“녀석들은 사라진 건가?”
-……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원래의 자리?”
그렇구나.
아누가 회랑에 대천사들을 만들어 냈듯이, 티아마트도 지옥에 대악마들을 만들어 냈으니….
녀석들은 조물주의 곁으로 돌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역사의 흐름은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응?”
-이번에는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한번 움직여 보아라.
“…… 이제 인과율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이번만이다.
“뭐….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건 네 자유다.
“아누는 뭐라는데? 아누도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보래?”
-아누는 이미 사라졌다. 새로운 혼돈 속 빛과 나는 이제부터 역사를 지켜보기로만 했으니, 새로운 역사는 너희들이 쓰도록 해라.
“새로운…. 그렇군. 알았다.”
대화를 마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둠이 강하게 휘몰아치며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시스템 메시지]
[‘혼돈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정신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십시오.]
* * * * *
‘혼돈의 영역’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룹원 모두의 몸이 자동으로 지옥에서 튕겨 나갔다.
피슉!
“…… 여긴.”
어둠이 사라진 화창한 날씨, 따스한 햇볕이 비추어주는 마을.
구 ‘폐허가 된 마을.’
[시스템 메시지]
[‘다시 만난 세계’에 도착하셨습니다.]
현 ‘다시 만난 세계.’
우리가 멸망의 땅에서 제일 처음 도착한 메인 마을 앞이다.
지군이 황당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형? 뭐야, 이게.”
“뭐가.”
“왜 게임 밖으로 안 나가지고 여기로 온 거지?”
“…… 모르겠는데. 우선 안으로 들어가 보자.”
혹시나 변경된 사항이 있나 싶어 마을을 돌아다녀 보았는데,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우리가 열다섯 번째 라운드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뿐.
어차피 이번 라운드는 선택 흐름도 없었으니 스토리의 방향은 한 곳일 텐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라는 거지?’
마음 사람들이 모두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플레이어들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마을에서 쉬고만 있을 뿐 사냥에 나가지 않았다.
본래의 게임이었다면 서로 다른 맵을 지정받기에 앞을 향해 나아갔을 텐데.
이곳에서는….
“김천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
정우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 좀 해보자.”
혹시 티아마트와의 대화에서 다음 장소로 갈 힌트를 받은 적이 있나? 생각을 곱씹어 보았지만 새로운 역사를 쓰라고만 했을 뿐.
어디로 가라고는 하지 않았다.
혼돈 속 빛이라고 불리는 아누와 파우스트 존재도 말이다.
분명 이번 라운드가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길만 잘 찾으면 될 텐데….
짹짹짹짹-.
참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우리는 분수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각자 아이디어를 내보기로 했다.
‘……’
우리가 벙쪄있는데, 먼 곳에서 유소라가 크게 외치며 달려왔다.
“천재 씨!”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자의 서’가 황금색으로 바뀌어 있다.
“…… 아!”
머리가 번뜩였다.
이 게임의 길을 안내해주는 지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떠올리다니.
“천재 씨, 사자의 서에 새로운 장이 나타났어요.”
“읽어주시겠어요?”
“네. 그러니까….”
촤르르르륵-
「선택 받은 자여. 이제 인과율의 흐름에 몸을 싣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만들게 되었으니, 너는 역사의 도표, 그 자체다.」
‘…… 내가 역사의 도표라고?’
「군단의 심장을 가진 자여, 다시 한번 축하해주도록 하마. 이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하하…. 세계의 주인이라.”
“계속 읽을까요?”
“…… 예.”
「이 모든 일은 시작된 곳에서 끝난다. 」
‘시작된 곳에서 끝난 다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도록 하마. By.파우스트.」
“…… 녀석.”
결국 이 모든 스토리의 끝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답이 나왔다.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자 머리가 맑아졌다. 모두가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시험 후 답안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나는 괜히 히죽 웃으며 모두가 들리도록 말했다.
“김준철을 불러와. 이제 게임에서 나가자.”
* * * * *
“후우…. 그때와는 풍경이 다르네.”
내 독백에 마정우가 대답했다.
“정화된 건가?”
“아무래도 바이러스가 전부 사라진데다가 인간들이 자연에 손을 대지 않으니….”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강의 북부.
이 게임을 시작할 때, 썩은 내를 풍기며 좀비의 시체로 가득했던 강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세상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기 전, 내가 살아오던 서울의 한강 모습이다.
이곳을 건너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모두 겁에 잔뜩 질려 있었는데.
이제는 시체를 보아도 멀쩡할 정도로 정신이 단단해졌다.
마정우, 유소라, 마이클 그리고 내가 강의 건너편을 보았다.
이곳에는 처음 게임을 시작한 그룹원들만을 데리고 왔다.
다른 이들을 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이미 게임에서 나가는 방법은 공유하고 왔다.
그저 게임의 시작점은 모두 다르기에, 김준철에게 따로 도움을 받기로 한 것뿐.
푸후-.
내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사자의 서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모든 일은 시작된 곳에서 끝난다.’
“……”
결국, 시작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나.
운행을 마친 버스가 차고지로 돌아가듯, 우릴 모두 여행을 끝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쿠릉-. 쿠릉-. 쿠르르릉!
우리를 안내해주는 군인들이 보트에 시동을 걸었다. 그들은 김준철의 명령에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준다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마이클이 백팩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천재 킴, 이제 우리 돌아가는 것 입니꽈?”
“그래. 가야지, 우리가 원래 살던 곳으로.”
“저기로 가면 이 게임에서 나갈 수 있는 거예요우?”
“…… 어.”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이 게임에서 나가면 어떠한 일들이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이미 우리에게 시스템 메시지를 보여준 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자들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쿠릉!
“순서대로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도깨비 마스크를 착용한 군인이 크게 외쳤다. 우리는 순서대로 보트로 몸을 옮겼다.
강을 넘어 이곳으로 올 때와 같은 보트인데 감회가 새롭다. 마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학교로 걸음을 떼는 학생처럼.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콰릉!
쿠르르르르르-
보트가 물살을 세차게 가르며 나아갔다. 우리는 웃음기 가득 찬 얼굴로 강의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끝이다.’
구름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빛이 내리쬐었다.
어두웠던 도시가 환하게 비추어지며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처, 천재 씨.”
유소라가 떨리는 손으로 내 팔뚝을 잡았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 녀석은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격스러웠는지 눈동자가 축축해졌다.
마이클이 괜히 정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히죽 웃었다.
“옐로 몽키, 우는 거예요우?”
“우, 울긴 누가 울어. 한강 물이 눈에 튀어서 묻은 거야.”
“눈동자가 촉촉한데요우?”
“닥치세요우.”
정우가 마이클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팍! 치더니 고개를 돌려 소매로 눈을 닦았다.
나는 좋은 미소로 모두를 한 번씩 보았다.
“도착하겠습니다!”
조타수를 맡은 군인이 크게 외치며 보트의 속도를 낮추었다.
[시스템 메시지]
[시작 포인트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 시간부로 열다섯 번째 라운드가 종료됩니다.]
[게임의 끝을 알리는 장소로 이동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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