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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화

마왕의 기억 파편이 발동되었다.

그것도 중요한 전투 중에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제외하고도 많은 플레이어가 이번 화면에 참가 되었다.

‘전부 온 건가….’

수가 굉장하다.

대체 어떤 장면을 보여주려고 우리 모두를 데려왔단 말인가? 아직 이번 라운드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도 있는데 말이다.

쉬이이이익-!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안개 커튼을 양옆으로 열었다.

그곳에는 앞서 보았던 태초의 지옥, 아직 사악함에 크게 물들지 않았던 때의 날이다.

악마들이 땅을 파고 돌과 흙을 뭉쳐 무언가를 짓고 있다. 위치만 보아도 녀석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녀석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티아마트가 잠들어 있는 ‘사자의 탑’.

아니, 만들어져 있는 사자의 탑을 보강하기 위해 작업 중인 것 같다.

“서둘러라!”

강렬한 목소리가 들렸다.

벨제붑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악마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성인인 저 모습은 바엘이 아닌 벨제붑, 그럼 이 기억 속 시간은 왜 보여주는 거지?

‘…… 흐음.’

작업하던 벨제붑이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크으으윽….”

그의 부관으로 보이는 악마가 날아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잠시 쉬고 있도록 하마. 여기는 네가 맡아서 진행하고 있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벨제붑이 부관에게 현장을 맡긴 후, 악마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대한 해골의 눈으로 들어가자 기이하게 생긴 왕좌가 그를 기다렸다.

“후우….”

벨제붑이 왕좌에 앉더니 낮게 숨을 내쉬며 독백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이냐.”

아까 현장에서 외치던 우렁찬 힘 있는 소리는 사라지고, 기력이 쇠해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노인의 목소리다.

그의 목젖이 움직였다.

꿀꺽.

그리곤 메아리치듯 머릿속에 어린아이의 음성이 울렸다.

-벨제붑, 잠시 몸을 써야겠다.

“왜지?”

-그것까지는 네가 알 필요 없다.

“……”

-사라져라.

콰드드득! 소리와 함께 벨제붑의 전신에서 핏줄이 튀어나오며 강한 오라가 방출되었다.

“…… 후우.”

벨제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몸을 테스트했다.

“전보다는 괜찮군.”

‘저 녀석이 숙주 상태의 바엘인 건가?’

몸의 지배권을 가져온 바엘이 마왕의 성에서 나가 지옥의 중앙으로 다시 이동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부관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쉬고 있으시지 말입니다?”

“됐다. 너는 지금 여기 있는 병력을 이끌고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주어야겠다.”

“…… 예?”

“그곳으로 자리를 옮겨 새롭게 탄생하는 내 형제를 반겨주도록 해라.”

부관이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드디어 그분이 깨어나시는 겁니까?”

“그래, 부활의 시간에 늦지 않도록 해. 녀석은 생각보다 악질이니까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모두 주목! 주목해라! 현 시간부로 전원 세계수 방면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다시 전파한다. 현 시간부로 전원 세계수 방면으로 이동하도록 한다!”

-에에? 무슨 일이십니까. 이것만 쌓아 내리면 이번 층은 끝나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 갑시다.

-맞아요! 나중에 다시 하려면 흙이 굳어서.

“벨제붑 님의 형제가 부활하신다! 늦지 않도록 이동해야 해!”

부활 소식을 들은 악마들이 각종 기구를 내려놓고 재빨리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관은 벨제붑에게 경례하더니 그들을 이끌고 전부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 좋아.”

모두가 사라지자 벨제붑이 손을 크게 흔들어 공간을 열었다. 그 반대편에 있던 로브를 쓰고 있는 자가 자연스럽게 포탈을 넘어와 말을 걸었다.

“…… 벨제붑.”

벨제붑이 로브를 쓰고 있는 자 앞에서 둥둥 떠다니며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파우스트.”

‘……?!’

파우스트는 이때부터 벨제붑을 만나고 있던 건가? 아니지, 녀석은 지옥이 생기고 나서 한참 후에나 태어났을 텐데. 너무나도 시기가 맞지 않는다.

“자네도 오랜만이야, 벨제붑.”

“…… 말한 대로 모든 준비는 끝내놓았다. 저곳으로 이동해 티아마트 님을 만나면 돼.”

파우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멸망을 원하고 있다고만 전해주면 되는 거지?”

“그래, 그 외에는 네가 원하는 질문을 하도록 해라.”

“나는 원하는 질문이 없어. 그저 너와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이지.”

“…… 인간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존재군.”

* * * * *

화면이 넘어가며 탑으로 들어가는 파우스트가 아니라, 나오고 있는 파우스트가 보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이 성공적으로 흘러갔나 보다.

“벨제붑, 네 이야기는 전달했다.”

“…… 뭐라고 하시지?”

“네가 원한다면 마음대로 움직여보라고 하더군.”

“그리고?”

“아누는 자신이 상대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 좋아.”

티아마트가 세계 멸망에 동의할 줄이야, 예상외의 대답이다. 나와의 대화에서는 분명 루시퍼의 행동을 막아도 된다고 했었는데….

‘흐음.’

벨제붑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파우스트에게 물었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 나는 뭐…. 이제 모습을 감추고 숨어있어야지.”

“멸망을 지켜보지 않을 생각인가?”

파우스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 그 흐름 속에 끼어있다가는 내 존재도 사라지는 거잖아?”

“당연하지. 너도 사라져야 한다.”

“뭐? 내가 왜 사라져.”

“왜냐니. 모든 존재에 대한 멸망이 이루어지는데 너만이 살아남을 생각인가?”

“…… 그럼 너는?”

“멸망의 끝에는 나도 사라질 생각이다. 예외는 없어.”

파우스트가 헛웃음을 뱉었다.

“할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해라. 나는 이제부터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몸을 숨길 테니.”

“……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아.”

“그럴까?”

파우스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바엘이 무릎을 꿇었다. 녀석이 있는 곳만 중력이 크게 발생한 것 같은데, 어떤 능력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크윽…. 파우스트 네 이놈…!”

“숨바꼭질을 시작해보자고. 나는 이제부터 사라질 테니 너는 찾아보도록 해.”

“장난하지 마라.”

“장난? 나는 장난이 아닌데.”

피슉! 소리와 함께 파우스트가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곤 어딘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퍼지듯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나는 멸망 이후의 세계를 원하고 있어. 네가 말하는 멸망이랑 내가 생각하는 멸망은 조금 다른 것 같군.

“…… 이제부터 너와 나는 적이다.”

-처음부터 적이었어, 잠시 손을 잡았을 뿐.

“네가 아끼는 그 여자도 사라지게 될 것이야.”

-…… 그렇게 되면 멸망이 오기 전에 네 녀석이 먼저 내 손에 사라지게 될 거야.

“원하던 바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마.”

* * * * *

이 대화를 끝으로 또다시 화면이 넘어갔다. 전환이 굉장히 빠른 것으로 보아 많은 장면을 보여주려는가 보다.

안개 커튼이 쳐졌다가 다시 펼쳐졌을 때 우리는 전장으로 이동해 있었다.

천사와 악마들이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다. 앞서 상대한 세 명의 마왕과 대천사들이 맞서 싸우고 있다.

일방적으로 천사들이 밀려 보이지만, 아누의 힘을 받은 메타트론이 적장의 목을 쳤다.

콰직!

“메피스토펠레스! 감히 신성한 천상에 발을 딛다니!”

메피스토펠레스가 목에 박힌 창을 붙잡고 신음을 뱉었다.

-크아아악!

스토리 화면은 우리에게 세 번의 전투 장면을 보여주었다. 바엘의 형제라 불리는 세 마왕이 태어나는 순서대로 천상을 향해 덤볐다.

물론 그들의 계획은 전부 실패했다.

메타트론과 대천사들이 회랑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별한 힘을 받아 움직이는 바람에, 전부 지옥에서 천상으로 향하는 입구에서 막혔다.

아누의 존재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바엘은 세 번의 천상 공략을 실패한 후 새로운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아누가 회랑을 지키고 있는 이상 천상으로의 진입은 불가능에 가깝다.

“……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군.”

바엘이 벨제붑의 몸에서 나오더니 천사 중 한 명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신의 말씀이 내려오는 날에 대회랑 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내었다.

“지옥에도 성전을 만들면 그들을 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손을 들고 목소리를 크게 높이는 자.

[라파엘]

‘저 녀석의 몸에 바엘의 숙주가 들어간 거구나.’

라파엘이 의견을 내자 다른 천사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 그렇지. 악마들을 정화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 아니야?

-맞소! 마왕들이 사라진 지금, 지옥에 성전을 만듭시다. 그럼 녀석들이 다시 나타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마왕은 없더라도 일곱 악마는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메타트론이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

쿵-. 쿵-. 쿵-.

“라파엘, 좋은 의견이다. 성전의 위치와 앞으로의 계획은 내가 직접 신께 물어보도록 하지.”

라파엘이 메타트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숙이고 있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아주 비열한 표정으로.

* * * * *

바엘이 원하던 대로 천사들은 지옥에 대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라파엘이 직접 지목한 위치, ‘사자의 탑’이 있는 장소 바로 위다.

이후에는 앞서 보았던 스토리와 같은 장면들이 지나갔다.

대천사와 대악마의 격전이 오고 가고, 사탄과 루시퍼의 사망이 보여진 후.

라파엘이 지옥에 남아 봉인되었다.

앞서 이 장면을 스토리 화면을 볼 때, 우리는 전혀 몰랐다.

라파엘의 몸속에 바엘이 숨어있었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녀석이 계획한 일이었는지.

‘…… 저 때 바엘이 나왔구나.’

라파엘이 지옥 성전에 봉인되기 직전, 바엘이 그녀에게서 튀어나와 하급 악마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다시 벨제붑의 몸으로 이동을 했고, 그들은 아무도 없는 장소로 이동해 대화를 나누었다.

“…… 전부 네가 계획한 일이냐?”

벨제붑이 무덤덤한 얼굴로 먼저 물어보고.

-그래, 루시퍼 녀석을 잘만 이용하면 천상으로 가는 길을 쉽게 뚫을 수 있겠어.

비열한 표정의 벨제붑이 대답했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머물다니, 그럼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왔던 건 벨제붑이란 말인가? 바엘이란 말인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지금 이 세계에는 바엘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녀석이 우리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하지 마라. 녀석의 가슴에는 이미 분노가 가득 차 있어. 우리는 그저 타오르는 불길에 장작을 넣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 어떻게?”

-힘을 주고,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도록 해. 한동안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두면 돼.

“그냥 두라고?”

-그래, 어차피 천국에서 쫓겨난 천사는 악마가 되는 길밖에 없어. 녀석은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우리와 같은 심장을 갖게 될 거야.

벨제붑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 알겠다, 바엘.”

쉬이이익-

갑자기 안개 커튼이 쳐지며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나타났다.

[현 시간부로 스토리 화면을 종료합니다.]

[시네마틱 화면이 진행되는 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샤아아아악-!

‘…… 이 모든 일이 바엘의 짓이었나.’

* * * * *

“안녕.”

팍!

바엘의 주먹이 내 명치에 꽂혔다. 권투 선수가 거리를 재기 위해 날린 잽처럼 가벼웠는데, 받은 충격은 생명력의 반절이 날아갈 정도로 컸다.

쾅!

그대로 날아간 내 몸이 땅에 꽂혔다.

-쿨럭!

“이…. 이런 미친놈이.”

“끼얏호!”

바엘이 건물 위에서 내 위로 점프를 뛰어내렸다.

벌써 생명력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저걸 맞으면 그대로 즉사할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강하다.

내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아, 안 돼.”

쉬익- 파각.

‘…… 음?’

나를 향해 떨어지던 바엘의 이마에 화살이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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