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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화

“쏘리, 안나!”

회색 빵 모자를 쓴 멜빵바지의 꼬마가 해맑게 웃으며 초원을 뛰고 있다.

그 뒤를 따라 양 갈래 머리의 소녀가 열심히 따라간다.

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 저 녀석이 파우스트인가.’

둘은 열심히 풀밭을 뛰다가 자그마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하고 있나, 싶어 오두막을 투과해서 들어가 보니 둘이서 토끼풀을 가지고 반지나 목걸이 따위를 만들고 있었다.

밖에서 해도 되는 일을 왜 굳이 여기서?

“야 안나, 너 나랑 결혼하는 거다.”

“내가 너랑? 미쳤냐.”

“근데 이 반지는 왜 받아?”

“…… 그냥! 이쁘니까 받는 거지. 내가 너랑 결혼하려고 받냐.”

“뭐라는 거야? 또 아버지 술 훔쳐 먹었냐?”

“뭐래!”

내가 둘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이에나 할 수 있는 대화.

서로 토끼풀 반지를 교환한 파우스트와 안나는 오두막에서 나와 서로의 집으로 갔다.

나는 둘 중 누구를 따라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파우스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 스토리의 주인공을 따라가야 무언가를 볼 수 있겠지.

‘…… 저건 또 뭔데?’

파우스트가 도착한 곳은 너무나도 빈곤한 집이었다. 나무판으로 만든 천장이 반쯤 무너져 안에서도 하늘이 보이는 폐가 수준.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크게 소리쳤다.

“다녀왔습니다!”

안에서 힘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다녀왔니.”

“엄마, 오늘은 이만큼 구해왔어요!”

“…… 수고했다.”

파우스트가 가져온 것들은 초원에서 꺾어 딴 몇 가지 종류의 풀과 꽃들.

그의 어머니는 파우스트에게 풀과 꽃을 갈색의 반죽과 섞어 불에 굽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는 짓인가, 하고 유심이 쳐다보았더니 그녀는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왜 반죽에 꽃과 풀을 섞지?

나는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며 그녀를 유심히 보았다.

그 의문은 파우스트와 어머니가 식사할 때 풀렸다.

아무런 맛도 없는 반죽에 향과 단맛을 추가하기 위해 그에 맞는 꽃과 풀을 꺾어온 것이었다.

‘…… 뭐.’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나무껍질을 오래 씹어 단맛을 느꼈다고 들어보기는 했는데, 저렇게 먹는 방법은 처음 보았다.

식사를 마친 파우스트가 신이 난 듯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 안나랑 결혼할 거예요.”

“…… 안나? 안나 크라프트?”

“네!”

어머니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너 또 안나랑 놀았니?”

“네.”

“엄마가 안나랑은 놀지 말라고 했잖아.”

“……”

“그 아이는 귀족 집 자식이야, 우리와 어울리면 안 된다고.”

“아 어머니! 좋아하는데 귀족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요?”

“너 이….”

그의 어머니가 뺨을 때리려 손을 들었다가 천천히 내려놓았다.

“파우스트야.”

“…… 네.”

“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 거다. 우리와 그녀의 차이는 태양과 달이야.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떠서 서로가 만날 수 없듯, 그 차이는 좁혀질 수 없어.”

“아침과 밤이 동시에 오면 되잖아요?”

너무나도 어이없는 대답이었는지, 조금 전까지 화가 나보이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올 수도 있죠.”

파우스트는 눈치를 보며 식사를 허겁지겁 마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덴디 아저씨네서 일하기로 한 날이라서 좀 늦어요.”

“늦어? 무슨 일을 하는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오래 걸린다고 했어요. 뭐…. 양 털깎기 같은 거 아닐까요?”

어머니가 파우스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심히 다녀와라.”

“네!”

나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의 어머니와 파우스트가 쓸 만한 물건만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없는 건가?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래 보인다.

‘세라피나….’

저 여자의 이름인가?

책상 위에 있는 종이봉투 위에 모두 똑같은 이름이 적혀 있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파우스트가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동시에 안개 커튼이 쳐졌다.

이번에는 어떤 장면을 보여주려 하나? 하고 팔짱을 끼는데.

생각보다 빨리 커튼이 열렸다.

촤르르륵-

“이 미친 여편네가!”

찰싹!

파우스트의 어머니가 뺨을 부여잡고 뒤로 크게 쓰러졌다. 그녀의 앞으로 콧수염 난 뚱보 아저씨가 씩씩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안나 크라프트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우물쭈물 거렸다.

“아, 아버지.”

“조용히 해라 안나야. 이 거지 같은 놈이 어디 우리 딸을 탐내!”

안나의 아버지는 높은 사람이었는지 병사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 두 명이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때마침 집에 도착한 파우스트가 그 장면을 목격하더니 안나의 아버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그의 어머니가 몸을 던져 파우스트를 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한 번만 봐주시면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어머니 뭐 하시는 거예요?”

“시끄럽다 이놈아. 빨리 고개 안 숙이고 뭐 하냐.”

“어머니!”

세라피나가 파우스트의 고개를 눌러 푹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곤 안나의 아버지를 향해 손을 싹싹 빌며 말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용서해주십쇼. 저희 아들이 정말 몰라서 그런 겁니다.”

“뭘 몰라? 안나가 내 딸인 건 이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나?”

“가르침이 부족한 아이라 높고 낮음을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 어미가 이번에 꼭 가르치도록 할 테니 제발….”

안나의 아버지가 퉤엣! 하고 땅에 침을 뱉더니 경멸하는 눈초리로 파우스트를 보았다.

“네가 우리 딸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쓰레기구나.”

“……”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살고 싶으면 내 딸 근처에 절대로 나타나지 말아라. 한 번만 더 눈에 얼씬거리면 너뿐만 아니라! 네 애미까지 죽는 줄 알아!”

“……”

“자, 가자 안나. 너도 이런 꾀죄죄한 놈은 쳐다보지도 마라!”

안나가 자신의 아버지와 파우스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파우스트를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시끄럽다. 따라오너라.”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갔다. 파우스트가 뒤따라가려고 땅을 차고 달려갔지만, 거구에 사나이에 막혀 땅에 뒹굴었다.

그의 어머니가 콜록거리며 집 밖으로 나와 파우스트의 등을 잡았다.

“얘야, 참아라. 참아!”

“어머니, 이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참아요?”

“참아라. 우리는 그래야 한다.”

“어머니!”

파우스트의 어머니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털썩.

“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 * * * *

‘…… 뭔데.’

어머니가 콜록거리며 쓰러지는 화면이 끝남과 동시에.

파우스트가 묘지 앞에서 크게 우는 장면이 이어서 보였다.

그가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며 크게 소리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지면으로 내려가 묘비명을 보니 ‘세라피나’라고 적혀 있다.

‘……’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파우스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쏟아졌다.

파우스트는 그 비를 맞으며 그대로 묘지 옆에 누웠다.

“하아…. 어머니….”

상심한 녀석의 표정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갈색 머리의 여성, 안나 크라프트가 노파와 함께 우산을 쓰고 왔다.

차가운 표정의 그녀가 누워있는 파우스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파우스트.”

“…… 꺼져.”

“미안해.”

“꺼지라고.”

“……”

안나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질척이는 진흙 때문에 옷이 크게 젖었다.

같이 따라온 노파가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아가씨! 이런 놈 때문에 옷을 더럽히다니요. 일어나세요, 감기라도 걸리시면 제가 주인님을 뵐 면목이-”

“조용히 하세요.”

“아가씨….”

안나는 파우스트의 어머니가 하던 것처럼 두 손을 싹싹 빌며 파우스트에게 말했다.

“파우스트, 정말 미안해. 내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지만 정말…. 정말….”

“…… 안나, 네가 이렇게 하더라도 우리 어머니가 죽은 건 돌이킬 수 없어.”

“……”

“그리고 나는 너희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어.”

파우스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안나를 픽, 하고 째려본 후 자리를 떠났다.

안나가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파우스트!”

내가 그 둘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 이런 스토리인 줄 알았으면 미리 담뱃불이라도 붙여 놓는 건데.’

이후의 스토리는 장면이 빠르게 흘러가며 파우스트의 성장을 보여주었다.

집을 떠나 먼 곳에서 장사하다가, 그 돈으로 연금술사로 보이는 자에게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고.

각종 물건을 만들어 시장에 팔아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며 직위를 샀다.

몇 년이 걸리는 과정을 내게는 십 분 만에 짧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게임에서 흔히들 말하는 ‘왕의 귀환’, 거지가 부자가 되어 다시 자신의 마을에 도착한 파우스트.

그는 허름한 자신의 집이 있던 자리에 저택을 짓고, 많은 수의 시종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소문을 들은 안나의 아버지가 그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마을의 영주인 테디 크라프트 남작입니다.”

파우스트가 매서운 눈으로 대답했다.

“…… 요한이라고 합니다. 직위는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요?”

“예, 예. 요한 백작님…. 그나저나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낯이 익군요.”

요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와인을 마시며 대답했다.

“그런가요.”

인사를 마친 테디 크라프트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예, 백작님에게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네요.”

“……”

눈치를 보던 테디가 잔에 담겨있는 와인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꼴깍.

그리곤 던지듯 물었다.

“소문을 들어보니 굉장한 연금술사라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 예.”

“연금술에는 성공하셨는지요?”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아, 그렇군요….”

“왜요? 금이 필요하십니까?”

테디 크라프트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떼기를 반복했다.

요한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며 와인을 삼켰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테디 크라프트를 따라온 노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주인님, 말씀하시지요. 지금이 아니면….”

“…… 그래.”

둘의 대화를 들은 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그게…. 저희 딸이 좀 문제가 있어서….”

“딸이?”

“예…. 그 아이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요한이 놀란 듯 흠칫하더니 두 눈을 감고 잔에 남아있는 와인을 삼켰다.

꿀꺽.

“그래서요?”

“혹시 연금술을 사용할 줄 아시면 그 아이에게…. 묘약을 좀 만들어 주십사 해서….”

쾅!

요한이 탁자 위에 강하게 내려놓으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테디 크라프트.”

“예, 옙!”

“딸이 왜 아프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테디 크라프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그럼요. 그때가 아마…. 십년 전쯤이었나?”

“…… 예.”

“저희 딸아이가 마을 거지새끼랑 연이 조금 닿아서. 제가 그사이를 끊기 위해 본보기로 그 녀석의 어머니를 혼내준 적이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지만, 저 때는 당연했나 보다. 대놓고 저렇게 대화하는 것으로 보니 말이다.

요한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군요. 계속 말씀하세요.”

“아, 그때 뭐가 좀 꼬였는지. 하필 그 새끼 애미가 죽더군요.”

“……”

“저희 아이는 그걸 제 탓이라고 생각해서 그 거지한테 속죄한다고 음독(飮毒)을 시도해서….”

“혹시 그 거지 새끼라는 놈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예?”

“방금 말씀하신 거지새끼라는 자말입니다.”

“……”

테디 크라프트의 눈동자가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그가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하찮게 생각했으면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는지, 시간이 흐를수록 요한의 표정이 더욱 단단하게 굳어갔다.

이야기를 듣던 노파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움찔거리더니 테디 크라프트에게 말했다.

“나, 남작님.”

“말해.”

“그…. 그…. 거지새끼의 이름말입니다.”

“어? 어! 그래 그 새끼 이름이 기억났나?”

“예…. 그 거지의 이름이….”

“이름이?”

“파…. 파우스트, 요한 파우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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