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공간이 뒤틀릴 정도로 큰 충격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잠깐이지만 폭발이 일어난 지점에 다른 세계가 보였다.
백색의 공간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는 자들.
익숙한 얼굴이다.
공식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다섯의 운영자 중 세 명.
녀석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다. 저들 중 한 사람은 정우와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
정우의 삼촌.
그 또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의 지배자인 것처럼 근엄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중지를 들어 보이려고 했는데.
쉬익-.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세계의 공간이 닫혔다. 그러고는 푸른색 홀로그램 화면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시스템 메시지]
[‘제 2 마왕 메피스토펠레스’가 소멸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마왕의 정수가 지급됩니다.]
<*제 2 마왕의 정수>
-제 2 마왕 메피스토펠레스의 영혼이 들어 있는 정수입니다.
[김천재 님의 놀라운 플레이에 ‘게임을 지켜보는 자’들이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제 3의 눈’이 단독으로 마왕을 돌파할 줄 몰랐다며 놀라워합니다.]
지군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허… 뭐, 뭐야 이거?”
리나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와…! 역시 굉장하네.”
나는 보상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확히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겠다. 마왕과의 대결이 처음이니 말이다.
[‘사자의 서’가 김천재 님의 활약을 기록합니다.]
[제 2 마왕을 처치함으로써 타 악마들의 힘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응?
마왕을 물리쳤는데 어째서 다른 악마들이 강해진다는 거지? 이해가 안 되지만, 우선은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방식이 되었든 간에 내가 마왕을 처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운이 좋았다.
아니, 실력이 좋은 건가?
뭐- 나 같은 소환 능력을 가진 직업이 아니라면 감히 덤빌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녀석의 약점을 단번에 간파했으니 다행이다. 설마 저렇게 강력한 놈이 두 가지 스킬만을 사용할 줄 아는지 누가 알았겠는가.
지군이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어깨를 비볐다.
“천재킴 쿤, 당신 정말 대단하군요?”
“…… 마이클 흉내 내지 마.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역겨워.”
“말씀 좀 이쁘게 하시죠?”
“이빨이나 닦고 오시죠? 좀비 먹고 온 줄 알았습니다.”
내가 지군의 등을 강하게 팍! 친 후 마을을 향해 걸었다. 녀석이 기쁜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내 옆으로 붙었다.
“와- 시간만 끌어달라고 하니까 그걸 잡았네. 진짜 미쳤나 봐.”
“…… 나도 잡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시간 끌다 보니 갑자기 해결 방법이 보였어.”
“마지막 기술은 대체 뭐야? 어떻게 저런 녀석을 한 방에 보낸 거야?”
“아이언 메이든, 너도 알고 있지?”
지군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오! 아이언 메이든 스킬을 가지고 있었구나. 근데 그 기술이 안 통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도박을 했어?”
메인 보스에게는 통하지 않는 기술이지만, 아무리 마왕이라도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번 라운드의 조연.
루시퍼를 제외한 다른 적들에게는 분명히 통한다.
설명하기가 귀찮았던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나는 고인물이잖아.”
이 한마디로 모든 설명이 간단하게 끝났다.
* * * * *
메피스토펠레스의 마지막을 본 악마들이 빠르게 퇴군했다. 그들 중 제일 먼저 도착한 악마 한 마리가 서둘러 루시퍼에게 달려갔다.
다다다다-
그가 도착한 곳에는 사탄과 루시퍼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의 흐름이 끊겼는지 사탄이 석연찮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냐.”
“저, 저저저….”
“말해.”
“…… 메, 메피스토펠레스. 제2 마왕이 사망하였습니다.”
악마 녀석이 고개를 푹 떨구며 보고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탄과 루시퍼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 악마도 아니고 마왕이라 불리던 자 중 한 명이 벌써 사라졌다니.
시간이 멈춘 듯 모두가 얼어붙었다.
수 초가 흐르자 루시퍼가 숨을 크게 내뱉으며 보고하러 온 악마에게 물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죽었다는 말이지?”
“…… 예.”
“그래, 누구한테 당했지?”
“그게…. 인간에게….”
“인간, 인간 누구?”
루시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이미 알고 있지만 한번 말해보라는 듯한 느낌이다.
악마 녀석이 고개를 더욱 깊게 떨구며 말을 이었다.
“그…. 김천재라는….”
“김천재…. 또 김천재구나.”
“예….”
사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루시퍼에게 말했다.
“녀석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습니다.”
“…… 가만히 둘 문제는 아니지. 하, 지, 만.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혼자 마왕을 상대했는데 말입니다.”
루시퍼가 클클거리며 보고하러 온 악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왕이라…. 그렇지. 하지만 녀석이 마왕이라 불리던 시절은 굉장히 오래전이야.”
“……”
“그때 지옥의 최강이지, 지금 최강은 아니지 않나?”
콰득!
루시퍼가 악마 병사의 머리를 강하게 잡아 두개골을 박살냈다. 녀석은 끽소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사탄이 그 모습을 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 맞습니다.”
“지금의 나와 과거 마왕들의 힘을 비교해보자면, 대등하거나 내 쪽이 좀 더 강할 것이야.”
“……”
“물론 오라의 크기로만 보자면 녀석들이 더 강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녀석들이 사용하던 능력과 현재 우리들의 기술을 비교해보자면, 우리가 훨씬 우위에 있다.”
“……!!”
사탄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루시퍼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라.”
“…… 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 제 1 악마가 깨어날 때까지는 다시 지옥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하, 하지만 김천재 녀석이-”
루시퍼가 손짓하자, 악마 병사 중 몇 마리가 또 다른 검은 알을 가져왔다.
사탄이 눈치를 보며 알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사탄, 걱정하지 마라. 앞으로 우리 대신 싸울 녀석이 둘이나 남아 있으니까.”
* * * * *
내가 갑주를 벗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푸하-!
“와…. 진짜 뒤지는 줄 알았다.”
정우가 끌끌거리며 내 배를 툭툭 쳤다.
“아니,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어?”
“이길 줄은 알고 있었는데 그 정도인지는 몰랐어. 아니지,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긴장되었던 건가?”
“야, 됐고. 그 마왕의 정수라는 건 대체 뭐야?”
내가 크리스탈 조각을 들고 오히려 되물었다.
“모르겠는데? 너는 알고 있어?”
“내가 알겠냐.”
“지군도 모른다더라고.”
“그 녀석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냐.”
“…… 아, 몰라.”
나는 마왕의 정수를 책상 위에 던진 후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내가 계속 생각해봤는데.”
“…… 뭘?”
“마왕, 아까 메피스토펠레스가 왔었잖아.”
“…… 그렇지.”
“그리고 저 정수의 설명을 보니 마왕의 영혼이 들어있다고 되어 있어.”
“그래서?”
내가 정우의 어깨를 툭 쳤다.
“악마의 영혼이 들어있으면 내가 어디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냐?”
“…… 소생?”
“그래! 혹시 내 힘으로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영혼이 들어있나, 싶어서 지금 수정을 깰까 생각 중이야.”
정우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야야, 아서라. 지금 깼다가 만에 하나 녀석이 부활하면 더 골치 아파져.”
“…… 그렇겠지?”
하긴, 내 체력을 전부 쏟아부은 상태에서 녀석을 깨웠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게다가 아이언 메이든 작전까지 사용한 상태, 두 번이나 같은 기술에 걸려들 일은 없으니 녀석이 부활하면 큰일이다.
정우가 정수를 자신의 갑주 사이에 끼워 넣더니 내게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다.”
“…… 왜?”
“네가 이상한 생각하지 않도록.”
“뭐,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사용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필요가 없으니….”
쾅!
갑자기 유소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천재 씨.”
무엇이 저리 급하단 말인가?
“…… 말씀하세요.”
“사자의 서가…. 사자의 서가….”
그녀가 사자의 서를 빠르게 펼치더니 내게 붉은색으로 되어있는 종잇장을 보여 주었다.
왜 이 부분만 색상이 다르지?
“읽어주시겠어요?”
“…… 넵!”
[네 명의 마왕 중 하나가 사라졌다. 그 행방을 찾기 위한 형제들이 흔적을 따라 움직일 테니, ‘여는 자’는 조심해야 한다.]
“……”
“갑자기 사자의 서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여는 자’는 조심해야 한다고 적혀 있어서 빨리 가져왔어요.”
대충 읽어 봐도 마왕의 형제들이 나를 찾기 위해 찾아온다는 말이다.
곤란하다.
지금 있는 전력은 오로지 루시퍼에게 쏟기 위해 계산되어 있는데, 예상외의 적이 나타난다니 말이다.
아무리 난이도를 불지옥으로 올렸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인간적으로 희망의 불씨를 꺼버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하아…. 이거 참.”
같이 이야기를 들은 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럼 이번에는 루시퍼도 상대하고, 마왕도 잡아야 한다, 이 말이야? 그것도 한 라운드에서?”
“그러니까. 이거 어떻게 하냐? 따로 뺄 수 있는 비상 전력은 없는데.”
“마왕급이면 우리가 직접 상대해야 하는 거잖아?”
“뭐…. 그렇긴 한데.”
우리 말고 누구 강한 플레이어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있을 리가 없다.
“해외 플레이어 협상은 잘돼가고 있나?”
“모르지, 지군한테 물어봤어?”
“아니. 깜빡하고 있었어.”
이대로 간다면 우리가 루시퍼에게 질 확률이 높아진다. 강자들 영입이 절실하다.
* * * * *
나는 갑주를 다시 챙겨 입고 저택에서 나왔다. 그러곤 지군을 찾아 그동안의 해외 영업 실적을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다들 답을 불확실하게 주었다. 이 말이지?”
“…… 그렇지. 베트남 플레이어들은 이야기해보니 우호적으로 나오기는 하던데. 확실하게 말해주지는 않았어.”
“중국하고 일본은?”
“중국은 자신들이 먼저 루시퍼를 깰 거라고 극구 거부하고, 일본은 이야기 자체를 거부하던데?”
하긴, 그 두 곳은 그럴 만도 하다.
“그럼 해외 유입은 베트남 말고 기대해볼 만한 곳이 없네.”
“유럽 서버에도 콜을 해봤는데, 그 새끼들은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같이 못 하겠더라고.”
“조건이 뭔데?”
“루시퍼를 처치하고 나온 보상을 자기들한테 넘기래.”
미친놈들 아닌가?
뭐- 게임의 끝을 향해 달려가니 넘길 만도 하지만, 유럽 서버의 플레이어라면 그만한 활약을 보여 주지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 후우. 답답하네.”
“김천재, 혹시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어떻게?”
지군이 내 날붙이를 톡톡 건드리며 미소 지었다.
“적군이 아군이 되는 거.”
“…… 그게 무슨 소리야?”
“이량훈, 그 새끼를 다시 살려내는 거지. 형 부하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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