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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화

-너희를 부른 이유는….

빛과 어둠이 서로를 몰아내려 강하게 휘몰아치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면서 말을 이었다.

-전부 없애버리기 위해서지.

“……”

바엘이다.

목소리나 말투를 보아 그 녀석이 확실했다. 결국 녀석의 최종 목표는 신과 한 몸이 되어 역사의 도표에 개입하는 것이었나.

‘후우….’

바엘 녀석이 규격 외의 범주 안에 들어가 버렸다. 이제는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태.

시간의 흐름을 조작하여 멸망을 가져올 줄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참…. 빌어먹을 새끼다.’

-내가 네게 말했던 멸망이 곧 다가올 것이다. 모든 존재가 사라지는 그날 말이야.

“뭐?”

-네가 원하던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이제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섬멸된다.

“…… 그래?”

-그래, 저번에도 말했던 것처럼 너 또한 마찬가지로 사라진다.

“내가 사라져?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녀석이 내게 직접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루시퍼에게 들어본 적은 있어도, 바엘에게 직접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누구에게 멸망에 관하여 말했었는지는 알고 있다.

‘…… 설마.’

-네놈과 그 여자.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야.

“……”

역시.

바엘은 파우스트와 나를 착각하고 있다. 언제부터 저렇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직 녀석은 불완전한 존재가 확실했다.

나는 휘몰아치는 빛과 어둠을 향해 질문했다.

“그럼 멸망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멸망 이후에는 이 세계도 사라진다.

“이 세계가 사라져?”

-모든 것은 혼돈으로 돌아갈 것이야.

“……”

루시퍼보다 더욱 미친놈이다.

근데 저 녀석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형태를 보아 물리적인 힘으로는 어떻게 당해낼 방법이 없을 것 같고.

아누는 티아마트와 동급의 힘을 가진 존재라고 했으니, 그런 몸을 지배하고 있는 바엘과 내가 싸운다 하더라도 이길 확률이 없다.

“…… 혼돈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혼돈으로 돌아간 이후?

“어, 네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혼돈으로 돌아간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질문에 녀석이 조용해졌다.

그리곤 소용돌이 다시 크게 휘몰아치며, 이번에는 따뜻한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인간이여.

“…… 예.”

-이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자를 찾아오도록 해라.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라.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자가 누구인데요?”

-이 역사의 시작….

스르르르르르.

갑자기 소용돌이가 점점 작아지더니 빛과 어둠이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응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스템 메시지]

[열다섯 번째 라운드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답을 찾으면 다시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실마리?’

그런 거 얻은 적 없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그룹원들을 보았다. 다들 하나같이 모른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흩트렸다. 나 또한 모르는 상황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한시간 내에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자’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시간: 02:59:58]

“아니, 그게 대체 누구냐고.”

전혀 알 수 없는 말만 한 채 시스템 메시지가 사라졌다.

* * * * *

앞으로 세 시간.

시스템이 우리에게 알려준 자를 찾을 시간이다. 뭐라고 따질 겨를도 없이 우리는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세 시간은 이 게임 내에서 전혀 길지가 않은 시간. 마을에서 잠깐 돌아다니면 지나가 버릴 만큼 짧다.

나는 회랑 밖으로 걸어 나오며 천천히 생각했다. 우리 모두 답을 모르기에, 답에 가까운 자를 유추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자가 누구일까? 빛과 어둠이 섞여있는 상태니 그 틈새를 가를만한 힘을 가져야 할 텐데.

인간인지 아닌지도 모르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터벅. 터벅.

계단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는 모두의 안색이 좋지 않게 변했다.

답을 찾지 못하면 세 시간 후에 어떻게 되는지도 전혀 모르니 갑갑할 따름이다.

“누구 대충 예상가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1층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마정우가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여어!”

그는 스토리 화면을 보지 않아서 저런 반응을 할 수 있다.

내가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야, 큰일났다.”

“…… 어? 아니, 다들 표정이 왜 이래?”

“너 혹시 혼돈을 끝낼 수 있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혼돈을 끝내다니.”

“그게 말이야….”

나는 정우에게 앞에서 본 스토리를 전부 말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아누와 바엘의 대화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정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숨을 크게 내뱉으며 말했다.

푸후-.

“뭐야, 답이 너무 간단한 거 아니야?”

“어?! 너 그게 누군지 알고 있어?”

“당연하지.”

“누군데?”

평소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줄이야!

정우의 대답에 모두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나는 귀를 기울여 그의 대답에 집중했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이 역사의 시작이라고 했다면서?”

“그렇지.”

“그럼 계속해서 역사를 지켜본 자를 찾으면 되는 거잖아.”

계속해서 역사를 지켜본 자.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이렇게도 간단한 답을 왜 나는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그렇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지켜본 자.

“…… 파우스트. 그 녀석이구나.”

“그렇지. 내 생각에는 그 녀석인 것 같은데…. 아닌가?”

“아니, 맞는 것 같아. 그 녀석 말고는 딱히 생각나는 사람도 없어.”

“그렇지?”

답을 찾은 우리는 곧장 천상에서 내려와 파우스트의 저택을 찾아갔다.

녀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만찬을 차려놓았다. 저택 안에 있는 하녀들이 바삐 움직이며 1층을 연회장처럼 바꾸더니, 2층에서 파우스트가 걸어 내려왔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그를 올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 파우스트,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무엇을 말입니까?”

“너. 네가 바엘을 아누의 곁으로 보냈지?”

“……”

“그리고 녀석에게 빛의 결계를 사용해서 아누의 힘이 통하지 않도록 했고.”

“……”

“이거 전부 네 생각이야? 아니면 티아마트와 손이라도 잡은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여유롭게 와인을 마셨다.

후릅.

“우선 식사부터 하시지요. 천천히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접시를 뒤집어 던졌다.

쨍그랑!

“장난하지 말고 빨리 말해.”

“…… 천재 씨, 당신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듣기 위해서는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오는 게 좋으실 거예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느긋하게 움직일 시간이 없다.

이곳까지 오는 데만 벌써 한 시간을 소모했기 때문에,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려면 서둘러야 한다.

“파우스트, 나는 지금 너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

“노닥거리자는 게 아닙니다.”

녀석이 천천히 걸어와 식탁 앞에 앉더니 말을 이었다.

“마지막 식사를 하자는 것이지요.”

“…… 뭐?”

“천재 씨와 첫 식사이자, 마지막 식사를 하고 싶군요. 천재 씨가 원하는 답은 식사가 끝난 이후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지군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의 반대편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었다.

키이이익.

우리는 조용히 식사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유럽식 식단. 스테이크를 한 입 썰어 물은 후, 빵을 뜯자 녀석이 웃으며 말했다.

“천재 씨.”

“말해.”

“이 세계의 멸망을 막는다고 하셨지요?”

“…… 그렇지.”

와그작!

의미심장한 미소.

파우스트가 스프 위로 수저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식탁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멸망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 바엘을 없애야지.”

“그 후에는요?”

“그 후에?”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시스템이 정해놓은 임무를 따라가다 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바엘이 사라진 이후에는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을까요?”

“……”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또다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

“아누와 티아마트는 다시 천사와 악마들을 만들고, 그 녀석들은 또다시 분쟁을 위해 싸우겠지요? 하하….”

우리 둘은 ‘멸망’이라는 같은 단어를 말했지만, 목표 지점이 전혀 달랐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가 죽은 이후의 역사는 상관없어.”

“천재 씨가 사라진 이후에는 이 세계가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그럼 제가 지금 천재 씨를 죽인다면, 이 세계를 멸망시켜도 되는지요?”

“……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내가 낫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순간적이지만 땀이 차오른다. 녀석에게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강하게 박혔다.

탁. 탁.

마정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낮게 속삭였다.

“왜 이렇게 긴장해? 천하무적 김천재가 말이야.”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파우스트를 보았다. 바보 같은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표정.

녀석이 얼마나 강한 힘을 숨기고 있는지는 나밖에 모르고 있다.

“천재 씨, 이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뭘?”

“제가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역사와 그 끝에 대해서 말입니다.”

* * * * *

반복되는 이 세계는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결국, 멸망을 막을 수 없다.

악마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 세상이 존속되지는 않는다. 천사가 사라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

천사와 악마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존재.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무량대수(無量大數)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파우스트는 모든 것을 깨닫고 이제 그 반복을 깨려 했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 흐름을 만듦과 동시에 말이다.

“…… 그래서, 네가 원하는 시간을 만드는 방법은 찾았고?”

“예! 너무나도 간단하더군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

“그건…. 직접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아까 말씀하신 시간은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시간?”

내가 고개를 돌려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00:49:32]

벌써 이렇게 된 건가?

루시퍼를 상대할 때와는 다른 의미로 정말 난이도가 높은 라운드다.

“대충 오십 분 정도 남았어. 이제 떠나야 해.”

“그렇군요….”

“약속은 지키도록 하고. 너 분명 식사가 끝나면 우리를 따라온다고 했었지?”

파우스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쿵!

갑자기 녀석의 뒤로 커다란 관이 생성되더니 땅에 강하게 부딪혔다.

“이 분도 같이 가도 되겠지요?”

“…… 상관없기는 한데. 괜찮겠어?”

“예, 꼭 같이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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