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고티가 침착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제약에 대한 주문은 자연의 힘을 사용하는 드루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드루이드?”
“그래, 네가 네크로맨서라서 잘 모르나 본데. 보통 제약이 있는 스킬을 가진 자들은 드루이드와 그룹을 이루지.”
“……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처음 들을 수밖에. 시작부터 끝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랭킹 1위를 가졌으니 말이야.”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공홈에도 없는 자료잖아?”
“너무나도 당연해서 모두 언급을 하지 않았었을 뿐. 우리 밑에서 노는 놈들은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이야.”
“…… 그래?”
저렇게 말하니 딱히 뭐라 할 말은 없다. 임금님이 백성의 모든 마음을 알 수 없듯이, 나도 상위 플레이어만 계속해왔기에 하위 플레이어들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다.
제약에 걸려본 적이 있어야 제대로 알 텐데 말이다.
고티에게 힌트를 얻은 나는 그대로 동쪽 문으로 향하여 김리아를 찾았다.
이곳에서 쓸 만한 드루이드라고는 그녀뿐, 게다가 레벨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니 고티가 말한 제약을 푸는 방법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김리아!”
곰과 함께 악마를 상대하던 김리아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천재 씨!”
“어떻게, 이쪽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죠?”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예! 그럼요.”
“저기 뭐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네? 아, 네. 말씀하세요.”
“혹시 제약 스킬에 대해서 좀 아세요?”
“제…. 약?”
내 질문을 들은 김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전투에 특화된 드루이드들은 디버프 스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건가?
“예. 제약이요.”
“…… 어느 정도 알고 있기는 한데, 그건 왜요?”
“저희 그룹원 중 한 명이 제약 스킬 때문에 지금 위험해져서요.”
“제약 스킬 때문에?”
“봉인 주문에 제약이 걸려있는지 모르고 사용했는데….”
그녀가 내 설명을 듣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드루이드라고 해서 모든 스킬을 배운 것은 아니니까 그녀의 반응이 이해된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와 본 거예요.”
“…… 혹시 저 말고 다른 자연 능력자에게는 부탁해보셨나요?”
“리아 씨 말고 다른 자연 능력자?”
“네. 천재 씨랑 친한 분 있잖아요.”
나랑 친한데 자연 능력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그게 누구죠?”
“누구긴요! 천재 씨가 오라고 해서 지금 이 세계에 대기하고 있는 분.”
“이 세계에 대기?”
“…… 샬로트, 엘프족의 여왕님이요!”
* * * * *
나는 정우와 함께 곧장 망령의 숲을 찾아갔다. 그곳에 대기하고 있는 엘프족의 여왕, 샬로트가 우리를 반겼다.
나는 그녀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주고 제약에 대한 해결 방법을 물어보았다.
막막해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간단히 답을 주었다.
제약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충분하다면 그녀의 주문으로 무조건 없앨 수 있다고 했다.
[엘프의 여왕 ‘샬로트’의 제안 임무가 시작됩니다.]
[마법사, 조복춘의 몸에 걸린 ‘제약’ 주문을 소멸시켜주는 대신 에너지를 소모한 자신은 전장에 참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엘프 여왕은 이 게임 스토리 진행을 담당하는 NPC 중 하나, 이러한 개입이 진행되면 또 다른 제한을 발생시킨다 이건가.
‘운영진 녀석들….’
리나를 고쳐주는 대신 엘프 여왕은 전장에 참가하지 않는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YES]
[샬로트의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엘프 여왕의 힘으로 ‘조복춘’ 플레이어의 제약을 소멸시킵니다.]
[이번 임무는 단순 1회성이니 그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이구나.
샬로트가 주문을 외우자 리나의 몸을 감고 있는 마나 사슬이 빛을 내었다.
“흐으윽.”
리나가 신음을 뱉었다. 온몸이 붉어질 정도로 강하게 묶여있는 사슬이 조금씩 풀어지니, 내부에서 무언가의 반응이 일어났겠지.
사슬이 풀어지는 만큼 그녀의 몸이 더욱 강렬하게 발작했다.
정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괘, 괜찮아요?”
“흐….”
대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가 보다.
엘프 여왕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길어질수록 리나의 발작은 더욱 심해졌다.
하긴…. 잘못된 자세로 오래 있으면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둔해지다가, 피가 통하는 순간 찌릿함과 동시에 몸이 부들거려봤다.
단순히 팔과 다리 정도만 하더라도 말 못 할 정도로 찌릿한데.
온몸이 저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보리스, 알레인. 회복 주문을 부탁한다.”
엘프 두 명이 리나 옆으로 붙더니 회복 주문을 외웠다. 초록색 연기가 그들의 손에서 흘러나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마음이 차분해질 정도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허브 향.
시간이 흐르자 리나의 발작이 조금씩 멎고,
그녀를 강하게 옥죄고 있던 사슬이 한둘씩 풀려 사라졌으며, 천천히 깎여 내려가던 생명력 게이지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메시지]
[‘조복춘’ 플레이어를 옥죄고 있던 제약이 사라집니다.]
-…… 푸하!
리나가 가슴을 강하게 튕겨내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정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리나 씨!”
“저…. 정우 씨.”
“괘, 괜찮아요?”
“괘…. 괜찮아요….”
게임을 하라고 했더니 한 편의 드라마를 찍고 있다. 누가 보면 멜로 영화 속 하이라이트 장면인 줄 알겠다.
[‘제 3의 눈’이 둘을 보며 닭살이 돋는다며 잠시 화면을 끄겠다고 합니다.]
나도 두 눈을 감아 화면을 끄고 싶다.
“천재 씨.”
엘프 여왕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예.”
“저분을 옥죄고 있던 제약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회복에만 신경 써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내가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뭘요….”
털썩.
엘프 여왕이 갑자기 혼절하듯 쓰러졌다. 시중을 드는 엘프들이 달려와 그녀를 둘렀다.
-여왕님!
여왕이 손을 저으며 그들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괜찮아요. 오랜만에 강한 힘을 사용했더니, 정신이 잠시 흐트러진 것 같습니다.”
나는 여왕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 예.”
이 짧은 시간에 그녀의 두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어졌다. 하긴, 저 정도로 강한 제약 주문을 해제하려면 굉장히 많은 오라를 사용해야겠지.
다섯 번째 라운드에 등장하는 NPC 치고는 굉장히 오버해서 힘을 사용했을 것이다.
터벅. 터벅. 터벅.
새로운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어이, 너. 여왕님을 안으로 모셔라.
-알겠습니다!
여자 엘프 병사 두 명이 달려와 여왕의 양손을 지탱해 주었다.
“천재 씨, 저는 잠시 쉬도록 하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저희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저희 쪽에도 치유 능력자가 있으니 신속히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엘프 여왕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음만 받도록 하지요.”
* * * * *
리나의 제약을 없애는 데 성공한 우리는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와 회복에 집중했다.
제 4 마왕을 상대하느라 소진한 체력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플레이어는 나 하나뿐이다.
“…… 후우.”
그래서 혼자 북문을 맡게 되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남아있는 스켈레톤 병사들로 몰려오는 악마들을 막아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지금 내가 싸우고 있는 게 훨씬 이득인 것 같다.
체력을 포기하고 더 많은 수의 부하를 만들어내면, 앞으로 벌어진 메인 전투에서 더욱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네 명의 마왕 중 세 마리를 처리했으니,
이제 곧 루시퍼가 오겠지?
앞으로 남은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리바이브!”
스켈레톤만 소환하던 내가 이번에는 소생 주문을 사용했다.
파다다다닥!
잠자리같이 생긴 악마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손짓하자 놈들이 높이 날아오르며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쿠화아아악!
“…… 좋아.”
이 녀석들은 대공 기술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 가고일을 견제하기에 좋다.
입에서 나오는 가스에는 불도 붙일 수 있으니….
[시스템 메시지]
[제 1 마왕이 곧 부활합니다.]
[‘폐허가 된 마을’을 찾아오는 악마들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드디어 제 1 마왕의 부활인가.
이번에는 어떤 악마들이 찾아오려나? 이제는 은근히 적군의 상태가 기대된다.
적이 강할수록 내 소환 능력에 더욱 힘이 실릴 테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쿠구구구구구.
땅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아직 내 눈에 포착되는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먼 곳에서부터 오는 대군의 움직임인 것 같다.
이 정도면 꽤 많은 숫자의 적일 텐데.
“…… 이번에는 뭐가 오려나.”
* * * * *
루시퍼와 사탄이 지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이 벨제붑의 영혼을 사용하여 만들어 낸 검은 알에 조금씩 금이 가더니, 그 안에서 검고 불길한 오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사탄, 준비해라.”
사탄이 목례를 하더니 알 앞으로 다가가 다른 차원으로 연결된 공간을 열었다.
“시간은 어느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까?”
“…… 한 시간. 한 시간이면 충분해.”
“한…. 시간? 정말 괜찮겠습니까?”
“충분하다. 어차피 녀석은 다시 태어나기 전의 기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 거야.”
“…… 알겠습니다.”
[제 1 마왕이 곧 부활합니다.]
시스템 화면이 나타남과 동시에 알이 터지듯 깨졌다.
콰직, 콰지직.
펑!
포탄이 터진 듯 검은 연기가 주변을 감싸 안았다. 루시퍼와 사탄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알이 있는 곳을 지켜보았다.
-크흐으으….
알이 깨진 자리에 남아있는 한 마리의 악마. 녀석이 꽃을 피우듯 몸을 천천히 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어린아이와 같은 외모에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달려있다.
체격은 많이 쳐주어도 초등학생에 가까운 모습.
녀석이 찌뿌듯했는지 몸을 크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흐아아아암!”
그저 하품했을 뿐인데 사탄이 만든 공간이 휘어지며 사라졌다.
“무, 무슨!”
“흐아암, 응? 오! 사탄이구나.”
꼬마 아이가 사탄을 알아보았다.
“…… 나를 기억하고 있나.”
“그럼그럼. 어떻게 너를 기억 못 하겠어?”
꼬마 아이가 고개를 돌려 루시퍼를 보았다.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라 아주 행복한 듯한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말이다.
“루시퍼, 너도 오랜만이야?”
“…… 네 이름이 무엇이지?”
“응?”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내 이름?”
루시퍼가 편안하게 웃으며 꼬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네 이름.”
꼬마가 웃던 얼굴을 확 찡그리며 루시퍼의 손을 쳐내더니.
팍!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루시퍼에게 말했다.
“…… 누구긴. 네게 배신당해 사라진 벨제붑의 숙주. 지옥 최초의 지배자, 바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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