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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화

“드디어 왔는가, ‘여는 자’여.”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요한 파우스트, 이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 지금의 여는 자라는 존재를 사자의 서로 끌어낸 인물이다.

“예.”

내 대답에 철문이 열렸다.

키이이이익- 쿵!

[시스템 메시지]

[스킬 사용이 제한되어있는 구역입니다.]

[현 시간부로 ‘소환’ 계열 주문의 사용이 금지됩니다.]

문이 열리자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저 방이 나올 줄 알았는데,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 보였다.

“반갑네, 나는 요한 파우스트라고 하네.”

갈색 로브를 입은 흰 머리의 젊은이가 나를 반겼다.

“…… 김천재입니다.”

내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인사를 나눈 파우스트는 문을 닫더니 나를 데리고 초원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네.”

“…… 아니에요.”

어색하다.

아포칼립스 게임에 이런 마음 편한 NPC가 등장하니,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그를 따라 초원을 걷다 보니 내가 스토리 화면에서 보았던 저택이 나왔다.

그가 돈을 모아 고향으로 복귀했을 때의 집과 똑같이 생겼다.

그는 나를 안으로 안내하더니 손을 흔들어 하인을 불렀다. 굉장히 젊어 보이는 여성들이 메이드 복을 입고 있었다.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근데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인형처럼.

“차 좀 가져오도록.”

“알겠습니다, 주인님.”

명을 받은 하인들이 뒷걸음질로 자리를 피했다. 요한은 나를 안방으로 데려가더니 백색의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안나를 보여주었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떠오르는 비주얼이다.

다른 점이라고는 주위가 전부 고급스러운 레이스가 달린 장식이 있다는 것뿐.

나는 누워있는 안나를 내려보며 요한에게 물었다.

“죽었나요?”

“…… 죽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내 질문을 받아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짧게 대답했다.

“예.”

“그렇군요. 어차피 모든 이야기는 알고 왔을 테니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건 알겠습니다.”

발끈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침착하다.

“요한 씨는 안나 씨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신체와 영혼이 전부 있으니까요. 아직 그 역할을 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씁쓸한 표정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예? 무엇을 말입니까.”

“당신이 지금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 신이 정해놓은 인과의 흐름을 거슬러 안나 씨를 살려내기 위한 것 아닙니까?”

내 질문에 요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맞습니다.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지요.”

“저를 불렀다고요?”

“예, 사자의 서를 따라 움직이면 무조건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

“제가 그 기억의 파편 속에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보여주도록 해놓았으니까요.”

역시, 일부러 그 장면을 넣어 두었다는 말이구나. 스토리 화면의 마지막 장면, 한계를 넘어 강해질 수 있는 특수한 물건을 보여주었었다.

나는 하인이 가져온 차를 천천히 마시며 요한에게 물었다.

“결국, 사자의 서는 당신의 기억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군요?”

“해석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요.”

“…… 제가 시간이 부족해서 본론만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물건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내 질문에 요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드릴 수도 있지요.”

“그 말은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 예. 당신의 선택에 따라서요.”

선택에 따라서 그 물건을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있었다고 했으니 분명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법한 대화인데.

‘허허….’

“어떻게 하면 주시겠습니까?”

“……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시면 그 물건을 바로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부탁?”

“예.”

“…… 무슨 부탁인지 우선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요한이 방긋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방 밖으로 나가자 공기가 바뀌며 바닥이 차가워졌다.

오라의 힘만으로 주위 온도를 조절하고 있었나? 마치 사계절로 치자면 따뜻한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갑자기 추운 겨울로 바뀐 것 같다.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앞서 스토리 화면에서 보았던 방이랑 똑같아서, 딱히 확인할만한 것도 없었다.

달라진 점이라고는 화려해진 안나의 침대와 침구류.

내가 안나의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체 에너지를 주입했는지 삐쩍 말랐던 그녀가 통통하게 살이 올라와 있다.

즉 불로불사의 약이 개발되었다는 말인데.

인간이 정말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건가.

‘놀랍다….’

“천재 씨, 이걸 좀 보시겠습니까.”

방으로 돌아온 요한이 내게 천상과 지옥, 그리고 과거에서 현대까지 오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과거 ‘여는 자’라 불리는 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게 말했다.

“이건 천상에서 메타트론과 이야기할 때. 이건 지옥에서 벨제붑과 미래에 대해서 논의할 때. 이건 티아마트를 만나러 가기 전.”

“요한 씨.”

“…… 예?”

“죄송한데 부탁이 무엇인지만 말해주시겠어요? 제가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요.”

요한이 눈웃음을 짓더니 내게 사진 한 장을 던졌다.

“이게 제 부탁입니다.”

그가 넘겨준 사진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땅이 보였다.

“무슨 말이죠?”

“천재 씨, 제가 능력을 드릴 테니. 이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 예?”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고요. 지금 루시퍼를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루시퍼를 잡으면 어떻게 된다니.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멸망을 막겠지요.”

“예 맞습니다. 그럼 루시퍼를 잡지 않으면요?”

잡지 않으면?

“멸망하겠지요.”

“그렇지요? 그럼 제가 원하는 건 무엇이겠습니까.”

“…… 멸망.”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멸망입니다.”

내게 대답을 하는 요한의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해 보인다.

“저보고 멸망을 지켜보라는 말입니까?”

“예, 제가 불로불사의 몸을 드릴 테니. 이번 세계는 멸망하기를 지켜보도록 하시지요.”

어이가 없어서 내가 헛웃음을 뱉었다.

“미안한데, 당신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 이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추구하는 목표는 간단하니까요.”

“추구하는 목표, 안나 씨를 살리는 것 아닙니까?”

“안나를…. 맞습니다. 안나를 그때의 안나로 돌리기 위해 멸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

요한이 안나의 손을 꼬옥 잡더니 좋은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세계는 두 명의 신 중 한 명인 티아마트, 그가 만들어낸 인과율에 의해 멸망할 겁니다.”

“……”

“그리고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테고요. 생명의 탄생부터 시작해 인간이 진화하고 성장하여 지금의 우리가 만들어질 겁니다.”

“……”

“그리고 제가 기다린 그때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면…. 안나는 다시 태어날 겁니다.”

내가 차를 마시며 잠시 생각을 한 후 그에게 물었다.

“새로운 인과의 흐름에서. 안나 씨가 다시 태어나는 걸 기다린다. 이 말씀입니까?”

“역시 여는 자는 다르군요. 한 번에 이해하시다니요.”

“…… 죄송한데 지금 제 앞에 계신 안나 씨가 있는데. 왜 새로운 안나 씨를 기다린다는 거죠?”

요한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똑같은 미래는 없습니다. 즉, 후에 태어날 안나는 지금 제 앞에 있는 안나와 같을 수가 없지요.”

“……”

“저는 지금 제 앞에 있는 안나의 영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할 뿐입니다. 새로운 안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요.”

구질구질하다.

추억 속의 그녀와 재회를 하고 싶다는 말인데. 내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죄송한데 저는 당신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멸망은 막아야 합니다.”

“…… 그렇다면 제가 만든 힘은 받을 수 없지요.”

나를 앞에 둔 그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요한 씨,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후에 모든 일이 당신 계획대로 된다면 안나 씨가 좋아할 것 같습니까?”

“……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스으으윽-

내가 찻잔을 내려놓고 낫을 강하게 쥐었다.

“저를 이곳으로 부른 것을 후회하실 겁니다.”

“아뇨, 여기까지 온 이상 천재 씨는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과연 그럴까요?”

요한이 알 수 없는 미소로 손가락을 튕겼다.

딱!

“머리를 좀 식히고 오시죠.”

그 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틀리며 내가 저택 밖으로 튕겨 나왔다.

“…… 제길.”

요한의 뜻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멸망이 이대로 진행되기를 바라고, 신이라는 작자들에 의해 또다시 역사가 되풀이되기를 원한다.

‘…… 주지 않는다면 강제로 가져올 수밖에.’

* * * * *

루시퍼가 검은 껍질을 가진 몬스터 알을 자신의 앞에 두더니 손바닥을 통해 오라를 주입했다.

악마들이 초조한 눈빛으로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기대한다기보다는 마치 겁을 내는 것 같다.

루시퍼 또한, 긴장하고 있는지 표정이 묘했다.

“…… 나오너라, 메피스토펠레스.”

그의 부름과 동시에 검은 알이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했다.

[‘제2 마왕, 메피스토펠레스’(가)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좁은 병 안에 갇혀 있던 문어가 모습을 드러내듯이, 작은 알에서 커다란 몸이 튀어나왔다.

나뭇가지들이 모여서 인간의 형상을 만든듯한 모습, 마치 거미 인간을 연상시킨다.

지금까지 봐온 모든 악마 중에서 제일 포악해 보이는 얼굴.

녀석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더니 루시퍼에게 말했다.

“드디어 긴 꿈에서 깨어날 수 있게 되었군.”

“……”

“너, 어둠의 끝에 봉인되어 있던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지?”

루시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엇일 것 같나?”

“…… 애송이, 내게 질문하지 마라.”

“애송이는 바로 너지. 메타트론에게 봉인되어서 끝없는 잠에 빠졌었으니 말이야.”

“…… 그, 그건.”

루시퍼가 피에 젖은 왕좌에 앉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메타트론은 죽었다.”

“……?!”

“그리고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단 하나. 나와 함께 멸망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다.”

“멸망의 길?”

“그래, 곧 있으면 네 형제도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야.”

메피스토펠레스가 혀를 날름거리며 루시퍼의 얼굴 앞으로 바짝 붙었다.

“좋아….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깨워준 은혜에 보답은 하도록 하지.”

“……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무(無)의 세계. 모든 존재가 사라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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